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버지 이야기
아버지가 친구의 항만 사업에 처음 투자할 때는 돈이 없어서 매일매일 벌어서 돈을 모으셨다. 투자할 돈을 마련한다고 하니 절로 신이 났다. 이 고생은 곧 수익이 날 상황을 상상하면 수고도 아니라 생각되었다. 그렇게 고철일이 끝나면 다른 일을 찾아다니며 일을 더 하고, 새로운 거래처도 알아볼 겸 공장지대를 다니며 인사를 했다.
본인의 거래처가 아니라고 해도, 나중에 기회를 달라며 어떤 공장의 컨테이너 숙소를 재료비만 받고 바로 만들어 주고 오기도 하고, 오래된 컨테이너 숙소를 수리하는 일도 도맡아 했다.
그는 몸 하나면 못할 것이 없다며 노력하는 사람이라, 점점 주변에서 사람이 참 좋다며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비록 고철일이고 아직 지원도 제대로 쓸 수가 없었지만, 사장, 사장님 소리를 들으니 힘이 났다.
깡촌에서 시작한 자신이 이제는 사장님 소리 들으며 집에 생활비로 300만 원을 내고, 버젓이 아파트도 한채 있다니, 정말 신이 났다. 비록 일하는 공장 근처 3개 단지밖에 없는 작은 아파트에, 이름도 유명하지 않았지만 그전에 양산에서 살았던 마구간, 소외양간, 창고를 고친 집 등을 생각하면 성공이나 다름없었다.
21평의 아파트는 방이 2개에 거실에도 문이 있어서 손님이 오시거나 할 땐 거실의 문을 닫아 3개의 방이 되는 집이었다. 집 베란다에서는 공장지대와 멀리 바다가 보였는데, 바로 아래로 눈을 두지만 않으면 경치도 제법 좋았다. 특히 밤에는 차도 잘 다니지 않고 멀리 반짝이는 빛을 보면 정말 멋진 풍경이었다. 이보다 더 좋을 수 있을까.
퇴근하고 집 베란다에서 담배 하나를 피며 바라보는 풍경이 좋았다. 모두가 잠든 시간에 담배를 피우려고 하니 아파트는 위아래층에서 담배냄새가 난다는 얘길 종종 들어서.. 베란다 창문을 모두 닫고 펴야 했다. 그러면 딸이 나와서 담배냄새가 난다며 문을 닫았다. 베란다에 갇힌 듯 담배를 피우며 밖을 내다봤다. 그래도 좋았다.
나는 자주 내 아버지, 그의 얘기들을 귀담아들으며 생각을 했는데.. 꼭 이 사람의 이야기를 글로 남겨서 영원히 살아있게 하고 싶었다. 어려운 현실을 극복하고 긍정적으로 살아온 이 사람은 오늘도 외롭구나 느꼈기 때문이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예쁜 딸들이 아빠를 사랑해도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가 보였다.
그건 그의 마음속에 늘 그리운 어머니의 사랑이었다. 그래서 그는 나의 어머니와 결혼했는지도 모른다. 늘 밝고 가족끼리 화목하고, 3살이나 많은 우리 엄마를. 나는 아버지가 키도 크고 덩치도 좋고 근육질 몸매에 군살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라 참 멋있다 생각했다. 하루는 우리 집 아파트 소파에서 앉아있는데, 아버지가 서있는 모습을 자세히 보게 되었다. 아버지는 늘 긴 운동복 바지에 겨드랑이가 보일 정도로 파인 하얀 내복을 입으셨는데, 바지는 길고 상의는 배만 가린 것 같은 느낌이라 웃겼다.
그런 아버지의 뒷모습은 아직도 건장했고 멋있었다. 내 아버지 같은 사람을 만나야겠다고 생각하다가 입 밖으로 말이 나왔다. "엄마 남자는 다 아빠 같아? 아빠 어깨가 역삼각형이야" 그러자 옆에 앉아 드라마를 보시던 어머니가 얘길 했다. "아니 아빠가 좀 등발이 좋긴 하지. 근데 허벅지는 진짜 무시무시해. 뭐 아빠 같은 사람 만나면 힘들일은 없지. 무거운 건 다 알아서 들어주고 해 주고. " 엄마는 웬일로 무심한 듯하면서도 아빠 칭창을 했다.
