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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휴헌 간호윤 Aug 20. 2021

『그리스인 조르바』를 보고

'사람'되기가 참 어렵다



니코스 카잔차키스(Nikos Kazantzakis, 1883~) 『그리스인 조르바』, 카잔차키스를 현대 그리스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이자 ‘20세기 문학의 구도자’로 지칭한다. 그는 평생 여행을 하고 자유를 외쳤다. 아래는 그의 묘비명이란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이러한 묘비명을 그대로 옮긴 것이 1946년에 출판한 『그리스인 조르바』다. 이야기는 지중해 남쪽에 자리 잡아 사시사철 온화한 기후의 크레타가 배경이다. 이 섬에서 갈탄 광산을 운영하려는 나(Εγώ-에고)와 조르바(Αλέξης Ζορμπάς-알렉시스 조르바스)가 함께 지내면서 벌어지는 일화들을 토막토막 다루었다.

조르바의 삶은 여성 편력, 여행, 기쁘거나 슬프거나 온몸을 다해 추는 춤, ---. 그것은 통제와 절제가 없는 자유이다. 때론 부랑자처럼 부조리, 비도덕을 서슴지 않지만 결코 사악하지는 않다. 조르바는 몸이 원하는 대로 순간순간을 즐기는 오늘만 산다. 어린아이처럼 순수하며 때론 교활하면서도 진실함을 잃지 않는다. 

작품 속에서 조르바는 이 소설의 화자인 나를 두목이라 부른다. (화자인 두목과 이 글을 쓰는 나는 참 많이 닮았다.) 소설 중, 아래 대사에 한참 눈이 머무른다. 

 

“인생이란 가파른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는 법이지요. 분별 있는 사람이라면 브레이크를 써요. 그러나 나는 브레이크를 버린 지 오랩니다. 나는 꽈당 부딪치는 걸 두려워하지 않거든요.”

 

또 한 구절, 늘 세상을 두려워하고 머뭇거리는 소시민인 두목에게 조르바는 이런 악담을 한다.

 

“두목, 당신의 그 많은 책을 쌓아놓고 불이나 싸질러 버리시구려. 그러면 알아요? 혹시 사람이 될지?”



 

자유인 조르바의 삶에는 걸림돌이 없다. 내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말이다. '나는 언제쯤 저 조르바와 같은 삶을 살아볼까. 아니, 단 하루만이라도 살 수나 있는지.'라는 가설은 진설이 될까?  단언컨대 영원히 불가능하다. 살 수 없는 게 아니라, 살 수 없게 이미 내가 나를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 살 수 없는 거'라면 내 의지의 박약 문제이다. 용기를 내면 된다. 하지만 '살 수 없게 이미 만들어 놓았다'면 내 의지와는 무관하다. 불가능이다.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다. 난 동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동물은 대상[먹이]을 욕망하지만, 난 인간[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  '인간[타인]의 욕망'이 내 욕망이 아닐지라도, 난 '인간[타인]의 욕망'만이 내 욕망이라고 몸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 '인간[타인]의 욕망'이 거짓일지라도, 볼 수 없는 신을 신앙으로 섬기듯, 난 브레이크를 신앙으로 믿는다.   



더 흥미로운 사실은 내 주위에서 조르바와 같은 삶을 본 적이 없다. 조르바의 자유는 조르바가 불지르라고 한 책, 그 허연 백지 위에 파리 대가리 만한 검은 글자로만 존재한다. '파리 대가리 만한 검은 글자'는 어제도 오늘도 내 주위에도 물 건너에도 산 너머에도 이 글쓰기 장에도 차고 넘친다.  내 나이쯤 되면 안다. '자유'의 동의어는 '희망고문'일뿐이라는 진리 아닌 고약한 진리를. 이 세상이 코스모스가 아닌 카오스라는 것을.


그래, 조르바는 나를 영원히' 두목'이라 안 부를 것이고 나도 영원히 조르바의 '혹시 사람'은 못 된다. 

그래, 나는 오늘도 눈 뜨며 브레이크를 정성스레 믿는다.('제아무리 디오게네스가 대낮에 등불을 들고 다녀도 조르바와 만나지 못 할거야'를 주문처럼 외우며.) 

이래저래 '사람'되기가 참 어렵다. 



안소니퀸 주연의 <희랍인 조르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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