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숙소 찾아 떠난 한나절 여행기

택시로 30분 거리가 한나절이 된 이유.

by 하임

뜨거운 태양이 강물의 수평선에 닿아 열기를 식힐 때쯤 나는 카오산 로드의 새로운 숙소에 도착했다.

지난 숙소에서 체크아웃 시간인 11시 조금 넘어 출발했으니까 한나절의 시간이 걸렸다.

한나절이나 걸릴 만큼 먼 거리는 아니다. 구글맵에서 택시를 이용하면 삼십 분 정도 걸렸을 거리라고 했다.

그런데 이렇게 오래 걸렸다고?

만약 내가 유명인사라면 기자들이 호텔 입구에 진을 치고 있을 사건이다.


말씀 한 마디 해주시죠!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걸어서 오셨나요?

아닙니다! 아무리 걷는 걸 좋아하는 저이지만 이런 땡볕 아래서 무거운 백팩을 메고 캐리어를 끌며 걸어오는 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걸어왔으면 더 빨리 왔을 거 같네요.


그럼 기어 오셨나요?

아니요. 아시다시피 여기는 방콕이잖아요. 기어 왔다면 제 등에는 수많은 오토바이 바퀴 자국들이 남아 있겠죠. (기자들을 향해 등을 보여주며) 자. 보세요. 제 등은 깨끗하죠? 그러므로 기어 오지 않습니다.


그럼 말이 안 되잖아요! 어떻게 거기서 여기까지 한나절이 걸릴 수 있는 거죠?

그러게요. 오는 길엔 아무 생각 없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까 궁금하실만하네요.

저는 단지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왔을 뿐입니다만.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

이번 에세이는 '엄마 찾아 삼만리'.. 아.. 아니.. '새 숙소 찾아 한나절'의 여행기입니다.




게스트하우스에서 예상 못한 환대를 받고 나는 거리로 나섰다.

구글맵의 화살표는 오늘 새벽 공항버스에서 내렸던 버스정류장의 근처를 가리켰고, 한 손에는 캐리어를, 다른 한 손은 스마트폰을 쥔 체 새벽에 걸었던 길을 되돌아 걷는다.

분명히 어제와 같은 길임에도 달빛 아래와 햇빛 아래의 길은 완전히 다른 느낌이다.


무엇보다 너무 더웠다.

스스로 선택한 여정이지만, 태양의 열기는 예상 밖이었다.

예상을 뛰어넘는 무더위 속에서 내 안의 긍정이와 부정이가 서로 다투는 소리를 들으며, 달그락달그락. 타 타탁. 울통 불퉁한 인도의 저항과 싸우는 캐리어의 멱살을 끌고 십 여분을 걸어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나는 이번 여행에서 가능하면 대중교통만 이용할 예정이다.

누군가는 그렇게 거리에서 허비하는 시간이 아깝지 않냐. 시간을 돈으로 환산하면 택시를 이용하는 것이 비용을 아끼는 거라고 하겠지만, 내가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는 말 그대로 비용을 아끼기 위해서다. 물가가 저렴한 태국으로 유명하지만 그건 한국을 기준으로 저렴한 것일 뿐, 자꾸 편리함을 찾다 보면 그 편리함의 비용이 하나둘씩 쌓여 하루 숙박비가 되고 이틀 숙박비가 되며, 다른 경험을 더 할 수 있는 비용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편리함을 위해 쓰는 돈은 '소비', 경험을 위해 사용하는 돈은 '투자'같다. 나는 차라리 약간의 불편함을 감안하더라도 조금 더 오래 여행하는 곳에 '투자'하고 싶다.


두 번째 이유는 택시를 이용하면 훗날 여행을 추억할 때 남는 기억이 별로 없다. 여행이 아니라 관광하고 온 듯한 기분이랄까. 지난 여행을 되돌아볼 때 많이 걷고, 대중교통을 주로 이용했던 곳들은 한때 내가 살았던 제2의 고향처럼 기억이 남는데, 택시만 이용했던 곳은 그 기억들이 마치 바다 위의 섬처럼 띄엄띄엄 남는다. 하루 종일 관광버스 속에 갇혀서 가이드의 지시에 따라 내렸다가 탔다가만 반복한 것 같은 기분이랄까.

여행 당시의 시간적 기회비용을 기준으로 보면 택시를 타는 게 더 효율적이겠지만, 여행 후 추억의 기회비용의 관점에선 택시만을 이용해서 이동하는 건 비용을 쓰고도 남는 추억은 없는 최악의 가성비라고 할 수 있다.