"아빠, 아빠는 언제부터 근육이 생겼어? 나는 운동할 때 진짜 무거운 거 들어야 겨우 생기던데"
"아빠는 초등학생 때부터 막걸리 주전자를 들고, 심부름도 하고, 멀리 1~2킬로씩 걸어서 학교 가고.. 시골 살면 매일이 운동이지. 쉴 틈이 없지."
"와. 근데 아빠 정말 뒷모습 보면 역삼각형 멋있다~ 어제 드라마 봤는데 주인공 남자가 그런 거 멋있다고 채팅에서 친구들이 얘기하던데, 그런 사람이 우리 아빠네~ 멀리서 찾을 필요 없네~"
내 한마디에 부모님은 웃으셨다. 아버지는 내가 능력이 되면 아빠 같은 사람은 많다고 더 좋은 사람을 만나야 한다고 방으로 들어가셨다. 엄마도 몸은 만들 수 있지만 인성이나 성격은 타고나고 노력해야 가능한 거라서 그런 사람을 고르라고 했다. 그날은 정말 평온하면서 행복한 대화가 오고 간 날이었다.
나의 아버지는 무척 예민한 사람이다. 나도 그 성격을 타고났다. 그리고 내 동생도 그 성격을 타고났다. 우리 집에서 천하태평 대충대충 기분좋은대로 사는 사람은 우리 엄마 한분이었다. 예민한 세 사람을 데리고 살려고 하니 힘들 수밖에. 특히나 예민한 아버지랑 결혼하고 4개월 만에 내가 태어났다. 심지어 내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같이 맹장이 터져 수술을 해서. 함께 누워있어야 했다고 했다. 엄마는 자연분만, 아버지는 맹장수술을 하셨는데 그낭 놓고 보면 맹장수술을 한 사람의 회복이 느리다. 자연분만은 그래도 3일째부터 걷기가 가능하다. 맹장수술은 일주일은 지나야 걸을 수 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어머니가 걱정되고 태어난 아기가 궁금해서 3일째에 신생아실에 나를 보러 갔다고 한다. 너무 궁금하고 첫아기라 신기했다고 한다. 그래서 쭈굴쭈굴 불어난 아기가 아직 예쁘지 않을 텐데도 너무나 예쁘고 귀여웠다했다. 반면 엄마는 내가 태어나자마자 예쁜 아기가 시커멓고 길어서 신기했다고 한다. 나를 안아 든 간호사도 "무슨 애기가 이렇게 다리가 길어~" 하며 놀랐다고 한다. 내가 롱다리는 아니지만 태어날 때 다른 아기들에 비해 다리가 길었나 보다. 그래서 어머니는 예쁘고 다리긴 아기가 좋았다.
첫아기를 키우는데 너무 순하고 조용해서 어머니는 좋았다고 했다. 아이가 깨서 혼자 발가락 만지고 놀고 있으면 어머니는 뜨개질도 하고 집안 살림도 하고 그렇게 하루를 보냈다고 한다. 잘 울지도 않았고, 방긋방긋 잘 웃어서 신기했다고 한다. 주변에서 거저 키우는 아이라며 부러워했다. 조금 더 컸을 때는 아이가 잠들길래 재운채로 어머니는 집 근처 목욕탕을 1시간 다녀오신 적도 있다고 했다. 혼자서 집에서 잘 자고 있을 테니, 어머니는 오랜만에 목욕탕에 가신 것이다. 당시는 집이 무척 어려워서 남의 집 셋방살이를 할 때였는데, 당연히 씻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매일 눈곱을 떼는 세수와 양치 정도가 다여서, 어머니는 1~2주에 한 번씩 목욕탕을 가셨다.
