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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맛공방 Jul 14. 2021

나의 두 스승 이야기

“수필은 수수한 놈이 쓰고, 소설은 소소한 놈이 쓰고, 시는 시시한 놈이 쓴다.” 말장난 같은 이 말은 안장현 선생님의 일명 ‘글쟁이론’이다. 살아계셨다면 지금 94세, 한글문학회 회장이자 시인이셨다. 30년 전 대학에서 스승과 제자로 만나 나를 글쟁이 대열에 끼워 주시고는 ‘니나 내나 시시한 놈’이라며 우스갯소리를 하시곤 했다. 부탁도 하지 않은 내 결혼식의 주례를 혼자 결심하시고, ‘내, 니 결혼식 주례는 반드시 서고 죽을란다’ 하시며 당신의 버킷리스트에 포함시켰다. 내가 졸업을 하고 난 뒤로는 그 말씀을 더 자주 하셨다. 또 매번 덧붙이는 말씀이‘글쟁이는 절대 만나지 마라’였다. 


서른이 넘어서야 나는 ‘글’ 언저리엔 얼씬도 않게 생긴 동갑내기 남자를 만나 결혼 얘기가 오갔다. 난 내 결혼식 주례를 서겠다고 오래전부터 계획하고 계신 선생님 얘기를 했다. 당시 예비 남편도 예비 시부모님도 흔쾌히 허락했다. 그러나 선생님은 주례를 서지 못하셨다. 젊을 때부터 암을 비롯한 온갖 질병들이 닥쳐와도 오뚝이처럼 일어나곤 했다며 병력을 무용담처럼 말씀하시던 선생님이었다. 한데 뇌경색으로 두 번이나 쓰러진 그때는 더는 못 일어나셨다. 주례는 물론이고 하객으로도 오시지 못하고 ‘축전’으로 마음을 전해 오셨다. 2000년 5월의 일이다.


선생님과의 첫 만남이 어렴풋이 생각난다. 전공 선택 과목인 <문장의 이해와 작법> 수업이 끝난 어느 날, 연구실로 선생님을 찾아갔다. 나는 쭈뼛거리며 시를 배우고 싶다고 말했고, 선생님은 나를 지켜보기로 작정하신 듯했다. 한데 첫마디가 ‘시 쓴 것 있으면 가 와 봐라’였다. 난 뭐든 가르쳐 주시면 열심히 배우겠다는 마음으로 찾아갔던 것인데 선생님의 태도는 반대였다. 가르쳐 주지도 않고, 오로지 ‘시를 써라’, ‘가 와라’, ‘또 써라’, ‘다시 써라’, ‘열심히 써라’로 일관하셨다. 경남 김해가 고향인 선생님의 말투는 무뚝뚝하고 간결했다. 내가 좀 게을러질라치면 바로 호통이 떨어졌다. ‘니 요즘 시 안 쓰나?’, ‘부지런히 써라’, ‘내는 니를 등단시키 놓고 눈감을 끼다’ 하며 다그치셨다. 그러고 보니 결혼식 주례 외에도 선생님의 버킷리스트엔 나와 관련된 것들이 여럿 있었다. 나를 등단시키고 취직시키는 것도 당신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셨다. 그때는 그런 선생님이 부담스러워서 가끔 피해 다니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나를 참 많이 아끼고 챙겨주신 선생님이었다. 


2003년 5월 3일, 안장현 선생님의 부음을 들었다. 그때 나는 막 돌이 지난 첫아이를 데리고 남편, 친정부모님, 시부모님과 함께 공항으로 가고 있었다. 양가 부모님을 모시고 2박 3일 일정으로 제주도 여행을 가는 길이었다.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날짜 지난 신문의 부고란을 봤다. ‘안장현(한글문학회 회장) 2003년 5월 2일 0시 별세, 5월 4일 새벽 발인.’ 결혼 후 한번 찾아뵙지도 못했는데, 마지막 가시는 길마저 함께 해드리지 못했다. 안타깝고 죄송한 마음에 애꿎은 술잔만 비웠던 기억이 난다. 


그해 여름, 나는 한글문학회 회원 한 분과 사모님을 뵈러 갔다. 사모님은 항상 남편을 ‘안 선생님’이라 지칭하셨고, 제자인 나에게도 깍듯이 존대하셨다. 모든 말씀의 말미에 ‘안 그렇습니까, 00씨?’를 붙이며 호응을 유도하던 사모님 특유의 말투가 귀에 선하다. ‘혈육 하나 없는데 안 선생님마저 가시고 나니 내 자신이 마치 끈 떨어진 연과 같다’며 신세한탄하시는 사모님을 어쭙잖게 위로해 드리고 나왔다. 돌아오는 길, 볕이 유난히 뜨거웠고 시간은 참 더디 갔다. 


