쓴다는 것, 살아간다는 것.
차가 신호에 걸렸을 때 차창 밖으로 바람에 나부끼는 핑크퐁 뮤지컬 광고를 보았다. 뭐, 핑크퐁과 아기 상어의 월드투어쇼? 지금 막 동남아 순회공연을 마치고 온 김시스터즈도 아니고, 라스베이거스 공연을 끝낸 bts도 아닌데 핑크퐁이 월드투어를? 이름만으로도 패기 넘치고 야망 가득한 이 쇼를 놓칠 수 없었다. 충동적으로 표를 사고 어린 아들보다 내가 더 뮤지컬을 기다렸다. 과연 어떤 스케일이기에 월드투어라고 이름 붙였는지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에.
내가 어렸을 땐 1년에 한 번 크리스마스에 호두까기 인형 발레를 보러 가는 것도 특별하고 귀한 경험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어린이 공연에 대한 수요도 많고 공급도 많은 모양이다. 예매 사이트에는 핑크퐁뿐만 아니라 헬로카봇 뮤지컬, 옥토넛 뮤지컬 등등 애들 만화는 다 뮤지컬 버전으로 만들어 놓은 듯 별 게 다 있었다. 수원의 경기아트센터는 공연장도 꽤 크던데 코로나 시국에도 불구하고 관객석도 제법 들어찼다.
뮤지컬 내용은 핑크퐁과 아기 상어가 전 세계 (중국, 유럽, 아프리카, 남미)를 돌아다니는 여행을 하고 한국에 돌아온다는 것이었는데 배우들의 연기와 춤도, 노래도 수준급이었다. '역시 bts의 나라답게 어린이 뮤지컬 수준도 높군' 감탄하며 외국에서 오랜만에 들어온 촌티를 팍팍 내며 감상했다. 하지만 아쉬운 점도 있었는데 수박 겉핥기 식이라도 유럽은 나라가 아니라 대륙이라고 이태리, 프랑스, 핀란드 등 각 나라의 고유한 음식과 문화가 있는 걸 알려 줬는데 아프리카는 밀림에 사는 사자, 원숭이 같은 동물들만 나오고 나라들을 소개해 주지 않는 점이었다. 아무래도 한국에서 지리적 거리가 먼 나라일수록 피상적인 이미지만 가질 수밖에 없겠지만 2022년에도 아프리카 대륙이 밀림만 있는 한 나라처럼 취급되는 점이 씁쓸했다. 이건 내가 외국에 살아서 더 아쉽게 느낀 점일지도 모르겠다. 누군가 중국, 한국, 일본을 뭉뚱그려 같은 '아시아' 아니냐며 '한국도 고유의 언어가 있냐, 중국어랑 한국어가 많이 다르냐' 이런 질문을 했을 때 느끼던 씁쓸함? 내가 한국은 겨울에 춥다고 했더니 한국이 태국처럼 아열대 기후인 줄 알고 kalt 가 아니라 warm이라고 교정해 주던 독어 선생을 만났을 때의 황당함? 뭐 그런 것들이 섞인 감정.
그런데 아프리카 밀림이라는 전형적인 공간에서 극에서 가장 입체적인 캐릭터인 원숭이가 등장한 것이 흥미로웠다. 밀림의 제왕 사자에게 덤비기도 하고 술수도 부리고 반전 유머도 구사하는 장난꾸러기라서 가장 인상적인 캐릭터였다.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것들보다는 공룡, 괴물, 도깨비, 용 이런 것들에 꽂히는 아들이 좋아한 건 멕시코 '망자의 날' 축제 장면에 나오는 유령들이었지만 (한동안 '저기 멕시코 귀신 나온다!' 하며 아들 놀려 먹는데 잘 써먹었다).
공연이 끝나고 나서 집에 가면서 남편과 공연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다.
"제일 좋은 배역이 원숭이 아니야? 배우가 연기력을 발휘할 만한 여지가 있는 캐릭터는 원숭이밖에 없었던 것 같아. 다른 배역들보다 더 입체적이잖아."
"제목이 핑크퐁과 아기 상어의 월드투어인데 핑크퐁이랑 아기 상어가 주인공이지."
