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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맛공방 Feb 26. 2022

심의민주주의는 가능한가?

현대 정치인들은 TV쇼에 자주 등장한다. 2월 20일 이재명 대선후보가 유세 도중 수원의 한 공원에서 태권도복을 입은 채로 송판격파를 했다. 송판에 ‘코로나 위기’라는 글씨를 적고 그를 부수겠다며 퍼포먼스를 했던 것이다. 이처럼 정치인들은 이슈가 된다면 그게 무엇이든 마다않는다. 그들의 주목받고 싶은 열망에 혀를 내두를 때도 있다. ‘유명인’ 정도에 해당하는 셀럽(celebrity)과 정치인이 쉽게 구분되지 않는 것이다. 


물론 국민을 대표하는 정치인들은 세간의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다. 선거기간에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미디어에 자주 노출되는 사람이 ‘좋은 정치인’일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정치인들이 유명인이 되려는 목적은 유권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어서일 것이다. 정치인의 본분은 시민을 대표하여 시민의 권리를 보호하고 나아가 그 권리를 증대하는 것이다. 그런 것을 생각할 때 유명인이 되는 것과 정치인으로서 열심히 일하는 게 무슨 연관성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  


시민에게도 같은 질문을 해야 한다. 정치인들과 인증 샷을 찍고 이를 SNS에 업로드 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정치인들의 공약 실천과 입법에 대해 아는 이는 별로 없다. 우리가 정치에 냉소하고 정치인들을 비난하기에 앞서 해야 할 일이 있다. 이에 대한 저자의 문제의식은 이렇다.


시민이 정치인의 하는 일을 일정 부분 분담할 수는 없을까? 평범한 시민들이 정치에 ‘참여’하여 더 나은 삶을 만들어 보면 어떨까? 아니, 그것이 가능한가? 엘리트에게 더 큰 권한을 부여하는 방식이 이제까지의 민주주의였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엘리트와 전문가로 대변되는 집단의 부패로 귀결되기 일쑤다.


저자는 제도를 바꾸어서 진짜 민주주의를 만들어보자고 한다. 무늬만 민주주의가 아닌 대의제의 단점을 보완한 토의민주주의 말이다. 물론 시민이 직접 내 삶과 관계된 정치적 결정에 참여하려면 일정 부분 번거로움을 감수해야 한다. 


이제껏 시민의 적극적인 정치 참여는 왜 논의되지 못하였는가? 그것은 선거를 민주주의와 동의어로 오인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민주주의가 ‘다수결’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투표 말고 무엇을 더 해야 할지 막막해지는 것이다. 


이 책에서 ‘다수결은 다른 민주주의 요건들이 갖추어졌을 때에 제 역할을 다할 수 있는 장치일 뿐, 민주주의 자체가 아니’라고 강조한다. 그렇다면 왜 이제껏 다수결이 민주주의와 동일시되어 왔는가? 의사결정에 드는 사회적 비용을 줄일 수 있는 효율적인 장치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다양한 의견을 반영할 수 있어야 한다. 다양한 의견들을 적극 반영한다는 것은 우세하던 의견이 토론을 통해 번복될 여지가 있음을 뜻한다.   


우리가 굳게 민주주의라고 믿고 있는 다수결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다수결은 선호만으로 판단할 수 없는 미묘한 문제들을 가린다. 다수결은 의제가 양적인 문제로 가려낼 수 있는 사안일 때 옳은 방식이다. 또한 도덕적으로 정당한 의제가 설정되었음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정치에서 논의 주제가 되는 것 가운데 이러한 조건을 두루 만족시키는 경우는 드물다.


저자에 따르면 정책을 선호한다는 것은 그 정책을 어떤 의복처럼 음식처럼 욕구한다는 뜻이 아니며 ‘정책을 지지한다’는 의미다. 여기서 구성원들의 정책에 대한 선호를 불러온 이유의 타당성을 검토해보아야 할 필요가 생길 수 있다. 이처럼 모든 문제를 다수결로 환원하는 것은 안일한 민주주의다. 


