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오산 로드로 가는 길
호텔에 짐을 풀고 샤워를 마친 후 밖으로 나섰다.
어깨를 짓누르던 거대한 태양이 사리진 거리.
하루 종일 울퉁불퉁한 길 위에서 투덜거리던 캐리어는 마치 긴 고된 훈련을 마친 운동선수처럼 포근한 호텔 침대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무겁고 거추장스럽던 모래주머니로부터 마침내 자유를 되찾은 순간의 홀가분함이 이런 기분일까. 자유를 되찾은 두 손과 뜨거운 열기가 사라진 밤거리에 발걸음이 한없이 가벼워졌다.
상쾌한 기분으로 올려다본 밤하늘엔 작은 초승달이 수줍은 미소로 은은하게 세상을 비추고 있다. 오후 내내 눈부신 햇살에 찡그려야 했던 거리는 이제 눈을 크게 떠야 할 만큼 어둠이 가득하다.
호텔에서 카오산 로드로 가는 길은 미로 같은 골목길의 연속이었다. 두 사람이 겨우 오고 갈 수 있을 만큼 좁은 골목을 걷다 보면, 이내 네 사람이 걸을 수 있을 만큼 큰길이 나타나고 그 길모퉁이 끝엔, 보다 넓은 통로가 펼쳐진다. 각각의 골목에는 수많은 상점과 노점상들이 줄지어 있다. 상점의 크기는 골목의 넓이에 비례했다. 좁은 골목길엔 주로 작은 발마사지샵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고, 길이 넓어질수록 레스토랑, 기념품 가게, 노점상, 커다란 가로수 나무가 그 빈 공간을 채운다. 전체적으로 걸어서 2분 남짓한 거리에 불과하지만 골목마다 다른 특색은 자꾸만 걸음걸이를 늦추게 했다.
나는 천천히 그 풍경을 둘러본다.
호텔 바로 옆에서부터 쭈욱 이어지는 수많은 발마사지샵들.
역시 마사지의 나라답다.
우선은 배가 고프니깐 저녁부터 먹고 생각해 봐야겠다. 'ㄱ'자로 꺾인 골목길을 지나자 팟타이 노점상이 나타났다. 시선은 자연스럽게 철판 위에서 춤추듯 만들어지고 있는 팟타이에, 탁. 탁. 철판과 닿을 때마다 마찰음을 내는 뒤집개와 집게를 든 채 바삐 움직이는 손을, 그리고 그 바쁜 손의 주인으로 옮겨갔다.
팟타이.
태국의 대표 음식.
소문만 들어왔던, 그러나 단 한 번도 실체를 마주한 적 없던 내 생애 첫 팟타이. 그런 팟타이와 처음 만나는 장소로 태국의 노점보다 더 어울리는 곳이 있을까.
코 끝을 간지럽히는 고소한 냄새를 따라 나는 플라스틱 의자에 몸을 맡겼다. 한국의 뒷골목이나 해수욕장에서나 볼 법한 낡고 파란 플라스틱 의자와 테이블. 낯선 태국에서의 익숙함이 묘한 안도감을 준다.
종업원이 영어로 적힌 메뉴판을 내민다.
기본(달걀과 야채), 치킨, 새우 팟타이 그리고 스피링 롤이 메뉴의 전부였다.
세상 어디에서든 처음 먹는 음식이라면 언제나 치킨이 실패할 확률이 가장 낮으니깐, 나는 가장 안전한 선택을 했다. 치킨 팟타이. 가격은 70밧.
"맥주랑 같이 먹으면 더 맛있어요"
메뉴판을 돌려받던 종업원은 맥주를 함께 추천했다.
평소라면 영업용 멘트라고 치부하고 그냥 흘려버렸을 테지만, 그 순간, 온종일 억눌러왔던 갈증이 갑자기 폭발하며 "메이드 인 타이 맥주가 있나요?" 하는 질문을 분출됐다.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에 종업원은 빠르게 반응했다. "창(Chang) 맥주가 메이드 인 타이 맥주입니다. 큰 걸로 드려요?" 나는 내 안의 갈증이 '네'라고 대답하기 전에 빠르게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요. 작은 걸로 주세요." 술을 위한 음식이 아니라 음식을 위한 술은 보조 역할을 해야 하니까. 작은 녀석으로 충분하다.
팟타이와 작은 맥주 한 병. 합쳐서 99밧. 선불이었다. 나는 100밧 지폐를 건넸다.
하지만 1밧은 돌아오지 않았다.
1밧. 이 작은 돈이 일으킨 혼란은 그 금액의 가치보다 훨씬 컸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1밧의 부재. 이럴 거면 차라리 딱 떨어지게 100밧을 받지, 왜 굳이 애매하게 1밧을 남겨둔 걸까. 팁이라고 생각하고 넘기기엔 묘하게 거슬리는 상황이고, 왜 안주냐고 따져 묻기엔 너무나도 하찮은 금액.
