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우투 Sep 15. 2021

내가 매일 무언가를 하며 배우는 이유

마흔에 생각하는 공부라는 이름

나는 어릴때 공부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었다. 그냥 생각없이 일찍부터 4년간의 교회 유치원, 웅변학원 유아원, 병설유치원을 다니다가 초등학교를 입학했다. 그냥 일찍부터 부모님이 보내니 부지런히 다녀야하는 곳인가 보다 하고 아무생각없이 다녔다. 그렇게 나는 아버지의 교육열에 자연스럽게 탑승했다. 아버지는 시골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한채 사회인이 되었다. 어린 나이에. 당시엔 국민학교라 부른 곳에 가기 위해 5km가 넘는 거리를 짚신을 신거나 고무신을 신고 걸어가야 했다고 한다. 


고무신이 닳아 빨리 새로 사야하는 시점이 되자 학교에 가지말라고 혼이 나기도 했다고 한다. 술만 마시고 도박에 빠진 할아버지와 대가족을 꾸려야하기에 밭일 논일을 마다않던 할머니. 막둥이로 태어난 동생을 돌보라는 말에 등에 엎고 학교를 꾸역꾸역 갔던 날도 여럿이라고 하셨다. 그런 아버지의 꿈은 '내게 자식이 생기면 나는 아주아주 잘 대해 줄 것이다' 라는 생각이었다. 


아버지의 이런 생각은 친 어머니처럼 따르던 큰 누나의 결혼으로 시작되었다. 큰 누나의 남편인 나의 큰고모부는 참으로 사람이 좋다. 늘 웃는 얼굴에 사람을 좋아하는 큰 고모부는, 아버지가 집에 놀러오면 몇날 몇일 밥을 축내며 그렇게 많이 먹어도 더 먹고, 더 놀다 가라며 반겼다고 한다. 그 고마움이 다 커서도, 결혼해서도, 그리고 내가 다 커서도 기억에 남아 나에게 늘 이야기 해 주셨다. 초등학생이던 내가 하루는 아버지를 따라 큰고모 댁에 간 적이 있다. 그날도 두분은 버선발로 뛰어나와 우리를 반기며 온갖 김치와 과일과 간식들을 꺼내주시며 많이 먹으라고 흐뭇하게 바라보셨다. 


그때 내가 받은 느낌은 아마도 아버지가 어릴 때 받았던 느낌과 같을 것이다. 그 잠시 몇일의 느낌이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잡아 큰고모와 큰 고모부의 감사함이 아직도 전해진다. 그런 간접적인 부모의 고마움을 아버지는 큰 고모부와 큰 고모에게서 느끼고서는 '나중에 내게 아이가 생긴다면'이라고 생각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정말 아버지에게 나라는 딸이 생겼을 때, 너무 작고 소중하고 귀여워서 장난을 마구 치며 일부러 울리면서도 너무 예뻐서 어쩔 줄 몰라하셨다. 


그런 아버지의 마음은 내가 3살될 무렵 피아노 가르치기, 4살 웅변학원 보내기, 5살 교회 유치원 보내기, 6~7살 병설유치원 보내기로 계속 되었다. 소위 아이 교육에 관심 있는 아버지의 행동은 나에게 좋은 영향을 주기도 했고, 나쁜 영향을 주기도 했다. 너무 일찍 어머니와 떨어져 혼자 사회생활을 해야하는 외로움은 단점이자 나쁜영향이었다. 덕분에 나는 성인이 되어서까지 부모님께 힘든 점, 도움을 받아야 할 순간 제대로 요청을 하거나 말해 본 적이 없다. 


장점도 있었다. 여러가지 일찍 배우기 시작한 나는 그냥 배움에 대해서 익숙해진 것이다. 마흔이 된 지금도 언제나 무엇을 배우거나 하지 않으면 심심하다고 느낄 정도로 호기심도 왕성하다. 나의 성격과 성향에는 일찍 어딘가에 보내서 무언가를 배우고 즐기는 것이 잘 맞았던 탓이다.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길 내가 똑똑하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어릴때 가르쳐주지 않아도 말을 너무 잘하고 호기심이 왕성해서 혹시 영재나 천재는 아닐까? 라는 생각에 이것저것 알아보셨다고 한다. 그리고 나에게 일찍 그림채들을 사주셨다. 


