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써도 지갑은 꿈결 .. 이면 좋겠다
오늘도 또 왔다. 의문의 택배 상자가 어떤 연유에서인지 대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누가 보냈지” 의심섞인 기대를 가지고 택배를 뜯어보면, “오다록 고객님 구매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쪽지가 나를 향해 환하게웃고 있다. 나는 이렇게 종종 기억하지 못하는 소비를 할 때가 있다. 박스에 든 물건이 꽤 마음에 들어 요리조리 둘러보고 난 후에야 뒤늦게 카드 내역을 뒤져 본다. 가계부 어플은 “지난주 목요일 새벽 4시 경에 너가 너손으로 긁은 것이 맞다”고 대답한다. 그럼 나는 “그럼 그렇지, 어쩔 수 없다”며 물건의 택을 뜯고 교환 환불신청서를 구겨서 버린다.
나는 자주 잠결에 돈을 쓴다. 몽유병인가? 사실 아니다. 어쩌면 홧김에 쓴다는 표현이 좀 더 정확할지도모르겠다. 처음 사회생활을 하기 시작하면서, 잘하고 싶은데 좀처럼 잘 되지 않을 때마다 마치 데스 노트를쓰듯이 나는 차곡차곡 나만의 위시 리스트를 모았다. 귀여운 색깔의 바지, 그리고 그 바지에 깔 맞춰 입을얌전한 티셔츠, 맨발로 돌아다닐 수는 없으니까 플랫하고 편한데 또 귀여운 신발 등등.. 패션 아이템을시작으로 방에 둘 곳도 없으면서 인테리어 아이템을, 잘 쓰지도 않을 거면서 비건 제품이라기에 좋을 것같아서 화장품을.. 그리고는 나의 생활이 요리조리 내 마음대로 잡히지 않고 내 손을 떠난 것처럼 느껴질때마다 리스트 속 물건들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사버렸다. 그렇게라도 내가 원하는 것을 내 의지대로 내 손안에 넣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그것이 내 손 안에 들어오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들로부터 잠시나마 해방되는 기분이 들었다.
억압되었다는 기분이 들 때마다 그렇게 해방과 자유를 소비에서 찾고자 했다. 하지만 그것들이 정작 내 손안에 들어왔을 때, 오히려 더 진해지는 억압의 기분을 느꼈다. 제대로 된 쓰임을 찾지 못하고 방 안에 쌓여만 가는 물건들과 남는 것 없이 비어만 가는 통장 내역을 볼 때마다 후회와 죄책감이 들기 때문이었다. 홧김에 한몽중 소비의 만족과 효용은 딱 결제의 순간, 그때까지였음을.. 나는 그걸 누구보다도 더 잘 알면서 악순환의고리를 쉽게 끊어내지 못했다. 그 순간의 맛이 머리가 지끈 아파올 정도로 달콤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돈을써도, 그건 그저 꿈결일 뿐이었다.
“대면하지 않는 억압은 더 큰 억압을 부른다”는 말이 있다. 나를 괴롭히는 것에 직접 부딪히지 않는 것은 그저회피일 뿐이다.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없는 것처럼, 돈으로 불행이 막아지는 것도 아니다. 실제로 나는 몽중소비로 산 것들을 자주 쓰지 않는다. 오히려 옷들은 옷장 깊숙이 박아두고, 신발은 박스에서 꺼내지도 않은 채침대 아래에 고이 숨겨놓고 잊어버릴 때도 있다. 잠결의 기분에 취해서 사버렸다는 죄책감과 더불어 그것을사게 만든 때의 버거웠던 감정에 정면으로 마주할 자신이 없어서인 것 같다.
올해부터는 이제 나도 진짜 30대가 됐고, 더 이상 나의 몽중 소비가 꿈결에서 끝나지 않도록, 작은 억압이 더커져서 내 숨통까지 막지 않도록, 오늘 밤은 침대 밑에 숨겨둔 신발 박스들을 꺼내고, 돌아오는 월요일에는새벽 4시의 반스 운동화를 신고 출근해야겠다. 그럼 그때는 나의 몽중 소비의 결과물들을 사랑해주고, 더불어 억압으로부터 더 자유로워질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