앵무새, 직원 그리고 사장님의 뜻밖의 환대
여기저기서 부스럭 거리는 소리.
몇 시쯤일까.
침대 옆 커튼 아래로 사람들의 발들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방문은 들어오고 나가는 투숙객들에 의해 열렸다 닫히기를 반복하고, 방안은 짐을 챙기는 사람의 움직임으로 부산하다.
게스트하우스의 여행객들은 이른 아침부터 바쁘다. 고급 호텔의 투숙객은 숙박시설에 머무는 것만으로도 '호캉스'라는 색다른 힐링 여행이겠지만, 작은 매트리스의 2층 침대로 가득 찬 이곳의 여행객들에게 숙소란, 고속도로를 주행하다가 잠깐 쉬는 '졸음 쉼터'와 같은 곳이다. 자고 일어났으면 빨리 움직여야 한다.
몇 시쯤일까.
반쯤 뜬 눈으로 스마트폰을 켠다.
8시 조금 지난 시간.
체크아웃까지는 두 시간 조금 넘게 남았네.
몸을 옆으로 돌려 베개를 가슴팍에 끼워서 엎드린다.
엄지 손가락 지문으로 스마트폰을 깨우고 검지로 페이지를 휙휙 넘겨 호텔 예약 앱을 누른다. 게스트하우스를 나가기 전에 해야 할 일은 오늘 저녁 숙소를 예약하는 것이다.
지금의 게스트하우스는 심야 공항버스의 노선을 감안해서 선택한 곳이기 때문에 임시거처에 불과하다. 오늘은 앞으로의 여행에 필요한 진짜 숙소를 예약해야 한다.
어젯밤 게스트하우스 주인에게서 받은 방콕 지도를 펼쳤다.
방콕엔 어떤 곳들이 있을까.
지도를 쭉 훑어본다.
주거시설이 밀집된 지역에서 현지인처럼 살아볼까. 아니면 쇼핑몰이 가까운 번화가? 대표 관광지의 이동이 편리한 교통의 중심 지역? 본격적인 숙소는 여행의 성격에 따라 그 기준이 달라진다.
먼저 지하철 노선을 중심으로 호텔 예약 앱을 통해 주변 지역 가격을 검색한다.
역세권 프리미엄 때문인지 웬만한 호텔 가격이 십만 원을 훌쩍 넘는다. 하루 숙박비로 십만 원 넘게 쓸 거면 유럽으로 갔지. 동남아로 올 이유가 없다. 역세권은 포기.
스마트폰을 옆으로 치우고 종이 지도를 다시 살핀다. 지도의 중앙에는 교차하는 지하철 노선과 쇼핑몰이 몰려있고, 오른쪽은 공항, 왼쪽엔 위아래로 흐르는 강줄기가 보인다.
그곳에서 낯익은 이름을 발견했다.
'카오산 로드'.
카오산 로드가 방콕에 있었구나.
'카오산 로드'
아주 아주 오래전부터 동경했던 곳이다.
지금처럼 인터넷이 활성화되어 있지 않던 학창 시절. TV, 라디오, 책이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매체였던 시절. 어디에서 봤는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아무튼 바다 건너 어느 나라에 '전 세계 여행자들이 모이는 카오산 로드'라는 곳이 있다고 했다.
다양한 국가의 사람들이 모이는 곳. 그래서 그곳의 시장에는 없는 게 없단다. 그때는 어렸기에 해외여행이란 나와는 상관없는 꿈같은 이야기였지만, 만약에 내가 어른이 되어 세계의 단 한 곳만 여행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카오산 로드'를 갈 거라고 막연하게 결심했었다. 카오산 로드가 중국에 있는지, 미국에 있는지도 모른 체.(인터넷이 없었으니 검색할 방법도 없었다)
전 세계 여행자들이 모이는 곳이라니. 얼마나 매력적인가. 그러면 힘들게 세계여행을 안 해도 되잖아? 내가 찾아가지 않아도 그들이 스스로 카오산 로드로 몰려오니깐. 그곳으로 가면 세계여행 한 것과 마찬가지네? 얼마나 편리해? 전 세계 다양한 물건들도 구경할 수 있다고? 만약, 지니의 요술램프처럼 동화 속 신비로운 물건을 구할 수 있는 곳이 있다면 바로 저곳이 아닐까?
공부보다 상상하는 걸 좋아했던 어린 시절 나에게 '카오산 로드'는 마치 동화 속 마법의 도시의 모습으로 점점 커져갔다. 하지만 어린 시절의 많은 꿈들이 그러하듯, 어른이 되어 십여 개국을 여행하면서도 그 '마법의 도시'의 이름은 잊고 있었다.
이렇게 다시 만날 줄은 몰랐네.
더 이상 알아볼 것도, 망설일 것도 없다.
다시 호텔 예약 앱을 열어 '카오산 로드' 주변의 호텔을 검색한다.
1인실(캐리어의 안전을 위해).
카오산 로드에서 도보로 이동 가능한 거리.