'여행의 순간은 짧지만, 추억은 영원하다'는 기준에서 본다면 지금은 조금 고생하더라도 되도록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이 훨씬 합리적 선택이라 할 수 있다.


모칫역 근처에는 두 개의 버스 정류장이 있었다. 하나는 많은 버스들이 정차하는 큰 정류장이고 다른 하나는 팻말 하나 덩그러니 놓인 작은 임시 정류장이었다. 구글맵이 안내한 곳은 후자의 작은 임시 정류장이다.

의자 하나 없이 달랑 정류장 팻말뿐인 정류장.

정오에 가까운 시간이라 그늘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겨우 머리 하나 들어갈 만한 작은 나뭇잎 그림자 속으로 정수리를 밀어 넣는다. 머리라도 햇볕을 피하면 일사병은 안 걸리겠지.


20분이 지났다.

구글맵이 예상한 도착시간을 한참 넘겨도 버스는 오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지도를 새로고침 했더니 이번엔 아까 지나온 큰 정류장을 가리키는 게 아닌가.

왜 검색 결과가 이전과 다르지?

안 그래도 더워 죽겠는데 구글맵까지 나를 시험에 들게 한다. 하지만 의지할 건 이것밖에 없으니,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투덜거리며 큰 정류장에서 다시 버스를 기다린다.


구글맵이 예상했던 30분이 지나고 40분이 지났지만 여전히 버스는 감감무소식이다.

또다시 '혹시나' 하는 마음에 현지인에게 카오산 로드로 가는 버스가 여기 서는 게 맞는지 물어봤지만 영어가 통하는 사람이 없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구글 번역기도 질문자와 답변자의 거리를 좁히지 못했다.

다시 구글 맵을 새로고침 한다. 녀석은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다시 20분 뒤에 버스가 도착할 예정이라고 슬쩍 안내를 바꿨다. 뭐야 이거. 양치기 구글이야 뭐야. 또다시 20분이 지났지만 버스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방콕의 교통 시스템과 구글의 연동이 원활하지 못한 걸까.

숙소를 나설 때 좋았던 기분은 뜨거운 태양의 열기 속에 완전히 증발해 버리고, 끈적하고 텁텁한 짜증이 배꼽 아래에서 스멀스멀 기어올라온다. 더 이상은 안 되겠다. 한 번에 카오산 로드로 가려던 계획을 바꿔 환승이 가능한 코스를 다시 검색한다. 지하철을 타고 싶다. 이 뜨거운 햇볕을 피해 지하로 숨어들고 싶다.

나는 조금 둘러가더라도 지하철에서 열기를 식히기로 결심하고 모칫역에서 블루라인을 타고 버스로 환승하는 경로를 선택했다. 방콕의 뜨거운 태양과 양치기 구글이 내게 선사한, 길 위에서의 고단한 오기에서 이제는 벗어나고 싶다.


지하 1층으로 내려가자 우리나라 지하상가처럼 상점들이 보인다.

강남역 지하상가보다는 한산하지만 현대식 시설과 쾌적한 온도는 방금 전 땅 위와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다.

지하철 표를 구입하는 곳은 지하 2층이지만, 가던 길을 멈추고 지하상가를 구경하기로 한다.

이런 게 혼자 하는 여행의 묘미다.

동행자가 있다면. 만약 그 동행자가 목적 지향적이거나 계획에 맞게 움직여야만 하는 성향이었다면. 이런 즉각적인 경로변경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길게 뻗은 지하상가에는 다양한 종류의 식당과 카페, 여행 용품점 그리고 한국의 다이소처럼 여러 생활용품을 판매하는 가게들로 빼곡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건 스마트폰 관련 가게들이었다. 미니 조명, 링 조명, 삼각 거치대, 스마트폰 액세서리 등 SNS 업로드에 필요한 장비들이 가득했다.

예전에 태국 사람들은 SNS용 사진을 찍고 찍히는 걸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이런 풍경도 그 때문일까 싶다.


식당과 카페는 개인음식점보다는 프랜차이즈점이 많았다.

태국의 프랜차이즈 음식점은 어떨까?

오랜 시간 동안 땡볕 아래서 버스를 기다린 탓에 배가 몹시 고팠다. 나는 근처의 가게들을 두리번거리다가 '빅보이'라는 패스트푸드점의 스위트 소스 닭고기 덮밥에 시선이 꽂혔고, 저렴한 가격과 사진 속 비주얼을 보고 바로 주문했다.

