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EATFLIX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존레순 Feb 15. 2022

EATFLIX2022 / ch.01 : [하이틴]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첫사랑.. 이었겠지..?

크라이 크라이

90년대생 오 대리의 EATFLIX


인스타그램을 켰다. 처음으로 뜬 피드에 별안간 박재범이 소주를 런칭했다는 소식이 보였다. 그 짧은 몇줄의 소식에 마음 속 어떤 덩어리가 찌르르-하고 미세한 진동을 일으켰다. 내가 가지고 있는 향수 중에서 가장 진하고 지속력도 강해서 10년이 넘게도 지났지만 여전히 은은하게 내음이 남아있는, 하이틴 시절의 향수를 불러일으킨 것이다.

여고생이었던 나는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2pm의 열성팬이었다. 현생보다 더 진심인 덕질, 그것은 고등학교 그 시절부터 길러온 떡잎이었다. 점심시간마다 급식판을 두드리며 교실 TV로 수없이도 봤던 오빠들의 아크로바틱, 야자시간마다 몰래 PMP에 넣어서 인터넷 강의보다 더 반복시청하여 모든 대사를 다 외울 지경이었던 <떳다 그녀>와 여전히 마지막회가 공개되지 않은 비운의 예능 <와일드 바니>까지.. 나의 하이틴은 그것으로 요약되었다.

사랑으로 눈물을 흘려본 적이 있냐고? 고등학교 동창들은 여전히 나를 놀리는 일이지만, 나는 그 시절에 처음으로 사랑 때문에 울어봤다. 어느날 학교를 갔는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렸다. 박재범이 2pm 탈퇴를 공식 발표하고, 시애틀로 돌아간다는 것이었다. 그때는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이라, 실시간으로 소식을 알 수조차 없어 당장이라도 공항으로 뛰어가고 싶었지만 유교걸로서 그런 과감한 짓은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나는 착잡한 마음 반, 답답한 마음 반으로 이별의 운명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며 책상에 엎드려 몰래 울었다. 그것이 친구들에게 들키는 바람에 나는 아직까지도 “크라이 크라이(빅뱅 <하루하루> 노래 가사 중, “아이 크라이 크라이”에서 유래되었다.)”라는 별명을 갖게 됐다.

그리고 얼마 후, 박재범이 다시 돌아왔고 우리(?)는 그렇게 재회를 했다. 가장 잘 어울리던 흰 티셔츠를 입은 채 시애틀 타이어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모습이 포착되고, 얼마 안 있어 같은 차림으로 <Nothin’ On You>라는 노래를 부르는 영상이 공개됐다.


그때 나는 한번 더 크게 ‘크라이 크라이’했다. 영화 <클래식>에서 조승우와 손예진이 재회를 하는 장면에서 손예진이 감정을 꾹 참아내며 소리 없이 펑펑 울었을 때처럼. 박재범이 극 중의 조승우처럼 앞을 볼 수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어쨌든 모니터 속의 그는 우는 나를 볼 수 없기에, 하지만 그에게 우는 것을 들키기라도 할까 봐 나는 마치 손예진이 된 것마냥 벅차오르는 감정을 꾹꾹 누르며 아주 많이 울었다.


https://youtu.be/3GPSpqn_NRI


당시 나는 그 사랑을 위해서 엄마 몰래 학원을 빼먹고 청담동 JYP 사옥에 포스트잇을 붙이는 시위에 참가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먹었던 청담동 JYP 사옥 옆 “청담찌개”의 꽁치김치찌개가 생각나는 밤이다.

K-여고생의 “클래식”한 첫사랑, 나에게 하이틴이란 그런 것이다. 