내가 태어나고는 어려서 목욕이 힘들어지자 아버지가 나를 볼땜나 다녀오셨는데. 어느 정도 크고 낮잠을 1시간 이상 잘 타이밍에 종종 목욕탕을 다녀오셨다고 한다. 한번 잠들면 꿈쩍 않고 그대로 자는 아이라 가능했다고 한다. 지금은 이렇게 집에 아기를 두고 나오면 큰일 난다는 내 얘기에 놀라시면서 그땐 뭐 다 그러니깐 엄마도 그랬지. 라며 얘기하셨다.
그렇게 태어난 내가 아버지에겐 세상의 전부였다. 그 전부가 아빠 같은 남자를 만나 결혼하고 싶다고 얘기하니 그날 기분이 무척 좋았다고 하시면서, 그래도 아빠보다 나은 사람을 만나야 한다고 했다. 아버지는 늘 그랬다 나보다 잘나고 나은 사람이 많다. 아버지는 늘 노력할 뿐이다. 아직 이루지 못했다. 아빠가 고철일 하는 거 부끄럽지 않니? 친구들한테 말하기 부끄럽지? 하며 종종 물어보시며 떳떳하게 자랑하는 일을 갖고 싶어 하셨다.
그는 늘 그랬다. 자신의 자격지심. 스스로 가족들을 잘 먹여 살리고, 심지어 친인척들을 돌보기도 하면서도 부끄럽진 않을지, 창피하진 않을지 가족들을 걱정했다. 그렇게 살아온 어린 시절이라 커서도 버릴 수 없는 걱정. 그의 걱정은 늘 가득해서 행복하게 웃는 얼굴을 보기 어려웠다. 잠깐 웃다가 말았다. 계속 즐거울 수 없는 거다.
하루는 아버지가 자신도 이제 놀 자계 라는걸 들 거라고 하셨다. 고철 하시는 분들과 공장 하시는 마음 맞는 사장님들끼리 부부 놀 자계를 만들어, 이렇게 돈 벌어 그냥 세월을 보내지 말자며, 일 년에 한 번 가까운 곳으로 해외여행을 단체로 가자고 하신 것이다. 아버지는 그 계에 들어가셨다. 부부모임이라 어머니도 함께였다.
그 모임은 몇 년간 지속되었는데.. 점점 모임이 즐겁지 못했다. 술자리를 가지면 아버지가 취해서 하시는 말들이 문제였다. 간혹 상대방을 놀리는 듯한 과한 말투. 어머니도 지지 않았다. 아버지가 자재를 못한다며 속상해서 하는 말들이 아버지를 더 기분 나쁘게 만들었다. 힘들게 살아온 두 분은 서로 보듬기에는 마음이 너무 아프고 어려웠기 때문이다.
나는 중학생 때부터 두 분의 싸움을 제대로 지켜보기 시작했는데... 싸움의 원인은 따로 있었지만 결국은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아빠로 인해 고생한 엄마와 엄마를 위해 노력했는데 알아주지 않는 엄마가 야속한 아빠. 이 두 분의 오래된 상처 받은 마음이 문제였다. 엄마는 아빠의 노력은 보이지 않았다. 본인이 당장 힘들어 나를 고생시키는 존재라 생각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또 엄마에게서 사랑을 느끼고 싶었는데 어머니는 그렇지 않았다. 그냥 의무만 다하면서 늘 자신을 가르치려 들고 밑으로 생각해서 기분이 나쁘다는 것이다.
늘 끝나지 않는 싸움. 이 두 분의 싸움은 드라마에서 보는 부부상담을 받으면 끝이려나? 생각을 하고 말씀드려 본 적이 있지만, 두 분은 미치지 않았다며 병원으로 가지 않았다.