가격은 69밧. 한국돈으로 2900원. 가게는 벽 쪽에 붙어있고, 중앙 복도에는 앉아서 먹을 수 있는 식탁과 의자들이 놓여 있었다. 나는 빈 테이블의 의자 옆에 백팩과 캐리어를 내려놓고 음식을 기다렸다.

십여분 정도 지나자 음식이 나왔다.

역시 동남아 음식답게 덮밥 위에는 짧게 자른 초록색 고수들이 토핑 되어 있었다.

동남아 음식에는 한국의 깨소금처럼 음식에 기본으로 고수가 뿌려져 나오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고수를 싫어하시는 분들은 방문하는 국가의 언어로 "고수를 빼주세요(태국어로 마이 싸이 팍치)"를 외워 가는 것이 좋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고수를 잘 먹는 터라, 오히려 그 작은 초록색 녀석들이 반갑게 느껴졌다.


고수는 몇 년 전, 베트남에서 처음 접했었다.

현지인들로 가득한 허름한 로컬 식당의 쌀국수 위에 가득 올려져 있던 초록색 식물.

이 녀석이 말로만 듣던 그 고수구나.

하지만 한 입 베어 먹자 콧 속에 전해지는 그 특유의 향에 거부감이 일었다. "누가 오이비누를 식탁 위에 올려놓았나?" 두리번거리게 만드는 향. 작은 녀석이 내뿜는 강렬한 오이비누 향에 속이 부대꼈다. 먹는 음식에 오이비누 향이라니. 한국음식에 비유하자면 설렁탕에 향수 뿌린 맛이라고 할까.

이쯤 되니 초록색 식물이 고수가 아니라, 이 식물을 아무렇지 않게 삼킬 수 있는 자가 진정한 '고수'라는 칭호를 얻을 수 있어서 식물의 이름이 '고수'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날 이후로 수련하는 기분으로 음식점에 갈 때마다 더 많은 고수를 입안에 억지로 밀어 넣었다. 아무렇지 않은 듯한 거짓 미소를 띠며.

그렇게 하루하루 수행에 집중하던 어느 날. 그 특유의 향에 대한 거부감이 점점 청량함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눈을 감고 음미하면 마음속에 오전의 상쾌한 숲이 펼쳐지고, 나는 피톤치드 향을 남기고 지나가는 바람의 손길을 느꼈다.

그날 이후로 나에게 고수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마들렌 같은 존재가 되었다.

한 잎 베어물 때마다 동남아 여행의 추억을 소환하는.


하지만 너무 '롱 타임 노 씨'였던 걸까. 몇 년 만에 다시 만난 고수는 다시 오이비누였다. 몇 년 사이에 나는 다시 '하수'가 되어버렸다. 예전처럼 다시 '고수'를 잘 먹는 '고수'가 되기 전까진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으리.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어쨌든 이제 배를 채웠으니 다시 목적지에 집중할 시간이다.



에스컬레이트를 타고 지하 2층으로 내려갔다.

여러 대의 승차권 판매기와 역무원 부스가 보인다. 판매기 앞은 한산했지만, 역무원 부스 앞은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나는 승차권 판매기 앞에 섰다.

판매 부스의 길게 늘어선 줄의 일부가 되는 것도 싫지만, 뒤에 사람들이 기다린다는 것만으로도 태국어를 할 줄 모르는 내겐 큰 부담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승차권 판매기에는 대기하는 사람이 없고, 만약 승차권 구입에 시간이 오래 걸리면 뒷사람이 먼저 일을 처리할 수 있도록 비켜주면 되니깐.


승차권 판매기의 화면엔 역시 온통 태국어뿐이다.

오른쪽 상단에 영국 국기가 보였다. 터치하는 순간 낯선 태국어는 덜 낯선 영어로 바뀌었다.

화면에서 내가 도착해야 할 목적지를 선택하고, 표시된 금액을 현금 투입구에 넣는다. 지하철은 요금은 버스에 비하면 많이 비싸고 환율로 계산하면 한국과 큰 차이 없을 정도의 가격이었다.


작은 토큰이 나왔고, 토큰을 지하철 개찰구에 터치하니 문이 열렸다.

개찰구를 지나 한 층 더 아래로 내려간다.

지하철을 기다리는 곳엔 커다란 스크린이 있고 태국 상품 CF가 방영되고 있었다.

광고내용이 독특하다.

애니메이션으로 구현된 사람의 뇌가 주인공이다.

