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것은 없다.
어떤 목적을 가지고 하는 말이나 글만큼 그 목적을 달성하는데 무력한 것은 없다. 그것이 목적을 가진 언어의 자가당착적인 비애다.
어렸을 때는 말과 글로 사람을 홀릴 수 있다고 생각했나 보다. 남들이 글 좀 쓴다고 추켜 세워 주니 정말 그런 줄 알고 감히 짝사랑하는 아이에게 연애편지를 썼다. 잘 알지도 못하는 아이였는데 순전히 겉모습만 보고 혼자 얼굴을 붉히다 이런저런 미사여구로 점철된 편지를 써서 보내서 전교적인 망신을 당했다. 나도 그걸 돌려 본 독자의 입장에서 배를 잡고 한껏 웃어 보는 특권을 가졌으면 좋았을 정도로 웃긴 명문이었는데... 안타깝게도 내가 그 부끄럽고 흉한 것을 쓴 이였다. 기억이 안 난다고 하고 싶지만 이 글을 쓰면서 마지막 문장이 기억나 버렸다. '네가 날 좋아해 주지 않는다 해도 난 그 아픔까지 사랑할 거야.' 당시 유행하던 유행가 가사를 응용한 이 마지막 문장은 어린아이가 쓰기엔 너무 성숙한 표현이었고 그래서 고백 편지를 돌려 본 아이들 사이에서 히트 쳐서 급기야 선생님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고... 그 이후는 차마 가슴 아파 적을 수 없는 흑역사다. 어쨌든 좋아하는 마음을 고백해서 한 번 친해져 보려고 쓴 글은 정반대로 너무나 어색하고 부끄럽고 수치스러워 이제는 그 아이가 말을 걸면 도망가게 되고 멀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현실은 대입 논술고사가 아니었다. 팽팽하게 대립하는 두 개의 의견 중 하나를 선점하여 남보다 더 구체적이고 훌륭한 증거와 논리로 상대방의 의견을 압도해 버리면 설득에 성공하는, 그런 논술고사가. 현실은 항상 그 어느 것도 딱히 더 낫다 싶지 않은 고만고만한 의견들 중에 힘겹게 하나를 골라 흐릿하게 돌려 돌려 전달하면 그 공허한 말들이 서로 부딪히는 지지부진한 과정 중에 어느새 말 외의 것들, 권력이나 이해관계나 외부 상황과 같은 것들에 의해 결론이 나 버리고 나는 설득에 실패한 사람이 되어 있기 십상이었다.
교훈을 주려고 하는 대화에 지루해 본 적 있다면.
너를 위해 하는 말이야, 하는 소리에 반발심이 들어 본 적 있다면.
상을 타기 위해 쓴 글만큼 허무한 것을 본 적이 있다면.
할 말이 없는데 침묵을 깨트리기 위해 아무 말이나 지껄이고 후회한 적 있다면.
마음을 사려고 글을 썼는데 읽는 사람이 도망가 버렸다면.
나를 알아줘, 투정했는데 '야 너만 힘드냐 세상 사람 다 힘들지' 하는 퉁명스러운 대답만 돌아왔다면.
우리는 모두 한 번은 목적을 가진 언어 때문에 그 목적 달성에 실패한 적이 있는 사람들이다. 설득에 실패하면 실패할수록, 잡으려고 하면 달아나 버리는 것들이 늘어날수록, 아니 애초에 어떤 의도를 가지고 하는 말과 글에 무슨 힘이 있을지 회의가 들 수록 한 가지 느끼는 것은 있다. 글과 말은 의도와 목적이 없을 때 가장 강력하다는 것을. 어떠한 설득이나 치장의 의도가 없을 때, 자기 자신을 그냥 보여 줄 때, 단어와 문장이 이끄는 대로 대화와 글을 이어갈 때, 그나마 거짓은 아닌 참 언어가 된다. 그 언어가 배설의 기능뿐 아니라 어떤 다른 기능적 효용이 타인에게 있을 수 있겠는가 하는 숙제는 여전히 남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