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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지안 Aug 20. 2020

캐나다 홈스테이에서 생긴 일

복수심의 유효 기간

2007년 2월의 어느 날, 20대 중반의 나는 캐나다로 어학연수를 떠났다. 당시에도 다른 친구들은 어학연수를 가기 전에 어학원을 다니면서 흔히 하는 '기초 회화' 정도는 마스터하는 분위기였는데, 나는 어학연수를 결정하고 한 달도 안돼서 출국했기 때문에 아무런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준비를 안 해서 더 용감했던 걸까? 앞으로 펼쳐질 일은 전혀 예감하지 못한 채, 에어캐나다(Air Canada)의 대형 비행기는 인천공항에서 밴쿠버(Vancouver)로 향했다.


목적지인 빅토리아(Victoria)로 가기 위해 나는 경유지인 밴쿠버에서 소형 비행기로 갈아타야 했다. 태어나서 처음 타는 비행기에서 10시간 넘는 지옥을 경험한 뒤 밴쿠버 공항에 도착했다. 간단한 영어 한마디 입 밖으로 내지도 못했던 나는 비행기 안에서 물 한잔 달라는 말도 못 한 채 10시간을 버텼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음료수를 파는 곳에 줄을 섰다. 내 차례가 되었다. 어떤 걸 주문할 것인지 물어보는 거 같았다. 급하게 메뉴판을 스캔해도 'water'는 아무래도 없는 것 같았다. 기껏 한다는 말이 "사이다, please." 당연히 그쪽에서는 알아듣지 못했고 나는 다시 긴 줄의 맨 뒤로 가야 했다. 기다리면서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유심히 들었다. 당장 목을 축이지 않으면 위험해질 수 있다는 생존본능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Sprite, please."

'스프라이트다!'


목을 축일 수 있다는 희망의 힘으로 다시 내 차례가 되길 기다렸고, '스프라이트'를 최대한 아까 들은 대로 따라 하면서 몇 번 시도한 끝에 사이다를 살 수 있었다. 저세상 청량함.


'빅토리아로 가는 비행기는 어디서 타나?' 모든 표지판이 영어로 되어있었고 어지러움을 느끼던 중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이쪽이요. 빅토리아 가는 비행기, 이쪽으로 가세요." 한국에서 오는 사람이 많았는지 한국말로 안내해주는 직원이 있었다. 그 안내를 따라 빅토리아로 가는 소형 비행기에 올랐고, 드디어 빅토리아 공항에 도착해서 홈스테이 주인인 캐나다인 아저씨를 만났다.


그는 친절해 보였고, 유학원에서 준 자료에서 본 '퇴직 군인'이라는 직업이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군인'이라는 어떤 고정관념에서 나온 고정된 이미지가 있었나 보다. 그의 차를 차고 집에 도착했을 때 독일인 홈스테이 아주머니가 나를 반겨주었다. 도착한 시간이 늦은 밤이었는데 샌드위치를 먹으라고 내주면서 가족들에게 잘 도착했다고 전화를 하도록 배려해주었다. 집도 깨끗했고 내 방도 괜찮아 보였다.


이후 나는 낮에는 학원을 다녔고 저녁에는 홈스테이 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그 집에는 나 말고 일본인 친구가 있었는데 성격이 싹싹한 데다가 영어도 잘했다. 학원에서 나는 레벨 2반이었는데 그 친구는 무려 레벨 3반이었다. (레벨 5반이 제일 잘하는 반이었다.) 그 친구는 나처럼 밤 9시 이후에 컵라면을 먹다가 들키는 일도, 홈스테이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하는 말을 못 알아들어서 두 번 세 번 반복하게 하거나 손짓 발짓을 하게 만드는 일도 없었다. 심지어는 나처럼 '샤워시간 10분 이내' 규칙을 어기는 일도 없었다. 무슨 한일전에서 패배하고 돌아온 국가대표라도 되는 것처럼 괜히 대한민국 국민께 대국민 사과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10분 안에 샤워를 끝내려는 나의 치열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자주 10분이 넘어갔다. 그러면 아주머니가 문밖에서 화장실 문을 쿵쿵쿵 두드리며 빨리 나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다행히 10분 안에 샤워를 끝내고 나오면, 아주머니가 화장실에 들어가서 확인을 한 다음 내 방으로 와서 물기가 남아있으면 안 된다고 세 살 아이에게 말하듯 '단어'로 여러 번 반복해서 말했다.


캐나다로 떠나기 전, 한국에서 밤늦게 치킨이나 떡볶이를 자주 먹던 버릇이 있어서 그런지 이상하게 밤 9시만 되면 너무 배가 고팠다. 몇 번 '컵라면 적발 사건'으로 곤혹을 치른 후에야, 미리 마트에서 (마감 직전에 세일하는) 캘리포니아롤을 사다가 옷장에 몰래 넣어 두는 방법을 택했다.


9시만 넘어도 온 집안에 불이 다 꺼지고 매우 조용하기 때문에 내 방에 불을 켜놓기도 눈치가 보였다. '9시 이후 무조건 소등'이라는 규칙은 없었지만, 암묵적인 규칙이 있다고 혼자 느낀 것 같다. TV를 켜고 볼륨을 최대로 낮춘 다음 TV 불빛에 의지해서 캘리포니아롤을 입에 넣었다. 그것도 소리가 날까 신경이 쓰였다.


