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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우투 May 30. 2022

새벽에 스쳐지나간 아빠의 기억

아버지의 죽음과 그 후


나의 아버지는 간암 - 위암 합병으로 돌아가셨다. 오랜시간 가난하고 힘든 삶을 사시다가 겨우 밥은 먹고 삽니다... 정도 되었더니 암 말기였다. 6개월의 남은 시간을 두고 부모님은 한두달간은 자식들에게 비밀로 하셨는데.. 눈치 빠른 내가 "엄마랑 아빠 이상해. 무슨 일 있어?"라고 물어보자.. 잠시 출근한 아빠, 친구를 만나러 나간 동생으로 단 둘이 남자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암이고. 6개월이 남았고. 간과 위가 동시에 발견되었고. 아빠가 말하지 말라는데 엄마가 혼자 너무 힘들었다. 여행이 예정되어 있어서 더욱 알리지 못했다. 그런 말들이었다.



나는 사실 여행기간동안 엄마랑 아빠의 행동이 너무 이상해서 눈치를 채고 마음의 준비를 했던 것 같다. 외할머니를 극진히 모시던 아버지가 외할머니와 다른 방에서 주무시고, 수시 때때로 엄마가 아버지의 약을 챙겼으며, 외할머니 힘드실까 엎고 다니시던 아버지가 할머니를 위해 어르신용 유모차 같은걸 준비해두셨기 때문이다. 또 눈빛에서 그 강인하고 자신만만한 모습도 이미 많이 사라져보였다. 자기 주장 강하고 자신만만 유아독전 같은 느낌은 없고, 힘이 쭉 빠진 아버지의 모습에서 여행기간 내내 무슨 일이 있을 거라는걸 짐작한 듯 하다.


여행기간 동안 보통의 아버지는 맘대로 대형을 이탈해서 궁금한걸 다 해소하고 읽고 체험하고 경험하던 분이었는데, 그때의 마지막 여행은 그러지 않으셨다. 방에서 항상 쉬시고, 엄마랑 동생이랑 외할머니 모시고 온천을 다녀오게 하고.. 그렇게 외할머니가 살아생전 가보고 싶어하셨던 일본을 데려가셨던 아버지. 그 아버지가 한참이나 이상해 보이던 차에,,, 해맑게 웃으시면서 일본 활화산 구경을 하시더니 내리막길은 완만하니 걸어가고 싶다며 외할머니랑 다같이 차를 타고 내려가라고 하셨다. 나는 왜인지 아버지를 혼자 걷게 할 수 없어 그날 같이 걸었다.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길, 일본의 활화산 산을 걸어내려오며 아버지랑 서로 사진을 찍어주었다. 그리고 웃었다. 우리 정말 오랫만에 산행 하는거 아니냐며 서로 웃고, 비가 오자 웃고, 활화산 비는 처음이자 마지막일거라며 언제 이런 경험을 하겠냐며 아버지는 또 웃었다. 그 마지막의 의미를 그때는 몰랐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알게 된 것. 아버지의 마주보고 찍는 사진이 마지막이었다는 것도 그날이라는 걸 나중에서야 알았다. 그렇게 아버지는 천천히 암과 치료에 전념하며 다른 사람이 되어갔다.


오늘 새벽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내내 힘들어하시다가 나랑 산을 걸어내려오며 그렇게 좋아하셨을까...? 혼자 걸어내려오실 아버지가 너무 신경쓰여 아버지랑 걸어내려온 나는 그때 무슨 생각이었을까.. 아버지를 혼자두면 안된다. 혼자 외롭게 걸어내려오게 해서는 안된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던 나는 무얼 느꼈던 걸까. 여행이 끝나고 집에 도착해서는 외할머니를 마산에서 안동으로 모셔다 드렸다. 그리고 다시 마산에 도착해서야 아버지가 일을 나가고, 동생이 외출을 하고서야 엄마에게 물었다. "무슨 일 있어? 엄마랑 아빠 보통이랑 달라"


갑자기 그 말에 눈부터 붉어진 어머니. "유리야.." 그냥 내 이름부터 부르실 뿐이었다. 그때 바로 알아차린 것 같다. '아빠 아프구나' 내 느낌이, 예측이 맞아 떨어진 것이 너무 속상했다. 그런 일은 생애 처음이라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무슨 말을 엄마에게 해야할지 몰랐다. 엄마가 하는 말을 하나하나 듣고 있을 뿐이었다. 마지막 엄마의 말은 "동생은 들으면 놀라고 어찌할 지 모르니 한동안은 비밀로 하자." 그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바짝 들었다. 6개월이 남았다는데, 비밀로 하자니. 그럴수는 없었다. "되도록 빨리 말해. 혼자만 모르고 있다고 느끼면 그게 더 큰 문제야."