뇌가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사고가 나서 손상된다. 하지만 오토바이 헬맷을 쓰고 운전을 한 뇌는 멀쩡하게 살아남았다. 무슨 말인지 전혀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광고가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적나라한 직설적 표현은 보는 사람에 따라 거북할 수 있을 거 같다.

만약 우리나라에서 같은 광고를 방영한다면 문제의 소지가 있었을 텐데, 이렇게 공공장소의 대형 스크린에 방영되고 있다는 건 태국에선 문제가 없다는 말이겠지.

그래서일까. 그 광고는 충격적이면서도 신선했다.

'머리에 헬맷을 쓰지 않으면 위험할 수 있습니다'라는 문구나 어떠한 간접 표현보다 훨씬 직접적이지 않는가.

외국인이고 태국어를 전혀 모르며, 오토바이를 운전할 줄도 모르는 나도 그 광고를 보는 즉시 '아 만약 오토바이를 탄다면 헬맷을 꼭 써야겠구나.. 이 무더운 나라에서 헬맷을 쓰면 더워 죽을지언정 사고로 죽지는 않겠구나'하는 경각심이 생길 정도니깐.

다음 광고는 세계 어느 곳을 가도 볼 수 있는 화장품 광고였다.

무슨 말인지는 몰라도 시각만으로도 메시지 전달이 가능한 태국 광고의 매력에 점점 빠져들 때쯤 전철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린다. '아 다음 광고도 보고 싶은데.' 아쉬움을 뒤로하고 지하철에 올랐다.


지하철 내부는 에어컨 냉기로 인해 쾌적했지만 빈 좌석은 없었다.

나는 가만히 서서 사람들을 구경한다.

모든 것이 설레며 신선하다.

그냥 그들 속에 섞인 이방인이라는 존재만으로도 기분이 좋다. 내리는 사람, 타는 사람, 전철 내부에서도 방영되는 재미있는 광고들. 심지어 지하철 안내방송의 특유의 억양까지도.

태국어 발음은 뭔가 부드럽고 다정하다. 어디선가 태국어는 언어 그 자체보다 다양한 성조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에 배우기 힘들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중국어도 성조가 있지만 중국어와는 다른 느낌이다. 중국어는 저가의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을 때, 불편함이 느껴지는 특유의 고역대 주파수라면, 태국어는 같은 고음이라도 거슬리지 않는 편안한 음역대를 구사하는 느낌이랄까. 약간의 애교가 섞인 연인의 언어 같은 기분이라 간질간질하다.


내려야 할 역을 알리는 안내방송이 들린다.

역시 구글맵에 한글로 표시된 것과는 발음이 다르다.

나는 속으로 그 발음을 반복해서 따라 하며, 캐리어 손잡이를 꽉 쥐고 내릴 준비를 했다.

지하철역 출구로 나왔다. 쾌적했던 공기는 이내 가루 분유처럼 진득하고 텁텁한 공기로 바뀌었고, 나는 다시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GPS를 확인하며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여기서 버스를 갈아타면 이제 두 번째 숙소에 도착할 수 있다.

다행히 이번 정류장엔 커다란 나무가 서 있었고, 서쪽으로 저물어가는 태양은 커다란 나무의 그늘을 더 길게 만들어 햇볕을 가려줬다. 나는 정류소의 긴 의자에 앉았다. 그렇게 멀지 않은 거리를 걸어왔을 뿐인데도 벌써 땀방울이 고개를 내민다.


역시나, 양치기 구글은 또다시 헛걸음을 예고했다.

"20분 뒤에 버스가 나타난다!"라고 했지만 역시 버스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마침 옆에 교복을 입은 학생들에게 구글 지도와 함께 버스 번호를 보여주며 이 정류장이 맞는지 물어봤다. 학생들은 여기 오는 건 맞는데 많이 기다려야 할 거라고 대답했다.

정류장이 맞다고 하니, 기다리면 오겠지.


교복을 입은 학생들은 곧이어 도착한 택시를 타고 그 자리를 떠났고 나는 남아서 버스를 계속 기다렸다.

아이들이 쾌적한 택시를 타고 떠나는 걸 보면서, 나도 그냥 택시를 부를까 싶었지만 게스트하우스에서 여기까지 고생해서 온 것도 있고, 여기서 무너지면 앞으로도 쉽게 택시를 이용할 거 같아서 참았다.


또다시 시간이 흘렀지만 버스는 오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구글 지도를 새로고침했다.