이 싸움은 아파트를 사고 더 커졌다. 그리고 그렇게 서로 외면하며 싸움이 종종 일어나도 금방 아무 일 없듯이 다음날에 얘길 했다. 나는 두 분의 그런 모습이 신기해서 싸우고 나서도 다음 날 아무렇지 않게 얘기하는 두 분은 그냥 스트레스를 서로 푸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내 동생은 어떻게 싸우고 나서 다음날 아무렇지 않게 대화할 수 있냐고 신기해했다. 내 동생은 그랬다. 세상 예민하면서 둔한 아이. 자신이 받아들이는 것은 예민하고 상대방에겐 둔감한 아이. 그래서 부모님의 진짜 싸움의 이유도 몰랐고. 자신 몰래 몇 년을 싸워오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 단지 그날의 한번 싸움으로 끝이라 생각했다.
나는 부모님의 장기전인 싸움을 알았다. 동생은 아파트에서 한번 싸운 것이라 생각했고, 아버지가 기념일마다 꽃다발을 대령하듯 사 오시니 그게 우리 집이라고 착각을 했다.
세 가족의 거짓말. 유일하게 행복하게 지켜주고 싶은 아이. 그래서 우리는 동생이 가장 해맑게 웃으면 그게 좋았다. 이 아이의 웃음에 우리는 너무 행복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기분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사람은 우리 가족 중에 이 아이 한 명뿐이었다.
먹고살 걱정이 사라지자 아버지는 다른 걱정이 생겼다. 더 잘살고 싶고 하고 싶은 걸 다 해주고 싶다는 생각. 대학에 들어간 나는 적당한 돈에 학교를 다니고 있었지만, 동생은 왠지 공부를 더 시켜서 서울에 있는 대학에 보내고 싶어 하셨다. 고등학교를 민족사관에 넣고 싶어 하셨지만 동생이 그 정도는 아니었다. 학비도 만만치 않았다.
인문계 고등학교를 간 동생은 아침 일찍 등교해서 잠들 때쯤 학원에서 집으로 도착했다. 집에 거의 없는 동생과 달리 대학생이던 나는 9시쯤이면 집에서 나가 4시 전에 집에 들어와 있었다. 친구들이 놀러 다니는 곳은 우리 집으르 지나는 버스를 타야 했는데, 나는 우리 집을 지나서 놀러 가는 것이 귀찮게 느껴졌다. 그래서 종종 친구들과 버스를 탔다가 우리 집에서 내리곤 했다. 단짝 친구가 생기기 전까지는 바로 집으로 오는 것이 좋았다.
아버지가 이상하게 보시고는 종종 쓰는 주차장에 주차된 승용차 키를 주셨다. 내가 운전면허를 따면 줄려고 했는데 1학기 내내 버스 타고 집으로 오는 내가 이상했던 모양이다. 차로 여기저기 다니면서 세상을 배우길 원하셨다. 나는 갈 곳이 마땅하지 않아 단짝 친구가 사는 동네에 무작정 가보았다. 친구에게 전화할까 하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친구들 눈에는 잘 사는 집으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대학 1학년이 승용차를 몰고 다니다니. 그런데 사실 기름값도 아버지 사업자로 주유하기에 혜택을 받는 것이 있었고. 연비가 15km 넘는 차라 버스비용과 비교하면 비슷했다. 당시 내 버스비는 일반버스가 학교로 가지 않아서 1100원 1200원을 내고 타야 했는데. 이 돈은 지금 서울의 일반 버스 비용과 비슷하다. 비싼 버스 타고 다니느면서 시간도 버린다고 아까워하신 아버지의 선택이었다.
대신 남는 시간 책도 읽고 아버지가 못한 공부를 하라는 것이 조건. 자신은 비록 고철일을 하고 폐차 직전의 트럭을 몰고 다니며 손톱에 쇠가루와 절삭유가 끼어 있어서 묘한 쇠 냄새가 나지만, 딸은 승용차 몰고 대학교 다니게 하셨던 분이 우리 아버지다.
