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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휴헌 간호윤 Mar 22. 2024

안동답답이와 밭두덕 두더지의 언어관을 바꾸자

안동답답이와 밭두덕 두더지의 언어관을 바꾸자


간호윤 인천신문 논설위원.


선거철인데 언어는 없고 저만 잘났다는 거짓 허튼소리만 난무한다. 마치 집단 최면이라도 걸린 듯하다. 이태원 참사, 채 상병 사건 은폐, 양평고속도로 의혹, 명품백 뇌물수수, …. 지적을 해도 변명으로 일관한다. 세상이 그렇게 2분법으로 나뉘었다. 맞다 아니면 틀리다, 선 아니면 악, 좋으냐 아니면 싫으냐, 할래 아니면 말래, 이러니 나와 다르면 모두 적이다. 극우 아니면 극좌이다. 대화가 될 리 없는 소통부재의 갈라치기 사회가 되었다.


그 이유를 생각해본다. 첫째는 이 정부의 책임이니, 더 운운하자면 글자만 아까워 략(略)한다. 둘째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다. 모두가 다 내가 알고 있다는 강한 자신감을 보인다. 자신의 주장 근거를 나름 내세우지만 대부분 어디에서 보았거나 들었다는 눈동냥, 귀동냥뿐이다. 흥미로운 것은 자신이 보았거나 들은 것에 맹목적인 신뢰를 보낸다. 마치 파리 8대학 프랑스문학 교수이자 정신분석학자인 피에르 바야르의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이라도 읽는 듯하다.(이 책은 ‘책을 읽었다고 독서한 게 아니고 안 읽었다고 비독서도 아니니, 네가 창조적으로 읽어보라(?)’는 정통 독서를 뒤집어 본 아리송한 독서에 관한 책이다.)




이렇듯 제목만 본 것을 가지고 아는 체 하는 이들이 태반이다. ‘책 한 권 읽은 사람이 책 한 권도 읽지 않은 사람보다 더 무섭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책 한 권 읽으려면 ‘호모 유니우스 리브리(Homo unius libri, 사람의 책 한 권)’ 정도는 되어야 한다. 이 말은 성(聖) 토마스 아퀴나스 주교가 “가장 잘 배우는 방법이 무엇입니까?”란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그 ‘한 권의 책(unius libri)’은 성경이다. 성경 한 권쯤은 독파 한 뒤에야 아는 척해야 한다. 


셋째는 거짓에 의한 진실의 실종이다. 원인은 두말할 것도 없이 언론이다. 선거기간이면 더욱 기승을 부린다. 증거나 객관적인 사실이 가려지고 거짓이 난무한다. 이를 ‘포스트-트루스(post-truth, 탈진실)’라 한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에는 “여론을 형성할 때 객관적인 사실보다 개인적인 신념과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현상”이라고 정의한다. 여기서 ‘포스트’는 진실이 무의미할 정도로 퇴색되었다는 의미의 탈(脫)이다.(트럼프주의자들이 대표적이다. 지난 9일 독일 유력 일간지인 ‘베를리너모르겐포스트’가 입틀막  사태 등을 거론하며 윤 대툥령을 한국의 트럼프로 보도한 기사는 의미심장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metaphysic(메타피직)’에서 거짓을 “존재하는 것에 대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거짓이다”라 정의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이런 거짓을 믿는 이들을 안동답답(安東沓沓)이라 했고 이덕무 선생은 ‘우물 안 개구리와 밭두덕 두더지처럼 홀로 그 땅만이 전부라는 믿음’이라 일갈하였다. 


이 모두 소통이 되지 않아 벌어진 일이다. 사람과 사람이 소통을 하려면 언어가 필요하다. 언어는 말과 글로 구성되어 있다. 말과 글은 다시 듣기와 말하기, 읽기와 쓰기, 4가지로 나뉜다. 태어나며 ‘듣기→말하기→읽기→ 쓰기’ 순으로 나아간다. 대화와 소통이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입은 하나고 귀가 둘이건만 제대로 알지도 못하며 제 말만 외댄다. 그러니 ‘말하기’만 있지, 듣기와 읽기, 쓰기는 행방이 묘연하고 진실이 사라진 자리엔 거짓만이 설친다.


구한말, 실학자이며 과학자요, 사상가이기도 한 최한기(崔漢綺,1803~1879) 선생이 『기측체의』 <신기통> 제2권 ‘구통’에서 설파한 참 멋진 언어의 정의를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언어는 문자에 실려 있는데, 두 빗장을 뚫어야 비로소 언어의 전달이 문자에 미친다. 전하려는 자는 손으로써 말하고 받으려는 자는 눈으로써 말을 들어야 한다.” 말을 전하려는 자는 화자[필자], 받으려는 자는 청자[독자]이다. 전하려는 자가 손[입]으로써 말한 것이 한 빗장이라면, 받으려는 자가 눈[귀]으로써 말을 듣는 것이 또 한 빗장이다. 제대로 된 의사소통은 이 둘의 빗장이 활짝 열려야 함은 두말할 나위 없다. 



 간호윤 논설위원 

kan77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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