리뷰에 베드버그(진드기)가 없어야 하며, 결정적으로 가성비가 좋을 것.
내 선택의 기준이다.
유명한 거리인 만큼 숙박시설들이 많았다. 나는 그중에 세 곳으로 예상 범위를 좁히고 가격을 확인한 후 후기를 검색한다. 후기를 검색할 땐 별이 낮은 순으로 정렬하면 그 호텔의 문제점을 빠르게 확인할 수 있다. 베드버그(진드기)가 나왔다면 별 1개 혹은 2개. 후하게 치면 3개 정도로 평가하고 후기를 남겼을 것이다.
세 군데 중에 한 곳이 배드버그 혹은 바퀴벌레 발견 후기가 있었고, 두 군데는 시설이나 서비스 불만족등 이용자 주관적 의견으로 별을 적게 준 것일 뿐 벌레 이야기는 없었다. 남은 두 곳 중에 '지금 이 가격의 객실이 1개 남았습니다 서두르세요'라는 특별 할인(심지어 지금의 게스트하우스보다 저렴한 가격) 객실을 바로 결제했다.
예약한 호텔은 카오산 로드에서 도로 하나만 건너면 되는 람부뜨리 거리에 있다. 나는 곧이어 구글 지도에 출발지를 지금의 게스트하우스로, 도착을 새로운 호텔이름으로 입력한 후 검색결과로 표시된 대중교통 화면을 캡처했다.
샤워하고 나갈 준비를 마치자 체크아웃 시간에 가까워졌다.
캐리어와 백팩을 메고 로비로 내려왔다. 어젯밤에 봤던 직원이 내게 인사하며 지금은 사장님이 잠깐 자리를 비웠으니 로비에 앉아서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
기다리는 동안 그녀는 게스트하우스에서 키우는 작은 앵무새 한 마리를 보여줬다.
주먹만 한 크기의 작은 새는 그녀의 어깨에 앉아서 고개를 좌우로 갸웃거리며 나를 바라보다가 테이블 위로 내려왔다.
민트색과 파란색이 예쁘게 섞인 작은 새.
너무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앵무새 앞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앵무새는 날개를 펼치지도 않고 폴짝 뛰어 내 손가락 위로 올라왔다.
직원은 그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며 이 새가 처음 보는 손님의 손가락 위에 거리낌 없이 올라타는 건 흔치 않은 일이라고 했다.
나는 미소를 띠며 동물과 아기들은 내게 우호적인 편인 거 같아.라고 말했고 그녀는 웃으며 여자들은 어때? 물었다. 나는 음. 여자들은 제외. 하지만 만약 착한 사람이라면 나를 좋아해. 웃으며 말했다. 그녀는 곧이어 나는 너를 좋아해.라고 말했고, 나는 정말? 오~ 당신은 착한 사람입니다. 서로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었다.
앵무새는 내 오른손 손가락 위에서 나와 그녀를 번갈아 보며 고개를 갸웃했고, 나는 기념으로 앵무새 영상을 찍기 위해 왼손으로 스마트폰을 들고 녹화 버튼을 눌렀다. 사진을 찍는 줄 아는지 모르는지 처음엔 포즈를 취하던 녀석은 이내 지겨웠는지 부리로 내 손을 쪼고 직원의 어깨 위로 날아갔다.
초상권에 민감한 녀석일까.
그렇게 직원과 새와 함께 놀고 있으니 사장님이 오셨다.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웃으며 아침 먹었냐고 물었다.
나는 조식 시간을 놓쳐서 못 먹었다고 했다.
사장님은 그래도 아침은 먹고 가라며 나에게 토스트 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며 자신이 달걀 프라이를 만드는 동안 잼과 음료를 들고 테이블로 가서 앉아 있으라고 했다.
나는 사장님이 직접 구워준 무려 두 개의 달걀 프라이와 토스트기에서 막 나온 바삭한 식빵. 버터와 코코아로 태국에서의 첫 아침 식사를 시작했다.
안 그래도 이대로 나가면 어디서 아침 겸 점심을 먹지? 살짝 고민했었는데 조식 시간이 지났음에도 사장님이 특별히 챙겨준 덕분에 이제 카오산 로드로 가는 것만 집중하면 된다. 그래서 그런지 토스트가 더 맛있고 소화도 잘되는 기분이다.
식사를 마친 후 짐을 챙겨 사장님께 고맙다고 작별인사를 했다.
직원은 앵무새와 함께 출입문 밖까지 나를 배웅하며 방콕에 오면 다시 방문할 거냐고 물었다. 나는'아마도?' 웃으면서 대답했다.
숙소에서 머문 시간은 열 시간도 되지 않았고, 직원과 함께 보낸 시간은 한 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마치 장기투숙하다가 나오는 것 같은 친근함이 느껴졌다.
만약 다시 방콕행 야간버스를 타게 된다면 나는 이곳에 다시 올 것 같다. 물론, 그때는 수납장에 충분히 들어갈 크기의 날씬한 캐리어나 배낭을 메고 와야 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