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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맛공방 Mar 03. 2022

투쟁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신분제적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영미권 작품이나 대하사극을 자주 보는 사람이라면 귀족가문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권다툼에 익숙할 것이다. 가문들은 서로에게 중상모략 하고 세력다툼을 벌인다. 가문권력은 경쟁을 통해 몰락하고 성장하면서 계승성과 전속성을 갖는데 이런 권력들은 서로를 견제함으로써 힘의 균형을 이루기도 한다. 보존되려는 권력의 성질은 특정 세력만이 어느 이상으로 몸집을 키우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다른 권력의 힘을 억제하는 것이 결국 자신의 권력을 보호하기 위해 해야 하는 행동이기도 한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도 국가권력이 분립되어 존재한다. 견제와 균형이 권력이 집중되고 남용되는 것을 방지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권력남용, 부패정치, 정경유착은 일상에서 흔하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정치권을 향한 거부 의사를 보이고 선거 참여율은 갈수록 낮아지고 있다. 사회의 불만을 방치하는 시간이 깊어져만 간다. 무의미한 시간을 넘어서 나아갈 새로운 방향이 절실하다.


공동체에서 구성원들이 경험하는 사회적 사건에는 보이지 않도록 가려지는 본질과 인과도 존재하기 마련이다. 설령 권력이 분립된 질서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 하더라도 보이지 않는 본질을 보려는 노력은 계속되어야 한다. 질서 안에서도 권력은 태어나고 때로는 사라지면서도 여전히 유지되고 전속되고 싶어 한다. 부패한 정치에 대한 사람들의 피로를 끝내기 위해서는 우선 문제가 정확히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문제의식은 무언가 잘못된 듯한 의문에서 시작한다. 사람들은 질문에 명확한 답을 내릴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이들의 생각을 탐구한다. 그러면서 질문에 대한 다양한 발언들을 접한다. 발언은 발언을 낳고, 반론은 반론을 낳는다. 이를 통해 질문자는 사고를 수정하고 보충해간다. 그 결과로 얻은 대답이 종종 문제를 해결할 방안이다. 문제의식이 문제해결의 시작점이다. 무엇이 문제인지 인식해야 문제해결을 향한 첫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다.


직업화된 정치는 시민사회와 동떨어졌고 그 때문에 시민들은 무기력하다. 그러나 위기는 기회의 순간이기도 하다. 시민사회의 무기력을 극복하기 위해 사람들은 지금의 낡은 민주주의를 대체할 실험적인 시도들을 하기 시작했다. 「시민 쿠데타」 두 저자 엘리사 레위스와 로맹 슬리틴는 우리 시대의 민주주의 시스템은 문제가 곳곳에서 발견되면서 근본적인 위기에 빠졌다고 말한다. 정치권에 대한 시민들의 반감과 피로는 현재의 민주주의 시스템에 연유한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돌이켜보면 20세기 초 전체주의의 출현으로 민주주의는 심각한 위기를 맞았다. 당시 자본주의는 기술의 발전으로 대량 생산을 이루어 내면서 성숙기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실업과 저임금을 경험하면서 점점 한계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렇게 불안정한 시기 선동적인 발언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노동자 해방과 평등을 주창하며 혁명가들은 권력을 잡아갔고 곧이어 일당 독재체제로 돌아섰다. 비극의 역사에서 사람들은 선전, 선동에 능통한 권력자들을 보았고 전쟁은 수천만명의 생명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그로부터 사람들은 전쟁마저 누군가의 이권을 위해 이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경험했다.