"하지만 그 둘은 제일 인기가 많아도 내내 탈을 쓰고 나오잖아. 아이들이 제일 좋아하지만 여우 탈과 상어 탈 안에 내내 갇혀서 제약이 있는 연기를 하잖아. 본인 얼굴도 안 나오는 배역인데 배우들이 좋아할까?"
"배우가 그런 걸 상관하겠어. 자기 배역이 그러면 하는 거지. 그렇게 따지면 핑크퐁과 아기 상어를 데리고 세계를 돌아다니느라 거의 매 장면 나오면서 탈도 안 쓰고 나오는 튼튼쌤이 주인공이지. 그래서 제일 미남을 캐스팅한 걸지도."
"아니야, 튼튼쌤은 너무 선생님처럼 옳은 말만 하고 지도만 한 느낌이야. 제일 매력적인 캐릭터는 역시 원숭이야."
제일 좋은 배역, 제일 입체적인 배역, 제일 매력적인 배역, 주인공, 내 배역. 다 다른 개념들이 뒤섞여 버린 바보 같은 대화였지만 그 대화로 인해 나는 예술가의 숙명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간 경험한 모든 예술작품을 만들어 낸 사람들이 유명과 무명, 순수예술과 대중예술, 시작한 이와 시작하지 못한 이까지 뒤섞여 나를 덮쳐 버린다. 어린이 뮤지컬에서 내내 탈을 쓰고 나온 배우는 얼굴을 내놓고 연기하고 싶었을까? 그래도 제목에 배역 이름이 들어가는 주인공이어서 좋았을까? 제일 캐릭터가 분명한 배역을 연기한 배우는 행복했을까? 그래도 역시 많이 나오는 배역이 더 중요한 걸까? 나중에 전 국민이 다 아는 뮤지컬 배우가 되어 TV 토크쇼에 나와서 신인 시절에 1시간 넘게 탈을 쓰고 어린이 뮤지컬 했을 때의 고생한 이야기를 털어놓을까?
핑크퐁 오혜리: (제 배역의 매력 포인트는) 존재 자체라고 생각해요. 걸어만 나와도 귀엽고 예쁘고 다 하기 때문에. (가장 추천하고 싶은 노래는) 엔딩곡 '안녕, 안녕' 노래를 부를 때 아이들한테 안녕, 안녕하는데 뭔가 울컥한 느낌도 들고 아이들이 저한테 안녕이라고 해 주는 걸 볼 때가 제일 기분이 좋거든요.
판다 이대기: 판다는 사실 그 안에서 엄청난 서사가 있거든요. 위기와 역경을 극복해서 멋진 쿵푸판다로 나아간다는...
사자 김요한: 사자는 외형이나 목소리, 행동이 거친 것도 있지만 누구보다 순수하고 여린 매력이 있어요. (키즈 뮤지컬을 하면서 가장 행복한 순간은?) 제 대사 중에 '다들 날 무서워해서 난 늘 혼자였거든' 하고 우는 게 있는데 관객석에서 '아니야~사자야~'하고 저를 위로해 주더라고요. 그게 너무 웃기면서도 저한테 기억에 진짜 많이 남지 않을까.
원숭이 양재하: 배우로 태어난 걸 너무나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https://youtu.be/fJBbnhYUA8Y
검색하면 배우 정보가 분명히 있겠지 싶어 찾아보니 유튜브에 핑크퐁 뮤지컬 배우들 인터뷰가 있었다. 그들의 인터뷰를 듣고... 또 듣고... 여러 번 들었다. 부끄러워서 글 한 단락을 지웠다. 어리석은 질문들은 남겨 두었다.
무언가 쓰고 싶지만 어떻게 쓰느냐의 질문을 떠나서 왜 써야 하는지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지 못해서 시작조차 하지 못한 사람으로서. 살고 싶지만 어떻게 사느냐의 질문을 떠나서 왜 살아야 하는지의 질문에 대한 대답도 아직 찾고 있는 사람으로서. 삶이 문득 허무할 때 이들이 생각날 것 같다. 자기 배역의 존재 자체를 사랑하고, 자기 배역에 서사와 의미를 부여하고, 관객에게 울컥하고, 배우로 태어난 것을 감사하는 사람들이.
그래서, 써야겠지. 그래서 살아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