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쓰는 지안 Jul 29. 2020

악몽, 월급과 함께 사라지다

감정 에너지 총량의 법칙

공식적으로 '실직'한 지 3개월이 되어간다.


직장을 그만두기 전 지난 2년간 나는 매일 악몽에 시달렸다. 신기하게도 단 하루도 악몽을 거른 적이 없었다. 평소에 나는 공포영화나 범죄영화는커녕, 우연히 스치듯 보게 되는 폭력적인 장면도 의식적으로 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 장면을 보는 것도, 나중에 떠오는 것도 피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2년 동안의 꿈속 세상은 폭력과 범죄가 난무하고 그 곳에서 나는 생명에 위협을 받았다.


"아, 또 꿈이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생생하게 기억나는 악몽을 떠올리며 꿈이어서 다행이라는 안도감과, 앞으로 두 시간쯤 후에 현실세계에서 벌어질지도 모르는 '악몽 실제상황'에 대한 불안감을 동시에 느꼈다. 악몽은 길고 정교한 꿈이며, 잠을 깨고 나서도 꿈의 내용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특징이 있다고 한다. 나는 정말 신기하게도 매일 악몽을 꾸었고, 그 내용을 세세하게 기억했다.


직장생활의 현실이 너무 고달플 때면, 이게 실제 상황인지 악몽인지 구분이 안될 정도였다. 그런데, 실직 후 세 달이 되어가는 지금은 거짓말처럼 악몽이 사라졌다. 꿈을 전혀 꾸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꿈을 꿨는지, 그 내용이 무엇이었는지도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악몽과 월급은 절친이라도 되는 걸까? 올 때도 같이 오더니 갈 때도 같이 떠났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그 수많은 악몽 속에서의 내 모습은 많이 지쳐 보였다. 자연스럽게 나이가 든 게 아니라, 너무 고생을 해서 늙어버린 듯한 얼굴이었다. 그때 당시, 체력이 많이 소진됐다고 느끼면 덜컥 겁이 나서 굶다가도 밥을 먹거나, 비타민을 먹기도 했다. 방광염이 계속 재발해서 꽤 긴 시간 동안 항생제도 먹었다. '화장실 가고 싶을 때 갈 수 있는 삶을 살고 싶다.'라고 꽤 오랫동안 마음속에서 되뇌었다.


사실은 그 누구도 내가 화장실을 못 가게 막은 사람은 없었다. 갔다고 해서 무슨 큰 문제가 생기는 것도 아니었다. 밥을 못 먹게 한 사람도 없었다. 단지 나 스스로 나를 가두었던 것이다. 30분, 45분 단위로 어떻게든 많은 일을 처리해보고자 애쓰다 보니, 내 앞에 있는 사람의 문제를 해결해주기 위해 시간과 마음을 쓰다 보니, 정작 밥을 먹거나 화장실을 가는 것조차 뒤로 미루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어쨌든 내가 굶고 있고 몸이 고장 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늦더라도 조치를 취했다.


감정은 무한으로 쓸 수 있다고 착각했던 걸까? 감정이 소진되는 것은 미처 챙겨보지 못했다. 악몽은 불안이나 죄책감 같은 부정적인 감정과 관련이 있다고 하니, 아마 몸보다 마음이 더 너덜너덜했었나 보다. 감정도 에너지이고, 모든 감정 에너지에는 총량이 있다.


사람을 만나 사람을 통해 하는 일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나의 감정 에너지를 일하는데 쓰게 되었다. 사실 그게 나의 중요한 업무였다. 그들의 마음을 돌봐주는 일. 그래야 큰 일 없이 모든 것이 톱니바퀴처럼 꼭 맞게 잘 돌아갈 테니까. 정작 '나의 삶'에서 쓸 에너지는 늘 부족했다. 내 마음 상태를 챙길 시간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그럴 에너지가 없었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기분이나 감정상태에 맞추려고 노력하다 보니, 그 사람들의 감정 주기에 맞춰 '공감'이라는 이름으로 감정 에너지를 소진했다. 그들이 기뻐할 때 같이 기뻐하며, 그들이 울면 나도 같이 슬퍼하며 그렇게 감정을 써버렸다.


나는 내가 '감정을 공유' 하고 있다고 착각했었다. '공감'은 내 마음 에너지가 어느 정도 여유가 있을 때 나오는 고귀한 감정이다. 마음의 배터리가 방전되어 깜빡거리는데, 1% 밖에 남지 않았는데, 그걸 쥐어짜서 공감을 해주었던 것이다. 억지나 거짓으로 공감을 한 것이 아니다. 내 마지막 남은 진심을 그들에게 내줘버린 것이다.


배터리가 1% 밖에 남지 않았다고 깜빡거려도 충전기가 있으니까 언제든지 충전할 수 있다고 믿고 미루다가 갑자기 정전이 되어버린 느낌이랄까. 정전이 되고 나면 충전기도 무용지물이 된다. 왜 꼭 잃고 나서 그제야 소중했던 것들을 인정하는 것인지.


잃고 나서 소중함을 알게 된 월급도 악몽과 함께 내 곁에서 떠났지만, 한 가지 깨달음은 남아있다. 감정도 에너지이기 때문에 총량이 있다는 것. 안타깝게도 감정은 방광염처럼 배를 움켜쥐게 되는 통증 같은 적극적인 신호를 보내지 않는다. 5남매 중에서 배가 고파도 몸이 아파도 말도 안 하고 가만히 이불속에서 끙끙대고 있는 답답한 셋째처럼. 아마 최대치가 악몽 속에서 감정 에너지가 고갈된 내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댄싱 스네일 작가의 책 제목 <게으른 게 아니라 충전 중입니다>가 떠올랐다. 지금 나는 휴식을 취하면서 마음이 서서히 충전되는 것을 느끼고 있다. 이 마저도 '왜 고속 충전이 되지 않는가?'라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재촉하지만, 지금 마음의 배터리를 꽉 채워야 다시 일터로 돌아갔을 때 100% 충전된 마음 에너지로 여유 있게 고귀한 감정인 '공감'을 나눌 수 있기에, 나는 이 시간을 채움의 시간으로 채워가려고 한다.

작가의 이전글 다른 사람의 사생활이 궁금한 이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