하이틴을 책으로 배웠습니다

80년대생 이책임의 EATFLIX


여름 오후, 단정하게 교복을 입은(날 듯 말 듯 섬유유연제 향이 난다) 남학생과 여학생이 길을 걷는다. 남학생의 목에는 커다라 헤드폰, 등에는 기타가 들려져 있고, 여학생의 오른팔에는 두꺼운 문제집이 있다. 고객의 각도, 걸음걸이의 텐션에 의하면 남학생은 확실히 여학생을 좋아하고, 대체로 무심하지만 미소를 잃지 않는 표정에 의하면 여학생도 남학생이 싫진 않다. 갑자기 돌에 걸려 넘어질뻔한 여학생을 남학생이 재빠르게 안는다. (여기서 잠시 멈춤. 지구의 시간까지 멈춤. 움직이는 건 흔들리는 눈동자와 꼴깍하고 넘어가는 침뿐) 잠깐의 정적이 어색했는지 여학생 남학생을 밀치고, 남학생은 괜히 화를 낸다. 땀이 살짝 맺힌 채 도착한 편의점 앞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는다. 공부는 잘 못하지만 음악엔 진심인 남학생과 그런 남학생이 한심하면서도 귀여운 전교 1등 여학생. 그들의 대화는 쉽게 이어지지 않지만, 끊이지 않는다. 좋아하는 노래라며 이어폰을 건네는 남학생과 ‘됐어’라고 무심하게 말했지만, 끝까지 듣는 여학생과, 심장 소리 들킬까 봐 키운 볼륨과, 아이들의 얼굴 위로 일렁이는 나뭇잎 그림자와 비트처럼 깔리는 매미 울음소리와, 날씨 때문인지 마음 때문인지 살짝 붉어진 두 볼과... 아아 여름이었고, 하이틴이었다____ 는 내가 어디서 보고 듣고 지어낸 미국식 아닌 경기도 남부식 이야기다. 남중과 남고 거기서도 평범과 찐따의 경계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나에게 이런 풋풋하고 설레는 장면은 하나도 없다. 이 지독한 클리셰 한 번 없는 그런 하이틴이었다니. 그래서일까 서른이 훌쩍 넘은 지금도 여름이 있고, 로맨스가 있고(절대로 사귀는 건 안되고, 좋아하고 수줍어야 한다) 좀 서툴고 유치하지만 진지한 청춘이 있는 이야기 앞에선 무장해제다. 결핍이 만들어낸 환상들이 이렇게 무섭다.



혹시 나와 비슷한 결핍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만화책 H2를 보자. 야구만화를 가장한 여름 냄새 가득한 하이틴 로맨스. 동네 친구였던 꼬맹이들의 키가 자라면서 함께 커버린 서로에 대한 애틋한 감정과 복잡 미묘한 우정과, 어른인 나보다 진지한 미래에 대한 열정까지 한 곳에 담은 책. 꼬맹이인 줄 만 알았던 남사친과 그 남사친의 절친이 남친인 소녀의 알 것 같은데 알 수 없는 간지러운 마음이 있는 책. 응큼한 것을 좋아하는 가벼운 소년이 완투승을 해냈을 때 내가 해낸 양 눈물이 왈칵하는 책. “하느님이 보고 싶으셨던 거겠지 나와 히데오의 대결을”, “난 최고의 타자가 되겠다. 넌 최고의 투수가 돼라”라고 말하는 유세윤이나 할 수 있을 거 같은 오글거림 마저 설레는 이 책. 델리스파이스 ‘고백’과 유희열 ‘여름날’을 있게 한, 마치 그 음악을 듣는 거처럼 읽는 내내 두근두근 둥둥 떠다니는 기분을 느낄 수 있는 책. 그러니까 경험한 적 없는 나의 하이틴을 환상적으로 채워준 이 책을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했으면 좋겠다. 하이틴만큼 청량감 넘치는 맥주와 시원 달콤 쫄깃한 올드페리도넛과 함께. 아마도 이런 맛이었겠지라며 없었던 시절을 회상하면서 말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3N3wYcC5wMk

H2와 고백을 한 번에 즐겨보세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