나는 한글을 간판을 보며 깨우쳤다. 아버지랑 차로 이동하는 그 안중에 간판을 보고 글을 깨우쳤다. 유치원에서 배운 글도 있었지만 그게 글을 다 읽기에는 부족하리라 생각했던 아버지는 매번 '저건 뭐라고 읽어?'라는 질문에 단 한번도 거절하신 적이 없다. 친절한 말투로 대답을 해주시고 늘 한결 같았다. 덕분에 나는 혼란스러운 내 유년기를 아버지의 속도에 맞출 수 있었다. 


늘 바쁘고 힘들다고 말하는 어머니와 달리 아버지는 속에서는 난리가 나더라도 곁으로는 여유가 넘치고 느긋해 보였다. 나는 그 점이 무척 좋았다. 아버지 옆에서는 편안했다. 반면 나의 어머니는 살림도 책임지고 동생까지 같이 돌봐야하며, 제때 밥한끼 먹기 힘든 삶을 살아오셨다. 미래를 생각하니 여유를 부릴 틈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와 동생에게 가장 중요한 순간에 어머니는 돈을 벌어야했다. 


지금도 눈에 선한 사진이 한장 있다. 나는 가족과 오랫만에 함께 놀러나간 날이라 정말 즐거웠지만. 기념찰영한 사진 속에 우리가족은 모두 말라있었다. 어머니 말씀으론 아버지도 어머니도 너무 힘들고 돈벌이도 마땅치 않아서 두분이서 마음고생도 심하고 돈걱정도 심했다고 한다. 그래도 아버지와 어머니는 조금의 돈이 생기면 나와 동생이 먹을 식량을 사서 우리 둘을 배부르게 먹이셨다. 그 사진속에 나와 동생은 배가 뽈록하게 나와서 우리만 많이 먹었음을 대번에 눈치챌 수 있다. 


그런 두분의 노력을 알기에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용돈을 받으면 당시 절친이던 친구와 문제집으르 구매하고 그 문제집을 누가 빨리 푸는지 내기를 했다. 그리고 누가 많이 맞추었는지도 내기를 했다. 항상 친구가 이겼지만, 나는 그 내기의 이기고 지는 것의 결과보다는 친구와 함께 문제지를 풀고 답을 맞추고 비교하는 것. 그리고 다시 틀린 문제를 반복해서 푸는 것에 재미가 있었다. 또 우리는 서로 다른 문제지를 구매해서 다 풀고나면 교환해서 또 각자 풀기를 반복했다. 


가난한 우리들의 2번 공부하는 방법이었다. 나는 초등학교 입하해서 첫 친구를 무척 잘 만난 케이스다. 친구의 이름은 '김연경' 나는 아직도 이 친구의 이름을 잊어버릴 수가 없다. 나에게 정말 좋은 습관 '공부하는 습관'을 가르쳐 준 친구이기 때문이다. 성격도 활달하고 누구에게나 친절을 베풀며, 운동도 잘했다. 이친구에게서는 나에게 없는 성격과 활동성이 있었다. 덕분에 나는 초등학교 적응을 무척 잘 할 수 있었다. 나중에야 우리 둘이 친해진 덕에 어머님들끼리도 인사를 하게되어 서로 부업을 소개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연경이 어머님은 내가 놀러가는 날은 무척 좋아하셨다. 내가 연경이 집에 놀러가면 새로 산 문제지를 빨리 풀자며 연경이 방 바닥에 드러누워 문제를 한참 풀었다.  그럼 연경이 어머님은 부업을 하시다가 간식시간이면 간식도 내어주시고 흐뭇하게 바라보시며 마루에서 계속 부업을 이어 가셨다. 당시 부업은 보통 이어폰 플라스틱과 줄을 연결하는 작업이었다. 나중에 나를 데려온 나의 어머니가 이야기를 나누다 그 부업을 같이 하시기도 했다. 나도 신기해서 가끔 심심하면 그 부업작업을 하기도 했는데, 하나에 몇원이라는 소리에 깜짝 놀란적도 있다. 