100밧을 주고 1밧의 거스름 돈을 돌려받을 때 손님이 기분 좋게 "거스름돈은 괜찮아요" 말하는 것과 상대가 아무 말 없이 슬그머니 생략해 버리는 것은 분명 다른 종류의 불쾌함이었다. 어쩌면 바빠서 그저 잊었을 수도 있겠다. 그렇게 혼란스러운 마음을 잠재울 무렵, 맥주와 팟타이가 테이블 위에 놓였다.
형형 색색의 다양한 야채들 사이로 보이는 하얀 닭고기, 정사각형의 작은 두부, 함께 볶아진 면. 약간 붉은. 위치에 따라 옅은 주황색으로 보이기도 하는 면의 색깔이 묘했다. 접시 옆에는 작은 라임 반쪽이 놓여 있었다. 뿌려먹으라고 준거겠지? 하지만 나는 일단은 뿌리지 않은 채 먹어봤다. 절반쯤 먹었을 때, 나는 라임을 조심스럽게 뿌렸다. 예상했던 새콤함이 입안 가득 퍼졌다. 마치 중국집에서 단무지를 그냥 먼저 먹어보고, 식초 뿌려서 다시 먹을 때의 차이와 비슷한 느낌이라고 할까. 그 새콤함은 더위에 지쳐있던 미각을 부드럽게 깨웠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기름에 코팅된 것 같은 면의 느끼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기대가 너무 컸던 걸까. 맛은 있지만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아쉬움이 남았다.
"안녕하세요. 팟타이씨. 말씀은 많이 들었는데, 오늘 직접 만난 당신은 이런 맛이었군요.
처음 만난 태국 음식이기에 오늘을 기준으로 당신을 단정 짓진 않겠어요.
아마 앞으로도 방콕에서, 치앙마이에서, 길거리에서, 레스토랑에서 다시 만날 기회는 많을 것이고, 그렇게 계속해서 경험하다 보면 어떤 중복되는 맛을 발견할 수 있겠죠. 어딜 가도 공통적으로 입안에 남는. 그 특유의 묘한 여운. 바로 그 맛이 팟타이 당신이라고 기억할게요."
팟타이와 맥주를 모두 비우고 '코쿤캅' 인사를 건넨 후 다시 길을 걷는다.
지금부터는 비교적 큰 규모의 레스토랑들이 눈앞에 보인다. 가게마다 흘러나오는 잔잔하면서 서정적인 포크 음악이 거리를 가득 채운다. 레스토랑의 건너편은 잎이 풍성한 커다란 나무들이 서있다. 커다란 나무의 긴 가지들은 마치 음악에 반응하듯 흔들흔들 천천히 움직인다. 그 부드러운 움직임과 레스토랑 음악의 리듬이 조화롭다.
레스토랑의 앞마당엔 테이블과 의자들이 배치되어 있고, 각각의 테이블마다 작은 스탠드 조명이 빛나고 있다. 아직 빈자리지만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감성'이 이미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만 같다. 녀석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큐피드의 하트를 풀어서 분홍색 실로 만든다. 그리고 의자에 앉는 남녀의 손목에 그 실을 묶을 것이다. 오늘 처음 만난 사이라면 두 사람은 썸 타는 냄새를 풍기며 그 자리를 뜰 것이고, 이미 썸 타고 있는 관계라면 '오늘부터 1일'이 될 것이다. 자신들의 손목에 '감성'이 몰래 묶어 놓은 분홍색 실이 연결되어 있을 거라는 건 상상도 못 하겠지.
마치 자신을 꿰뚫어 보는 듯한 내 시선에 화들짝 놀란 '감성'은 못 본 척해달라고 입술 위에 손가락을 급하게 가져댄다. 나는 미소로 대답하며 어느새 람부뜨리 거리의 끝에 서있다.
자동차와 오토바이가 쉴 새 없이 오가는 도로의 횡단보도 앞.
이 도로를 건너면 어렸을 때부터 동경했던 그 카오산 로드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나는 빨리 건너서 그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과 이 설렘을 조금이라도 더 즐기고 싶은 마음사이를 오고 가며 자동차들이 멈추기를 기다린다. 신호가 바뀌자마자 나는 망설임 없이 발을 내디뎠다. 순간, 귀를 찢을 듯한 음악 소리, 화려한 조명, 그리고 거리를 가득 채운 여행자들의 활기찬 기운이 낯설면서도 강렬하게 나를 덮였다. 드디어 내가 동경했던 그 카오산 로드 속에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