모칫역에서처럼 또 다른 선택지가 화면에 나타났다. 이곳에서 5분 정도 되는 거리에 버스 정류소가 있는데 그곳에 숙소로 가는 더 많은 버스가 온다고 했다. 버스 도착 예상 시간은 10분.

어떡하지?

마음은 순간 고민했지만, 몸은 이미 일어서서 짐을 챙기고 있다.

기다린 시간이 아쉽긴 하지만 너무 오래 기다려서 온갖 정이 다 떨어졌다.

'너는 내 버스가 아닌거 같아. 우리 그만 헤어지자.'


캐리어를 끌고 다른 버스 정류소를 향해 빠른 걸음으로 걷는다.

이번엔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한번 더 구글 지도를 믿어보자.

도착한 버스 정류장은 이전의 정류장보다 훨씬 번화가에 있었다.

아. 진작에 여길 알려줬더라면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하진 않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으로 주위를 둘러보는데 저 멀리서 내가 타야 할 버스가 벌써 보인다. 고장 난 시계도 하루에 두 번은 맞는다더니 지금의 구글맵이 그런 격일까? 나는 다시 한번 버스 번호를 확인하고 버스에 올랐다.



버스의 계단은 굉장히 높았다.

180이 넘는 키인 내가 무릎을 거의 직각으로 굽혀야 할 만큼의 높이.

그리고 이어지는 나무 바닥.

버스에 올랐지만, 요금을 지불할 곳이 보이지 않았다.

마침 버스 승무원과 눈이 마주쳤고, 그녀는 나를 보더니 잠시 기다리라고 눈짓했다.

기다리는 동안 버스 내부를 살펴본다.

완전히 열려있는 창문들. 삐걱거리는 차체. 에어컨은 당연히 없고, 선풍기도 없다.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지나가는 바람을 붙잡고 호객행위라도 하고 싶다.


곧이어 버스 안내원이 내 곁에 왔고, 나는 그녀에게 내릴 목적지를 구글 지도로 보여줬다. 그리고 20밧짜리 지폐를 내밀었다. 안내원은 거스럼돈과 함께 영수증을 줬다.


8밧.

환율로 계산해 보니 300원 정도였다.

에어컨 없는 버스에 대한 불편함은 버스 가격을 보자마자 순식간에 사라졌다.

때마침 자리에 앉아 있던 승객이 내렸고 나는 그 자리에 앉아서 창 밖을 바라본다.

불만이 사라지자 주위의 풍경이 눈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한다. 버스가 멈추면 덥지만 달릴 때는 그래도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나름 시원했다. 솔직하게 말하면 바람은 미지근한데 버스 안이 너무 더워서 상대적으로 시원하게 느껴졌다. 원효대사의 해골물처럼 기분이란 그 사람이 처한 상황에 따라 이렇게 그 기준이 바뀐다.

그래도 이렇게 버스를 탄 게 어디야.

이제 더 이상의 막연한 기다림은 없다. 앉아만 있으면 숙소로 데려다줄 것이다.

버스가 멈출 때마다 로컬 사람들이 버스에 올랐다.

외국인은 나밖에 없어서 그런지 자리에 앉아있던 승객들도, 새롭게 버스에 오르는 사람들도 신기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기분이 들었다.

모든 것이 색다른 경험이다.

한국에선 '여름 = 에어컨 공식'에 따라 에어컨이 없으면 생활 자체가 불가능했었는데, 한국을 떠난 지 24시간도 되지 않아서 어느새 나는 이런 생소한 환경에 적응하고 있다.

물론, 이 버스에서 내려 숙소에 들어가면 시원한 물로 샤워할 수 있고 에어컨 아래서 쉴 수 있다는 기대감이 있기 때문에 이 상황을 즐길 수 있는 거긴 하겠지만.


그렇게 편안한 마음으로 창밖의 풍경도 구경하고 사진도 찍으면서 가끔은 버스가 제대로 가고 있는 건지 구글지도를 확인했다.

구글 지도의 화살표는 목적지의 라인을 따라 착실히 이동하고 있다.


내릴 정류장이 다가오자 승무원은 내게 와서 이번에 내려야 한다고 알려줬다. 외국인이 나밖에 없어서 승무원도 신경이 쓰였나 보다. 나는 웃으면서 최대한 부드럽게 코쿤캅(감사합니다)~ 말하며 버스에서 내렸다.

드디어 숙소에 도착했다.




이런 이유로 한나절 걸렸습니다.


나는 고개를 들며 상상 속의 기자들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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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호텔 직원으로부터 객실 카드키를 받고 3층의 내 방을 향해 계단을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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