그리고 현재 민주주의는 다시 선전, 선동, 불신, 무관심에 크게 흔들리고 있다. 대의제 내에서 시민들은 정치를 정치가에게 맡기라는 구호 앞에서 다시 돌아올 선거만을 기다린다. 그러는 동안 전문가들은 제도권 안에서 자기들끼리 토론하고 결정한다. 이러한 상황은 시민들을 수동성에 묶어 놓고, 권력자들은 평범한 사람들의 정치적 발언들을 비웃고 모독한다. 간혹 정치적 의견을 말하는 사람에게 네가 뭘 안다고 떠드느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발언 내용은 뒷전이고 발언 자체를 트집자는 듯이 보인다. 이를테면 어린 나이나 발언자가 정치적 전문가나 전공자가 아니라는 이유를 든다. 그러나 정치인의 말도 불명확하고 모호하게 들릴 때가 많다. 그럼에도 흔히들 ‘정치는 전문영역이니 그들의 말에는 깊이 있는 뭔가가 있겠지’하며 넘어가는 듯하다. 시민은 투표하고 정치는 정치인이 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보니 문제의식은 자라나지 못하고 행동하고 발언하는 가치는 점차 사라져간다. 그러면서 민주주의가 저절로 우리가 선택한 대표에 의해 올바른 방향으로 작동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이러한 수동성은 관료의 지배를 낳을 뿐이다. 시민이 수동적이고 순응할수록 기득권이 권력과 제도를 재창출하고 재구성하기 용이하다.


평범한 사람들이 법과 제도에 대해 문제의식을 제기하면 비웃고 조롱하는 분위기가 만연하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토론하고 발언하는 데 있어서 위축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며 언제까지나 정치인의 선의를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다. <시민 쿠데타>는 새로운 민주주의의 형태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활기를 부여할 수 있는 책이다. 대의 민주주의 체제 초기 설계자들은 시민에 의한 직접 통치는 시민계급의 계몽적 한계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별다른 저항 없이 이어져온 대의제는 국정을 소수 엘리트들에게 맡기는 것이 낫다는 것을 전제로 선택된 차선의 민주주의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사실 사회 구성원들은 생업 활동에 대부분의 시간을 사용한다. 그런 점에서 보면 정치에 시간과 정신을 쏟을 대표자는 필수인 듯하다. 그러나 이 책은 이전까지는 공간적, 시간적 한계 때문에 기존 시스템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면 이제는 여건이 다르다고 말한다. 이제는 기술의 발전이 그러한 제약을 넘어서는 걸 가능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스마트폰을 사용하여 실시간으로 인터넷에서 정보를 얻는다. 과거와 비교하면 교육 수준과 정보 접근성은 천지 차이다. 그렇다면 시민계급이 계몽되지 않았다는 명분으로 채택된 대의 체제가 지금에 와서는 명분을 잃었다고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어플리케이션, 블록 체인, 오픈 소스 기술들로 평등한 정보 접근과 예산 투명성 구현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물론 다수가 참여하고 결정하는 정치를 불신하는 목소리도 많다. 시민들의 정기적인 토의와 참여가 필수적이지만 대다수는 선거와 투표에 익숙하다는 것도 사실이다. 서로 다른 배경과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복잡하게 얽히는 정치를 상상하면 확실히 어지럽다. 그에 비해 대표에 의한 결정 과정은 비교적 순탄하게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 과정이 어떠하든 최선의 결과를 보장받을 수는 없지 않은가. 적법한 절차에서 선출된 대표라 할지라도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구원자가 될 수는 없다. 대의제를 대체할 새로운 정치라 할지라도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기적의 치료제가 될 수는 없다. 인간에게는 언제나 불완전 존재라는 전제가 따른다. 그렇기에 본연의 불완전을 인지하고 도달하고자 하는 지점에 직접 다가가는 여정이 최선이라 말하고 싶다. 기술이 더욱 발전하고 역사의 시간이 쌓여서 인간이 완벽한 선택만을 하는 순간이 올까? 서로 다른 생각 때문에 투쟁하고 괴로워하는 인간사가 언젠가 끝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민주주의란 자기 땅의 주인이 된다는 것이고 세계는 끊임없이 다양성을 향해 가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결국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끊임없이 배워 가야 하며 여러 다른 생각들이 뒤얽히는 장에서 스스로가 투쟁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글쓴이.

검은호랑이님.

삶은 가능성으로 가득하다.


* 이 글은 '서평쓰기'를 수강한 분이 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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