나는 내가 동생에게 말할 입장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아직 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한채 바로 항암치료를 받고 약을 드시고 계셨던 중이고, 나도 내가 눈치채서 어머니께 듣게 되었으니까. 아무 준비도 눈치도 못챈 동생이 어떻게 받아 들일지 상상도 되지 않아서 그냥 부모님의 의견들 따를 뿐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동생이 알게 되었을때, 자신이 가장 늦게 알았다면서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렇게 우리가족은 아버지의 암 말기 5개월을 어떻게 보낼지 각자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다.


아버지는 암좌 하나를 구해 산속으로 들어가고 싶어하셨다. 어머니도 아버지가 그렇게 될 운명이라고 어떤 스님께 들은적이 있다며 아버지의 의견에 동의했다. 멀리 서울에서 직장 다니던 나는 부모님의 결정에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동생은 수시로 아버지께 찾아가기 시작했다. 동생도 같이 서울에 살고 있었지만 그간 아버지를 자주 찾아가지 못한 만큼 자주 찾아가려고 노려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냥 아무 생각이 없어졌다. 직장을 다니고, 돈을 벌면 통장에 그대로 넣어두고, 또 아르바이트를 알아봐서 돈을 벌고, 남는 시간은 잠을 잤다.


하루는 어머니께 다 그만두고 아버지 병간호로 내려간다고 하니, 어머니가 말렸다. 괜찮다고 아버지도 동의하지 않는다고 했다. 내 용돈에 생활비에 감당이 안될거라며 그런 소리를 했다고 한다. 마산에서 직장 어떻게 구하냐며 그것도 걱정하셨다. 10년을 혼자 벌어 먹고 산 내가 걱정이 된 부모님은 내가 내려가길 원치 않았다. 그러면서도 또 내려오길 바라셨다. 두분다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어 올바른 선택을 못하고 마음이 갈팡질팡 하는 느낌이었다.


나는 통장에 돈을 차곡차곡 쌓아서 2000만원이 만들었다. 4개월만의 일이었다.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돈을 모았다. 그리고 다시 어머니께 전화를 했다. "내려갈께. 돈 안줘도 되고, 내가 알아서 내돈 쓰면 되니깐. 갈께." 그렇게 짐을 싸는 동안 동생이 자길 버리고 간다며 난리가 났다. 몇일전 크게 둘이 싸운 적도 있다. 술을 먹고 정신을 못차리는 동생이 너무 속상했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당장 돈을 들고 마산에 가서 아버지를 간호하고 싶은데, 동생도 어머니만큼 많이 무너져 있었다. 너라도 정신차리라고 성인이되어 같이 산 이후 처음으로 화를 냈다.


"차라리 소리지르고 화내고 정신차려! 나도 이제 못참겠어!" 그렇게 마지막 한마디를 질렀는데.. 동생은 그 말에 상처를 받았다. 갑자기 어머니께 전화를 하더니 서울에서는 못살겠다며 마산을 내려간다고 짐을 싸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전화가 와서 동생이 내려와야 할것 같으니 나에겐 서울에 있으라고 하셨다. 동생은 다음날 직장에 사표를 쓰고, 마산으로 내려갈 준비를 일주일동안 하고는 일주일동안 말없이 자기 짐을 챙기고 버리고 남기고 그렇게 마산으로 떠났다. 조용히 그 집엔 나만 남겨졌다.