'아,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

괜히 눈물이 나는 날이 많았다. 학원에서도 집에서도 상점에서도 말 한마디 알아듣기도, 하기도 힘든 나날이 계속됐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아이는 도대체 무슨 말은 하는 걸까?'라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패스트푸드점은 아예 가지도 못했다. 바쁘고 고된 맥도날드의 10대 아르바이트생들이 나의 어눌함에 분노하는 것을 보기가 두려웠다. 가끔 엄마랑 통화할 때는 아주 잘 지낸다며, 선진국은 정말 좋다고 거짓말을 했다.


나와 홈스테이 아주머니와의 사이는 점점 나빠지고 있었다. 소통이 안되니 오해가 생기기도 쉽고, 오해를 풀 방법도 없었다. 어느 정도 영어에 귀가 트이기 시작할 때쯤, 문밖에서 아주머니가 아저씨에게 나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는 말도 들렸다. 별로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라는 것을 느낀 나는 점점 홈스테이 집에서의 저녁식사가 불편해졌다. 그 집의 규칙 중에 '저녁식사를 집에서 하지 않을 경우에는 5시 이전에 반드시 전화로 알릴 것'이 있었다.


나는 자주 4시 55분쯤에 전화를 걸었다. 아주머니는 "오늘 집에서 저녁 안 먹을 거지? (You're not gonna have dinner with us tonight, are you?)라고 물었고, 'not'을 들은 나는 한국식으로 "네.(Yes.)"라고 대답했다. 내가 "네.(Yes.)"라고 대답하면, 그것은 집에서 저녁을 먹겠다는 의미가 된다. 영어에서는 부정문으로 물어보든 긍정문으로 물어보든 상관없이 할 거면 "Yes", 안 할 거면 "No"이기 때문이다.


그 아주머니가 참다 참다 폭발하고 나서야 나는 내가 대답을 반대로 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주머니는 내가 일부러 본인을 화나게 하려고 반대로 대답했다고 생각했고, 나는 곧 그 집을 나와야 했다. 괜히 아무 상관도 없는 독일의 '히'로 시작하는 세 글자의 이름을 가진 인물을 떠올리기도 했다. 어차피 나도 그 집에 있는 것이 불편했기에 오히려 잘 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학원 코디네이터에게 부탁해서 선금으로 낸 홈스테이 비용(일종의 월세)을 돌려받을 수 있냐고 했더니, 가능할 거라고 하면서 아주머니에게 잘 얘기해주겠다고 했다.


다음 날 코디네이터는 아주머니가 절대 환불을 해줄 수 없다고 했다고 전했다. 나 때문에 식재료, 물 낭비 등 손해가 크고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심해서 돈을 돌려줄 수 없다고 했다는 것이다. 아주머니가 나를 '(일부러 반대로 말하는) 정말 못된 아이'라고 했다는 말까지 적나라하게 굳이 나에게 전달한 이유는, 환불에 대해 더 이상 언급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그렇게나 억울할 수가 없었다.


오기가 생긴 나는 처음으로 그 아주머니에게 할 말을 하기 위해 '영작'이라는 것을 하기 시작했다. 새벽까지 안 자고 아이리버 전자사전을 샅샅이 뒤져서 만든 그 문장들을 연습하고 또 연습해서 완전히 외워버렸다. 그리고 아주머니한테 가서 외운 문장을 줄줄 내뱉으며 따졌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게 다였다. 격양된 목소리로 더 빨라지는 아주머니의 말을 알아듣기도 힘들뿐더러 받아치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아저씨의 중재로 상황은 일단락되었고, 나는 곧 이사를 했다. 이사 가는 날에 아저씨는 문 밖까지 내 가방을 들어주며 따라 나와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것뿐이야."라는 말을 했다.


아저씨의 따뜻함에도 아주머니에 대한 강력한 복수심은 영어공부에 대한 열정에 기름을 부었다.

"반드시 유창해져서 반드시 복수한다."

"반드시 유창해진 뒤, 반드시 찾아가서 그동안 못했던 말을 다 한다."

굳이 공책에 까지 써가며 의지를 다졌다.


6개월 후, 아이리버 전자사전의 도움 없이도 그 아주머니에게 하고 싶은 말이 문장으로 머릿속에 착착 떠올랐다. 말로도 해보았다. (내 생각에) 자연스러웠다. 더 공부하고 싶은 욕심이 났다. 현지에서 공인시험에 응시하고, TESOL 자격증 과정도 수료했다. 모든 과정이 재미있고 의미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재미가 있을수록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 날이 더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어느새 그 아주머니에게 찾아가서 6개월 전의 일을 따지는 일의 우선순위는 저 밑으로 내려가 있었다.


캐나다에서 지낸 지 1년이 다 될 무렵, 현지 통신사 고객센터에 전화해서 내가 곧 한국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휴대폰 서비스를 해지하겠다고 말했다. 상담원이 물었다.

"캐나다를 아예 떠나시는 건가요?(Are you leaving Canada for good?)"

"네. 하지만 언젠가 또다시 올지도 모르죠. 누가 아나요? (I am, but I might come back one day. Who knows?"


상담원은 휴대폰을 해지 처리하겠다고 하면서 언제든지 캐나다로 돌아온다면 대환영이고 우리 통신사를 이용해준다면 영광일 것이라는 매뉴얼 답변을 해주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 생각했다.


'아,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아주머니를 향한 복수'가 생각나니 웃음이 났다.

'한일전 패배라도 한 듯 대국민 사과'가 떠오르니 웃음이 났다. 지금도 웃음이 난다. 


복수심의 유효기간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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