환경이 그랬다. 친구가 그랬다. 왠지 공부를 해야할 것 같아서 목적이나 꿈은 없었지만 주어진 공부를 해야할 것 같았다. 그래서 공부를 하고 교과서를 읽었다. 유일한 내 취미는 초등학교 3학년때에 정해졌는데. 비디오테이프로 애니메이션을 찾아 보는 일이었다. 집 앞에 세워둔 핑크 자전거는 옆건물에 사는 발달장애가 있는 동갑의 친구가 훔쳐가는 걸 알았지만. 굳이 그를 고자질 하거나 화내지 않았다. 나는 탈 만큼 많이 탔기 때문에 욕심이 없었다. 그가 자전거를 훔쳐 갈때쯤 나는 비디오 테이프를 대여해 보는 일에 빠져 있었다. 


연경이와는 학년이 바뀔때마다 반이 달라지면서 점점 멀어졌다. 서로의 반 친구와 친하게 지내게 된 다는 걸 알았다. 나는 계속해서 문제집을 자서 풀고, 답을 맞추며 연경이랑 하던 패턴을 방학때마다 반복했다. 그냥 이미 공부에 재미를 느끼는 것이다. 이 행동이 지금에서야 '자기주도학습'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초등학교 1학년때 잡힌 자기주도학습의 자세가 내 평생을 좌우한다. 


이 많은 이야기를 하면서 결국 결론은 '자기주도학습'이다. 방법이 어떻게 되었든 나는 책을 읽는 사람이 되었고, 자기주도학습이 몸에 벤 사람이 되었다. 공부는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 배우고 익히고 활용하면 어떻게든 다시 나에게 돌아오고 나에게 그 결과를 내놓는다. 나는 그걸 마흔이 되어서 정리를 해보았다. 그리고 내가 다시 공부를 계속 해야겠구나 다짐하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초등학교 4학년때 운동선수 생활을 하며 잠시 공부를 4년간 손에서 놓았다. 당시 운동선수는 공부를 굳이 할 필요가 없었다. 내가 속한 팀은 전국1위의 팀이었고, 내가 그렇게 운동을 잘하지 못해도 팀 친구들이 월등하고 전체적으로 키도 컸기에 우리를 이길 팀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늘 즐겁게 즐기며 운동하고 딴생각도 가능 했던 것 같다. 그런 와중에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수능을 보는 남자팀 오빠들의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몇해 후 나는 중학생 팀으로 올라갔고 거기서 운동선수인 우리가 실업팀이나 프로팀이 아닌 대학을 갈 수 있다는 걸 알게 되고는 욕심이 났다. 나는 공부가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때 운동선수들은 총 400점 만점의 수능점수에서 70점이상만 받으면 대학을 갈 수 있었다. 운동으로 증명한 성적은 수능성적 기본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남자 선수들 중에는 연대, 고대, 중대에 가서 운동을 하는 선수들이 꽤 되었다. 당시는 연고전 말만 들어도 유명할 때이니 당연했다. (서장훈 이상민 우지원 등이 대학 선수 시절이다)  여자인 나도 운동으로 대학을 갈 수 있었다. 그래서 희망을 품고 책장에 꽂혀있기만 해서 새책같은 교과서를 꺼내서 읽기 시작했다. 그냥 무작정 읽고 읽으면 머리에 박힐거란 생각에.  나중에 나는 수능 200점만 받자. 그런 생각에. 


중 2쯤 되었을때 여자 농구 대학팀이 사라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럼 내가 계속 운동해도 여자 대학 팀엔 갈 수 없다는 소리와 같았다. 바로 실업팀이나 프로팀 입단만 가능하다는 이야기 인가? 사실 나는 중학생때 대학을 입학하면 운동을 그만둘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대학팀이 없어진다는 소리에 대학을 못가면 운동을 할 필요도 없다 싶었다. 운동에 대한 관심이 뚝 떨어진 것이다. 아버지가 어릴때부터 대학은 꼭 가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셔서 그랬는지 대학을 욕심부렸다. 