선거는 당선자가 국민이 아니라 본인을 위해서 일하게 될 소지를 준다. 정치인들은 광범위한 문제들에 대해 권한을 ‘위임’받고 있다. 한 해에 처리되는 법안의 수는 수백 건이 넘고, 예산이 집행되는 사안은 엄청나게 광범위하다. 정책이 공약과 정반대로 바뀌는 ‘정책 전환’이 일어나도 그에 대한 면밀한 파악이 불가능하며 이를 통제하는 시스템 역시 부재하다.  


현재의 정치는 여론 정치다. 대표자들은 국민에게 ‘무언가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어’ 여론을 형성한다. 때때로 여론조사는 여론을 조작한다. 여론조사 질문방식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결과가 크게 달라질 수 있다는 점만 봐도 이는 입증가능하다. 


이 책에는 “대의제의 미덕은 선거와 투표가 아니라 토론에 있다”는 주장이 나온다. 토론은 단지 목소리만 크고 논리가 부족한 사람의 의견을 배제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토론문화가 부족한 사회에서는 다양한 사람들의 의견이 존중받지 못한다. 도리어 의견이 같은 사람들끼리 확신을 강화하는 상호작용이 활발해진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람들은 맹목적으로 따르기만 하면 되는 권위주의 정치에 물든다. 자신들의 목소리가 정치에 반영된 경험이 전무하고 권위에 따르는 것은 익숙한 탓이다.  


정치학자 아콘 펑과 사회학자 에릭 올린 라이트의 <민주주의 심화하기>에 소개된 심의민주주의 실험 모델들이 있다. 지역의 골칫거리였던 치안 문제를 개선한 ‘시카고 지역통치위원회’와 시민에게 지역 현실에 맞는 구체적인 프로그램을 설계하고 모니터하는 권한을 준 미국의 ‘거주 동물 보호 계획’이 그것이다. 이를 통해 투표보다 토론 중심의 의사결정이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점을 확인했다.


이 책에서는 ‘심의민주주의’가 단순히 호불호를 집계하는 민주주의와 구분되는 개념이라고 하였다. ‘선호 집계 민주주의’에서는 이미 주어진 관념 때문에 정치가 계속 퇴행할 수밖에 없다는 절망감에 빠지게 할 가능성이 크다. 이는 투표에서 반대표를 던진 사람들에게 반발심을 불러온다. 그러나 심의민주주의는 결정에 반대했던 사람까지 그 과정의 정당성을 인정하도록 이끈다.  


모든 형태의 전제정치를 경멸했던 정치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은 “시민을 대표하는 기구가 최종 결정권을 보유하고 실제로 권력을 행사하는 가운데, 지적 전문성을 갖춘 유능한 사람들이 업무를 맡아 처리함으로써 최대한 효율을 얻게 하는 것(<대의정부론>,1861년)”을 이상으로 삼았다. 이것이 바로 숙련된 민주주의다. 이처럼 우리는 ‘시민을 대표하는 기구’의 구성원이 되어야 하며 그에 따른 ‘결정권’도 쟁취해야만 한다.  


국민의 의사가 개진되는 사회를 만들고 싶은가. 그렇다면 ‘정치 무력감’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없어져야 할 것은 정치인 개인이 아니라 그들을 견제하지 않은 채 흩어져있는 시민들의 모습이다. 저자 말대로 ‘몇 년에 한번 돌아오는 선거 때를 제외하고 시민의 정치적 의사가 반영될 아무런 공식적인 통로가 없는’ 현실을 바꾸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토론을 통해 숙고한 의견을 조직하고 그를 개진할 통로를 만들 수 있다는 저자의 주장은 낯설기만 하다. 그러나 일상적 정치는 시민의 이상이 될 수 있다. 나는 새로운 사회로의 초대장과도 다름없는 <철인왕은 없다>를 읽고 시민이 주인이 되는 정치를 꿈꾸어보게 되었다.


이 책은 시민의 힘을 긍정하며 마무리 된다. 조작에 취약한 여론 정치를 끝내고 심의를 통해 ‘공통의 이익’을 찾으려는 노력을 지속할 때, 빼앗긴 시민의 권리를 되찾을 수 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변화할 수 있는 존재’이다. 



글쓴이. 

박장대소님.

이리 저리 기웃대며 재미있는 일이 없나 살펴보느라 하루가 짧은 사람. 


* 이 글은 글맛공방 '서평쓰기'를 신청하신 분이 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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