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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맛공방 Aug 03. 2022

생존을 위한 변화인가

정부나 기업의 신년 인사에 빠지지 않는 내용이 있습니다. “올 한해도 다양한 사회적, 경제적 변화가 나타날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는 이 변화에 대응해야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같은 내용이지요. 그리고 시민들은 불안해하며 낙오되지 않을 방법을 찾아 나섭니다. 이때 가장 먼저 반응하는 곳은 출판계인 듯합니다. 내년의 전망이나 필승 투자법 등을 제시하는 자료를 내놓으며, 마치 모든 트렌드를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이 광고하지요.


이런 위기론과 변화는 신자유주의와 맞닿아 있습니다. 시장의 주도에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신자유주의 시대에는 재화 획득을 위해 작은 변화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며 투입 대비 산출을 최대화하고자 합니다. 맹목적 변화만이 낙오되지 않는 법칙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변화를 거부하거나, 변화에 참여하지 못한 이들은 어떻게 될까요? 대세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은 ‘난 조직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구나’ 하고 자책하고, 조직은 이들을  퇴출시킵니다. 하지만 정말 조직에 쓸모없는 존재였을까요? 더불어 기득권이 주장하는 변화가 정말 필요한지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토록 변화를 추구하는 신자유주의는 3차 산업혁명과 시기를 같이 합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알 수 없지만 서로 엮인 것이 사실이지요. 3차 산업혁명은 정보화의 혁명이었으며, 이는 다양한 정보기기, 이를테면 메모리, 컴퓨터, 통신장치 등에 엄청난 발전을 가져왔습니다. 그 속도 또한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세상이 변해있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런데 이 속도가 문제입니다. 새로 개발한 기술이 시장에 적용되고 사람들이 적응하기도 전에 새로운 기술이 발표되기 일쑤였습니다. 나아가 “우리가 변화를 이끌자”라는 슬로건으로 발전하는 것이 시대적 흐름이었지요.      


개인의 자율을 보장하며, 발전을 추구할 것처럼 외친 신자유주의의 배후에는 국가권력과 자본가가 있었습니다. 국가적 측면에서는 냉전을 대비하기 위한 재화마련과 지속적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우위성 확보가 우선이었습니다. 이에 자본가는 국가로부터 권력을 사들여 자본권력이 됩니다. 그리고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 등 다양한 분야를 지배합니다. 이 과정에서 자본권력이 사회구성원을 길들이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이 ‘위기론’입니다. “지금 당장 위기가 찾아왔으니 적은 보수로도 열심히 일해야 한다.”부터, “변화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는 주장을 하며 위기극복의 당위성을 전하지요.     


그리고 시장과 기술의 발전이 포화상태에 이르자, 자본권력은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냅니다.  ‘제3의 물결’에서 ‘제4차 산업혁명’으로 지향점을 바꾼 것이지요. 개인화의 시대, 어디를 가던 접속되어있는 초연결의 시대가 올 것이며 이를 준비하지 않으면 앞으로의 생존이 불가능해질 것을 예측한 내용입니다.     


우리는 빅데이터를 이용해 인공지능을 학습시킴으로써 미래를 예측하고 새로운 결과를 만들어내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경험을 경쟁력으로 삼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문제 상황을 온몸으로 이겨내고 해결책을 찾는 과정에서 실패와 성공의 경험을 축적해온 사람들이야말로 진정한 위기관리 시스템의 핵심이 아닐까요? 그럼에도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살아있는 아카이브, 문제해결 시스템을 내치는 것에 대해 의구심이 듭니다.     


과거에 얽매인 이들로 치부되는 사람들의 능력은 변화를 거부한 시간만큼 경험이 축적되어 있습니다. 새로운 변화에 맞서 과거의 기술로 버텨보려 한 방법론들이 존재하는 것이지요. 이른바 경험의 크기 차이가 존재합니다. 노련함, 익숙함, 이런 단어들이 실제로 문제해결에 큰 도움이 됩니다. 변화에 익숙해질수록 과거에 소홀해질 수밖에 없으며, 소홀한만큼 잊는 법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과거경험이 많은 이들의 중요함을 강조할 수 있는 것이지요.  


자율주행 자동차가 일반화되면 실제로 운전하는 방법을 몰라도 인공지능이 모두 알아서 해주니 버튼 하나면 다 가능해 집니다. 그러면 운전하는 방법을 잊어도 되는 것일까요? 자동 번역 프로그램이 있으니 외국어를 익히지 않아도 될까요? 원하는 언어로 세팅하고 번역버튼만 누르면 그럴듯한 외국어로 변환해주니 외국어 학습이 무의미해 지는 것 같습니다. 결국 새 기술만 익히면 과거의 것은 가치를 잃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자율주행 중 사고나 고장이 발생하면 어떻게 될까요? 아무래도 수동운전을 경험한 운전자들은 직접 자동차를 조작할 수 있으니 빠른 대처가 가능합니다. 번역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외국어를 직접 학습하고 사용해본 이들은 번역프로그램의 오류와 번역체를 인지하고 수정할 수 있습니다. 결국 새로운 기술도 기초적 경험과 기술이 필수적인 것이지요.  


리처드 세넷은 『신자유주의와 인간성의 파괴』에서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과거 사람들이 가졌던 경험적 가치를 평가합니다. “우리가 살고 경험해온 세월이 무의미하게 보일지 모른다. 우리의 경험이 부끄러운 인용 수단으로밖에 안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도박하듯 순간적인 결정을 내리는 것보다는 실제로 냉혹한 경험의 세월을 통과하고 나서야 비로소 모험이 닥쳐올 때 확실한 자신감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라고 전하며 신자유주의의 부작용을 경제적 관점이 아닌 인간성의 측면에서 바라보고 있습니다.      


저자는 단지 경제적 지표를 제시하기보다는 ‘노동자가 갖는 노동의 가치가 시간적 변화에 따라 달라지는가?’라는 질문을 던짐으로써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주제를 환기합니다. 변화에 재빨리 적응하고 일을 잘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삶과 노동 속에서 가졌던 가치를 발견하고 보존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일례로 일본의 경우, 신입사원들에게 워드 프로세서나 계산용 프로그램 활용법을 가르치는 필수 과정이 되었을 정도입니다. 휴대폰 하나만으로 모든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시대에 태어나 살아온 세대들에게 업무용 소프트웨어는 어려운 것이지요. 그 이전의 베이비 붐 세대는 타자기를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주산, 부기 같은 기술을 가르치는 학원도 존재했지요. 자, 이들을 같은 출발선상에 두겠습니다. AI에 맡긴 세대와 손에 펜을 쥐고 종이에 계산한 세대. 누가 더 빨리 익숙해질 수 있을까요?      


요즘은 과거 경험을 얘기하면 ‘꼰대 같다’라는 소리를 듣기 십상입니다. 하지만 과거 세대들이 어떤 마음으로 문제를 대했고, 해결했는지 배울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변화도 좋습니다. 사회는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게 맞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이 같은 변화도 과거의 경험에 힘입어 방향성을 갖는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글쓴이. 빵식이

세상이 힘들어서 세상을 공부하고 싶은 사람.     


* 이 글은 '서평쓰기' 프로그램에 참여하신 분이 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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