그런 그에게 항만 사업의 투자는 새로운 길이었다. 이제 양복 입고 검은 승용차 몰며 사장님 소리 들을 수 있는 날이 시작된 것이다. 그래서 늘 신이 났다. 몇 개월에 걸쳐 투자한 돈이 1억이 넘었는데, 사업이 잠깐 잘 안돼서 이대로 스톱을 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래도 투자하신 분들이 있기 때문에 절대 진행하지 않는 일은 없으니 돈을 마련해 두라는 연락을 받았다.
아버지는 조금 아쉬웠지만 큰 손들이 투자한 항만사업이 절대 무너질 일 없다며 돈을 부지런히 벌어 두셨다. 그러다가 몇 달 후 조금 돈을 빌릴 수 있겠냐는 친구의 연락을 받았다. 항만사업이 생각보다 미뤄져서 투자를 요청한 친구의 살림이 어렵다는 것이다. 이 친구는 항만사업에만 집중하다 보니 스톱된 사업에 생활비가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돈을 빌리려는 것이다. 두석 달 쓸 생활비면 된다고 했나 보다.
아버지는 항만사업에 추가 투자를 기대하고 모은 돈을 빌려주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자 점점 항만사업에 대한 얘기는 없고 돈을 계속 빌려달라는 친구의 얘기만 있었다. 하루는 시간을 내어 친구를 만나러 갔다. 친구와 오랜 얘기를 했는데.. 항만사업은 잠시가 아니고 완전 스톱이 되었으며, 아버지가 투자한 돈은 항만사업에 투자를 한 적도 없다고 한다. 이 친구가 다 써버린 것이다. 아파트를 구입하고 차를 사고 자신의 아이들에게 쓴 것이다. 아버지는 너무 허망했다. 차라리 그 돈 우리 아이들에게 섰다면.. 그런 생각이 들어서 너무 속상했다.
친구에게 직장을 구해 그 돈을 갚겠다는 확답을 받고 헤어졌다. 1억이 넘는 돈이었다. 차라리 그 돈 아파트 구입 대출금을 다 갚았다면 지금 빚은 없다. 사업자금으로 빌린 돈도 어느 정도 갚을 수 있었다. 큰 수익을 기대하며 투자한 돈이 그렇게 허망하게 쓰였다니.. 친구의 정이 있어 미워할 순 없지만 바보 같은 자신에게 속상해했다. 끊었던 담배도 다시 피기 시작했고, 줄었던 술도 다시 마시기 시작했다.
무언가 다른 방법이 보이지 않았고, 항만사업도 중도 종료가 되었고, 즐겁던 고철일도 즐겁지 못했다.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서 벌어야 하고 갚아야 했다. 똑같이 일을 하고 있지만 똑같은 기분이 아니었다.
하루는 일을 쉬고 늦게까지 집에서 고민을 했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 그러다 고철장을 하면 좀 더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얘기에 고철을 모아두는 땅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은행에 대출도 문의하고 땅의 가격도 주인에게 조금 깎아 줄 수 있는지 물었다. 또 공장을 운영하는 친구에게 공장 부지의 한쪽 켠을 빌려줄 수 있는지도 물었다. 고철장 사장님에게 고철장 운영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물어보았다.
그는 1억이라는 손실을 메워야 했다. 우리 가족이 더 행복할 수 있었던 기회를 허망한 꿈에 투자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주식공부를 더해보려고 했지만 자금이 마땅치 않으니 집중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주식을 할 성격도 되지 못해서 투자한 주식이 떨어지면 빼고, 이미 많이 오른 종목에 돈을 다 잃어서 주식은 늘 마이너스였다. 원금도 못 건졌다.
매일매일이 힘들지만 매일매일 살아가야 했다. 어머니는 처음 이 사실을 몰랐다가 아버지의 행동이 이상해서 여쭤보고 듣게 되었다 한다. 1억이라는 큰돈이 갔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차라리 그 돈을 자신을 주지 그랬냐며 속상해하셨다.
