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무미건조 단조로운 일상에 할 얘기라고는 애 얘기밖에 없는 아줌마라서 오래간만에 올리는 글이 또 애랑 논 얘기다. 육아를 하다 보면 3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유년 시절을 다른 버전으로 한 번 더 사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움직이는 것도 귀찮고 사람 많은 것도 싫어서 어릴 때 가만히 앉아 책만 읽던 나였는데 자식이랑 놀아 주느라 놀이터도 가고 수영장도 가고 술래잡기도 하고 비눗방울도 불고 썰매도 타고 여행도 여기저기 다니면서 그때 못 논 것을 이제 와서 벌충하는 느낌이랄까.
주말 가족 여행을 강화도로 갔다 오면서 강화 천문과학관이란 곳을 들렀다. 폐교를 개조해서 천체 관측도 하고 우주에 대해 배워 볼 수 있게 한 곳인데 미리 예약하지 않으면 천체관측을 할 수 없고 그마저도 여름철에는 비가 많이 오는 궂은 날씨에는 별이 보이지 않아서 조금 아쉬운 면이 있지만 그래도 이런 곳이 있구나, 하고 알아두는 차원에서 갔다 올만했다.
진짜 별은 못 봤지만 1층에 있는 천체투영관에서 별자리와 달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돔 천장에 재현되는 밤하늘을 볼 수 있었다. 의자가 뒤로 젖혀지는 리클라이너라 시원하게 에어컨 바람맞으며 한숨 잘까 했다가 처음 듣는 별자리와 달에 대한 이야기들이 있어서 흥미롭게 들었다. 고등학교 지구과학 시간에 나는 뭘 들었던 걸까? 왜 나는 지구와 달이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걸 몰랐지?
달은 지구에서 3.78cm씩 매년 멀어지고 있다고 한다. 지구가 자전하면서 바다와 대륙과의 마찰로 인해 자전 속도가 느려지고, 이는 달의 운동 속도를 빨라지게 한다. 그 결과, 달은 지구에서 더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1]. 지구과학 시간에 졸아서 상식이 없는 1인은 이제 걱정하기 시작한다.
‘그러면 우리는 언젠가는 밤하늘에서 달이 사라지게 될 텐데 어떡하지?’
내 속마음을 듣기라도 했는지 설명해 주는 분이 말한다.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벌어지지 않을 일이고 (수십억 년 후의 일) 사실 그전에 태양이 폭발하면서 지구고 뭐고 다 집어삼켜서 멀어지는 달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고.
‘뭐야, 전혀 위로가 되지 않잖아!’
언제나 영원할 것만 같은 모든 것들에 끝이 있다. 고정되어 있는 줄 알았던 자리들도 낮아지거나 높아지거나 멀어지거나 가까워지면서 변한다. 아주 미세하게 조금씩 서서히 변해서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는 누군가와 멀어져 있다. 내가 변해서인지 그가 변해서인지 알 수 없으나 어쨌든 그렇게 멀어져 간다. 하지만 슬퍼할 필요는 없다. 지나간 인연이 내게 비춰 주었던 그 모든 빛나는 시간이 사라지고 나면 내 삶이 암흑 속에 들어갈까 두려워하기 전에 지구 위에서 내 시간도 멈추니까.
천체투영관에서 들은 설명 중 신선한 충격이었던 또 다른 새로운 뉴스는 (오직 지구과학 무식자에게만) 북극성이 유일한 북극성이 아니라는 것!
지구에서 가장 북극에 있는 별은 고정된 하나의 별이 아니라 세차운동의 영향으로 지구의 자전축이 움직이면서 25,770년을 주기로 바뀐다 [2]. 기원전 3000년 무렵에는 용자리의 알파별 투반이 북극성이었다. 500년경까지의 북극성은 작은곰자리의 머리에 있는 베타별 코카브였다. 지금 우리 시대의 북극성은 폴라리스지만 14000년경에는 거문고자리 알파별 베가가 북극성 자리에 놓이게 된다.
허헛? 폴라리스라는 별이름을 북극성으로 번역한 건 줄 알았던 나의 무식이여. 사실은 여자친구 자리에 말자가 왔다가 순이가 왔다가 지금은 꽃님이가 온 격이었구나.
사막이건 대양이건 나침반이 없을 때에 방향을 알려 주는 절대적인 지표가 되었던 북극성이 절대적이고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유한한 기간 동안만 지위를 유지하다가 그 자리를 물려주고 지나가는 별들의 궤적 속에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듣는 순간 만감이 교차했다.
북극성 이야기를 인간사에 적용하면 위로가 되기도 한다. 그 무엇도 절대적인 것은 없다. 내가 추구해야 할 절대적인 어떤 가치, 도달하지 못하면 불행하거나 인생의 실패자가 되는 엄청나게 중요한 무언가란 세상에 없는 거다. 지금 이 순간 지표가 되어 주는 그것을 믿고 따라가되 너무 굳은 머리와 꼿꼿한 목으로 집착하지 말고 새로 떠오르는 별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인생의 망망대해에서 길을 잃지 않으리라.
하지만 유일한 창조주 절대자의 존재를 믿는 사람으로서 이런 생각들은 또 나를 순간적인 회의론에 빠지게 하기도 한다. 내가 믿고 있는 진리가 상대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는 과학과 이성의 냉소 앞에서 움츠러들지 않고 내가 믿는 것을 믿을 수 있는 용기가 내게는 있는가?
어느덧 천체투영관 돔의 밤하늘은 밝아졌고 어려운 과학용어를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던 유치원생 아이는 과학관에서 빨리 나가기 원한다. 그래, 만이천 년 후 북극성의 이름을 기억하려 애쓰지 말고 너와 나는 지금을 살자. 나가서 맛있는 강화도 숯불 바비큐도 먹고 장어구이도 먹고 회도 먹자.
오늘 이 순간 지구와 달 간 거리 38만 4000km, 북극성은 폴라리스. 너와 나는 아직 아주 가깝다.
[1] https://www.foeconomy.co.kr/m/id/YrMrwxT4PctHu7EU4dgq
[2] https://ko.m.wikipedia.org/wiki/%EB%B6%81%EA%B7%B9%EC%84%B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