그 후, 내 삶도 숨 가쁘게 돌아갔다. 나는 글쟁이들을 만나지도 않았고 글쟁이로 살지도 않았다. 그러니 글쟁이란 말을 입에 올릴 일도 없었고, 그 말을 들을 일도 없었다. ‘글쟁이’란 말은 그렇게 내게서 점점 멀어졌고 잊혀졌다. 세월이 흘러 내 아이 둘 모두가 청소년이 되었다. 그제야 나를 돌아볼 마음이 생겼다. 글쓰기 강좌에 수강 신청을 했다. 첫 수업이었다. 강사님이 말씀 중에 ‘글쟁이는……’이라고 하신다. 순간 내 머릿속은 그대로 멈췄다. 내겐 너무 친숙한 말인데 오래 잊고 있어서인지 되려 낯설게 들리던 그 말, ‘글쟁이’ 때문에. 


소설로 치면 복선이라 해야 할까. 글쓰기 강좌에서 만난 그 강사님은 나의 두 번째 글쟁이 선생님이 되었다. 안장현 선생님의 ‘글쟁이론’ 대로라면 수수하지도 소소하지도 시시하지도 않은 인문작가이자 문화평론가 박민영 선생님이다. 내 기억에 선생님은 매우 꼼꼼하고 성실하셨다. 항상 제일 먼저 강의실에 와 계셨고 강의 시간을 엄수하였다. 매 시간 유익한 내용의 읽을거리를 챙겨 주시고, 사회의 면면을 꿰뚫어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고 그 안에서 글감을 찾게 했다. 글 쓰는 방법뿐 아니라 책을 깊게 읽는 방법도 구체적으로 알려 주시며 수강생들이 글을 잘 쓸 수 있게 지도해 주셨다. 첨삭 지도할 때도 틈틈이 격려의 말로 수강생들을 배려하시던 기억이 난다.


그 뒤 바로 박민영 선생님과 연이 닿지는 않았다. 처음 배운 서평쓰기는 비교적 어려웠다. 쉽고 재미있게 글을 써보고 싶었다. 마침 박민영 선생님의 아포리즘 에세이쓰기 강좌가 개설되어 수강 신청을 했다. 그런데 이런저런 이유로 개강이 연기되더니 결국 개강을 못하게 됐다는 연락이 왔다. 그 대신 시쓰기 강좌에 등록을 했다. 한데 나는 그 수업을 다 듣지 못했다. 기존 수강생이 대부분인 수업 분위기에 적응하기 힘들었다. 수강생들의 습작 시도, 수업에서 다루는 기성 시인들의 시도 너무 난해했다. 괴리감과 스트레스뿐이었다. 반은 강의실에서 반은 술집에서 이뤄지는 수업 방식도 내가 중도하차하는 데 한몫했다. 2년 전 얘기다.


지난 봄, 대학생 딸이 필수 교양 과제로 글 쓰는 걸 보다가 박민영 선생님 생각이 났다. 아이에게 권해줄 요량으로 선생님께 메일을 보내 배울 수 있는 강좌가 무엇이 있는지 여쭸다. 온라인으로 하는 에세이쓰기 프로그램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아이보다 내가 먼저 신청해버렸다. 온라인이긴 하지만 2년 만에 다시 만난 선생님은 이번에도 역시나 최선을 다해 이끌어주셨고, 나는 한 편의 글을 완성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나의 두 선생님은 연령에서 한 세대 차이가 나는 만큼 교육 방법도 달랐다. 안장현 선생님은 언급했듯이 무조건 ‘쓰고, 쓰고, 또 써라’ 하시며 엄격하게 시쓰기 훈련을 시켰다. 스파르타 교육이었다. 박민영 선생님은 갖가지 자료와 질문을 주고 끊임없이 생각하게 만든다. 스스로 생각하고 질문하고 대답하는 과정에서 해답을 찾고 글을 쓰게 한다. 질문과 대화를 통해 문제해결력과 창의성을 길러주는 하브루타 교육을 한 것이다.


만약 박민영 선생님 수업보다 시쓰기 수업을 먼저 들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나는 영영 글을 다시 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박민영 선생님 덕분이다. 글쟁이에 얽힌 추억이 떠오른 것도. 지금 이렇게, 가신지 20년이 되어가는 안장현 선생님을 추억하며 글을 쓰고 있는 것도.           



글쓴이

새날.

매일매일을 새날이라 여기며 삽니다.

이 글은 글맛공방의 'only첨삭반'을 수강하신 분이 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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