다양한 사건을 겪고 나는 운동을 그만두고 실업계 고등학교로 갔다. 공부가 어짜피 안된다면 시작부터 다시하자. 인문계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나는 실업계로 입학신청을 냈다.  주변에서는 인문계 고등학교 입학이 확정되었는데 왜 실업계로 바꾸냐는 말도 많았지만 아버지는 나의 결정을 응원해 주셨다. 입학하기 전까지 학교에서 내준 한자공부도 착실히하고 꽤 괜찮은 성적으로 입학했다. 


첫 중간고사 성적이 50등안에 들었던 것 같다. 선생님들의 기대가 조금 높아졌다. 그후 나는 학년에서 100등아래로 떨어진 적이 없다. 기억하는 최고 성적은 전교 23등. 수학 12점 16점 받던 나는 1학년 2학기부터 수학성적도 꽤 좋아져 85점 밑으로 떨어져 본 적도 없다. 그냥 해야하는 공부를 했을 뿐이다. 그리고 대학을 가야한다는 아버지 말에는 조금 주춤하기는 했다. 


공부를 하다보니 공부가 다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당시 실업계는 대학 진학과 취업으로 학생들의 길이 나눠져 있었는데, 친한 친구중 취업을 희망하는 친구의 생각을 들어보니 일리가 있었다. 그 친구는 농협으로 취업을 나갔는데 꽤 괜찮은 자리를 추천받고 일찍이 출퇴근을 하며 종종 학교에 인사를 하러 왔다. 나는 그 친구의 모습이 좋아보였다. 대학을 가지 않아도 농협에 취업할 수 있다는 점이 부러웠다. 나도 그럴까 싶어 말씀드렸지만 아버지는 '대학'을 강조하셨다. 


당시의 나는 수학과 아니면 큰 관심이 없었는데. 맘에드는 수학과는 인문계 친구들이 다 원서를 쓸 예정이라 라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영어가 특히 성적이 바닥이었다. 그런 내가 인서울 대학은 더 힘들어서 대학을 포기하고 농협취업을 말해보았지만 아버지에게는 '대학'만이 코앞에 이었기에 더이상 주장하지 못했다. 나는 당시 취득해놓은 자격증으로 전문대학에 그냥 입학해다. 집에서 15분 거리라 아버지도 꽤 만족해 하셨고 4년제는 아니지만 나의 취업에 대한 희망 - 아버지의 대학입학에 대한 희망의 절충안이었다. 


그렇게 계속 나는 공부에 대한 끈을 놓지 않고 꾸준히 내가 보이는 길에서 해나갔던 것 같다. 그 습관이 40세까지 이어져 지금도 시간이 나면 공부를 한다. 요즘은 돈공부를 많이한다. 더 어릴때 돈공부를 했다면 어땟을까? 하는 생각이 만이 든다. 그래서 나의 아이에게는 돈공부를 먼저 시켰다. 돈으로 간식을 사먹을 수 있고, 돈이 많이 모이면 집을 사고, 돈이 있어야 이 사회에서 누릴 수 있는게 많다. 돈은 어떻게 버는 것인지 아이 아빠가 왜 회사에 출근을 해야하는지도 알려준다. 그리고 동전은 저금통에 넣고, 나중에 더 큰 돈이 되며 은행이나 주식에 투자한다는 것도 알려주었다. 아직 이해를 다 못하는 6세 이지만, 그래도 또래보다 확실히 돈에 대한 관념은 조금 생긴 듯하다. 


공부를 꾸준히 해야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매일매일이 다른 삶이고 새로운 삶이기 때문이다. 반복해야 할 일이 있고 새롭게 계속 시작해야 하는 일이 있다. 공부가 그러다. 돈 공부도 공부. 인생 공부도 공부다. 관계에 대해서도 공부가 필요하고, 육아를 시작하니 또 육아공부도 해야한다. 아이가 말을 시작하니 말공부, 아이의 심리가 궁금하니 심리공부를 한다. 아이가 공부를 시작하니 또 엄마도 함께 공부를 시자했다. 그렇게 새로운 스터디 내용들이 추가되고 또 추가된다. 



작가의 이전글 깡촌 출신 남자의 49평 아파트 구입 5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