2주차 채 되지 않아서 어머니 전화가 왔다. 동생으로 안되겠으니 내가 왔으면 좋겠다는 말이었다. 다음날 바로 짐을 싸고 마산으로 내려갔다. 아버지는 많이 마르셨고,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셨다. 나는 당장에 휠체어를 알아보고 보건소에서 대여 해 왔다. 식사시간에 아버지는 밥 먹고 나면 화장실에서 피똥을 싼다고 걱정하셨다. 나는 눈물을 꾹 참고 "나쁜거 암덩어리 다 빠지나 보다. 아빠 배부르게 먹고 어서 건강해지자~" 하고 말했다. 아버지는 많이는 못 먹겠다며 적당히 드시고는 또 화장실을 가야겠다며 자리를 일어나셨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 일주일을 나와 보내셨다. 엄마랑 동생보다는 나와 못보낸 시간이 아쉬운듯 차를 타고 멀리 나갔다 오기도 하고, 화장실을 가고 싶으면 내가 휠체어를 내려 화장실까지 모셔다 드리기도 했다. 그간 휠체어 탈 생각을 못했다며 내가 이거 하나는 잘 생각해냈다고 칭찬해주시는 것이 기쁘지 않을 정도로 우리는 이미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다. 돌아가시기 3일전 아버지 친척들이 갑자기 집으로 찾아왔다. 아버지를 만나야 한다며 급 찾아오신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한마디 하셨다고 한다. "바보들.. 이제 오다니.."


자신의 속마음은 꽁꽁 숨긴채 가족들을 위해 살아온 아버지가 보고싶은 마음을 겨우 표현하신 말이었다. 그날 아버지는 내게 마을을 썰어오라고 하셨는데.. 가로가 아니라 세로로 썰었다며 가장 큰 역정을 내셨다. 나는 그 화내는 모습이 아버지의 마지막 화내는 모습이라는걸 알았다. 괜히 너무 속상해서 아무말도 못하고 방에 들어가 펑펑 울었다. 아버지가 말기암이라는 소리를 듣고 울었던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다. 나는 6개월을 지나 1년 반을 견뎌온 아버지를 위해 그간 울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는 참던 눈물을 그날 다 쏟았다.


그리고는 웃으면서 아버지에게 짐을 더 싸서 내려올테니. 서울 집 완전히 정리하고 내려올테니 제발 건강히 3일만 기다려달라고 했다. 아버지는 "빨리와. 오래 못기다려" 라고 귀에 속삭이셨다. 아버지를 꼭 안고는.. "아니야. 일주일은 더 기다릴수있어. 제발 기다려." 하고 서울집에 도착했다. 그리고 편하게 울었다. 하루종일 울었던 것 같다. 그때 전화가 왔다. 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했다고. 빨리 내려오라고. 나는 다음날 아침 일찍 차 타고 가겠다며 끊었다. 몸 그대로 다시 마산에 가야겠다며 집을 정리하고 있는 와중에 다시 전화가 왔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삼일만 기다리라고 그렇게 말하고 갔는데.. 이틀만에 돌아가신 것이다. 마지막 아버지의 가시는 얼굴을 겨우 볼 수 있었다.어머니께서 내가 도착할때까지 입관식을 미뤄주셨다. 나는 이미 서울에서 다 울고 내려와서 나올 눈물도 없었다. 바짝 마른 아버지, 딱딱하고 차갑게 굳은 아버지의 몸을 연신 만지작 거리며 이틀 전과는 다른 아버지의 몸에 놀라서 왜 누워있냐고 속으로 계속 물어봤다. 이틀전에는 우리가 대화했는데.. 아버지는 대답없이 누워만 계셨다. 이제 아프지 말고 가고싶은데 맘껏 가고, 놀러다니라고. 그렇게 인사를 했다.


아들도 없는 집에 아버지 사업장의 직원이 아들로 이름을 올리고 상주를 했다. 우리집은 아들이 없어서 상주를 할 마땅한 사람이 없었다. 그가 아버지가 그렇게 원했다고 하니 우리는 그냥 그렇구나 하고 상주를 하는 것에 말리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냥 아버지 가시는 길에 큰 소리가 나오는게 싫었다. 그렇게 아버지가 가시고, 우리는 아버지가 종종 다니시던 절에서 아버지를 보내드렸다. 49일후 아버지를 보내드린 장소가 비로 인해 무너져 내려 싹 사라진걸 보고 내심 기뻤다. "여행 좋아하는 우리 아버지, 진짜 여행 가셨구나"


내가 모았던 2000만원은 아버지의 장례비로 사용되었다. 어머니도 동생도 모두 갑작스러운 아버지 죽음에 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나는 2000만원을 하루에 100만원씩 아버지를 드리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하고 아버지의 장례비로 사용되니 기분이 묘했다. 어머니는 나중에 돌려주시겠다고 했지만 그냥 2000만원이 모인 이유가 있었구나 싶었다. 800만원 가량 아버지 장례비로 사용하고 다시 장례가 끝나고 어머니가 주셨다. 통장엔 여전히 2000만원이 그대로 있었다. 아버지만 없었다.