당시 은행 이율이 괜찮을 때여서 어머니는 농협에 돈을 모으고 계셨는데. 아파트 이사 오고 10만 원씩 모은 첫 적금통장이 만기 되었을 때를 120만 원이라는 돈이 찍힌 통장이 생에 첫 만기 통장이라고 하셨다. 그때 기분이 너무 좋아서 그대로 그 돈을 예금으로 넣고, 다시 10만 원짜리 적금을 시작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생활비를 아껴 다시 10만 원이 되면 다른 적금통장을 만들어 시작하다 보니 월 100만 원씩 적금을 하고 있는 자신이 신기했다고 하셨다. 나는 21평 아파트에서 2년을 살다가 독립해 서울로 이사를 왔는데, 어머니는 내가 독립하고 스스로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용돈도 줄 일이 없어지니 생활비가 그만큼 줄었다고 했다. 또 동생도 학교에서 거의 대부분을 해결하고 해지면 집에 오니 집에서 밥할 일도 거의 없었다고 했다. 아버지도 새벽일을 하시고 잠시 집에 들르실 때 아니고서는 집에서 식사하시는 일이 드물었다.
어머니는 살림에 나가는 돈이 거의 없으니 그만큼 모을 주었다는 얘길 하며, 아버지가 그 1억을 엄마를 주었다면 엄마는 꽤 괜찮게 모았을 거라며 아까워하셨다.
어머니가 모은 비상금은 나중에 5년쯤 지나 아버지가 49평 아파트를 사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당시 7천500만 원짜리 아파트에 4천만 원 대출을 끼고 살던 우리가 4억이 넘는 아파트를 계약하는데 쓰였다. 아버지도 1억이라는 큰돈이 다른데 쓰인 것을 알고 차라리 집이라도 좋은데 살고 싶다고 하셨다.
그 1억을 큰집을 사는데 쓴 친구는 아버지보다 좋은 집에 좋은 검은 승용차를 타고 아이들은 학원도 여러 군데 다니는 걸 확인하고는 속에서 분노가 치밀었다고 한다. 내 아이들은 못 먹고 아끼며 키우고 겨우 이제 아파트 21평에 살고 있는데, 그 돈을 가져간 친구는 너무 떵떵거리며 잘 살았던 것이다.
아버지는 분노했고, 집으로 와서 꼭 더 좋은 집을 사겠다고 다짐했다. 그 친구보다 좋은 집 좋은 차를 사겠다고. 그렇게 아버지는 돈을 준비하며 늘 얘기만 있던 아파트가 곧 분양한다는 소식을 듣고 분양받을 준비를 했다. 그런데 서울에서 너무 많은 사람들이 분양에 뛰어들어 아버지는 신청도 못하고 분양이 끝나버렸다.
아버지는 너무 허망했다. 돈 있는 사람들이 더 한다고.. 너무 속상해했다. 직접 살 것도 아니면서 분양받아 우리 같은 사람에게 팔려고 한다며 속상해했다.
아버지는 분양을 준비하며 부동산 시장을 제대로 파악했다. 그리고 현실을 파악했다. 돈이 없으면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는 것을. 이제 먹고살만해지니 그걸 또 가져가는 주변 사람들에 이젠 한숨이 나왔다.
그래도 아버지는 이사 가고 싶은 집의 모델하우스를 한번 구경하고 싶었다. 서울의 잘 사는 사람들이 그렇게 투자하고 싶어 했던 아파트가 궁금했다. 분양이 끝나고 분양하우스를 방문해 구경하다가 49평 모델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지금 집의 딱 2배가 조금 넘는 사이즈였다. 21평 아파트의 부엌과 거실을 합친 크기보다 안방이 더 컸다. 옷방도 따로 있어서 옷장이 필요 없었다. 화장실은 우리 집 부엌만큼 컸다.
49평만이라도 분양받았으면 얼만 좋을까. 하며 분양 담당자에게 찾아가 가격이라도 궁금해서 물어본다며 질문을 했는데. 분양을 포기한 사람이 있어서 물량이 남아있다는 답변을 들었다.
아버지의 호기심이 기회를 만든 순간이었다.
깡촌 출신 남자의 49평 아파트 구입 5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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