절에 모신 아버지가 일주일후에 찾아왔을 때만해도 아직 그대로 있던 아버지가 49일후엔 빗물에 같이 무너져내린 땅과 함께 사라져 어디론가 가신 것이다. 절에 머무르지 않고 멀리 가신 것이 오히려 잘 되었다 싶었다. 바다나 강에 뿌려드리고 싶었는데, 스스로 물을 타고 내려가신 것이라 생각하고 싶었다. 6개월을 잘 이겨내고 1년반이나 살아계셨고. 중간에 실수로 감기에 걸리셔서 더이상 회복이 불가능 하셨지만, 가족들의 사랑과 관심과 간호로 나머지 여생을 보내셨고, 아버지는 "바보들 이제야"라는 말을 나, 동생, 엄마에게도 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어머니와 동생이 아버지 일을 정리하고 다시 시작할 수 있게 일주일 가량 돕고는 서울로 올라왔다. 매일 싸우는 동생과 어머니를 감당하기 어려웠던 것도 있고, 나도 이제 내 삶을 시작하며 조용히 살고 싶었다. 그러니깐 아버지가 계시던 마산의 집보다는 아버지가 딱 한번 오신 서울의 집이 차라리 나았다. 아버지의 빈자리가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좀더 자신의 옆에 있으면서 도와주길 원하셨지만, 어머니와 동생이 하는 일에 내가 할 일은 더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운전 외엔 내가 할 일은 없어서 동생과 어머니에게 운전도 해봐야 는다는 이야기를 하고 서울로 왔다. 운전부터가 아버지로부터 엄마와 동생이 시도해야할 독립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서울집의 남은 계약기간동안 새로이 직장을 구하고, 집주인과 집에 대한 조율을 하다가.. 그냥 그 집을 떠나기로 했다. 그리고 6개월후 이사를 했다. 나 혼자 살기에 딱 적당한 집으로. 어머니는 걱정이 된다며 잠시 이사한 서울 집에 오셨지만, 나는 지금 이 집이면 충분하다고 어머니를 설득했다. 어머니는 내가 살 집이니 더이상 말하지 않겠다며 포기하셨다. 우리는 그동안 아버지 이야기를 한번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다시 마산으로 내려가셨고, 나는 새 직장에서 부지런히 돈을 벌어 모으기 시작했다. 차비도 아깝다며 걸어다니다가, 남자친구가 집에 타지않는 자전거가 있다며 가져다 주었다. 어느날부터는 점심값도 아깝다며 주에 3번은 도시락을 싸기 시작했다. 나는 거의 모든 돈을 조용히 통장에 넣어두기 시작했다. 회사를 다닌지 2년차가되니 돈이 꽤 모였다. 200~230만원정도를 꾸준히 모아서 2년만에 5000만원이 조금 안되게 모았다. 아버지가 살아계실때 2000만원, 합치니 7000만원이 되었다. 그때 회사에서 일이 터지면서 강제 퇴사가 되었다.


타인의 실수로 나도 엮이면서 퇴사처리가 된 것인데, 여튼 결론적으로 나는 퇴직금에 위로금, 3개월의 월급까지 받으며 퇴사처리가 되었다. 1650만원의 돈이 통장에 들어오고 다시 백수가 되었다. 전세 5000만원, 통장에 7000만원, 퇴직금 1650만원. 이돈으로 사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1억 3천만원 정도 되는 돈에, 다시 취업이나 사업을 준비하며 실업수당을 신청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아프실때 나는 동화일러스트 학원을 5개월째 다니고 있었는데.. 학원을 다시 다니면서 사업이나 직장을 다닐 생각을 했다. 그리고 어머니는 결혼도 했으면 하셨다.


지금의 남편의 어머니. 그러니깐 내 시어머니는 그간 나에게 여러번 결혼 준비를 하자고 하셨는데.. 3년상 기간동안은 결혼을 미루고 그냥 이대로 살자고 몇번 말씀을 드리며 거절한 적이 많았다. 아버지가 사위라고 소개받고 가셨으니 결혼하면 이남자랑 해야하나?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시어머니의 적극적인 "결혼 일정"잡기에 아버지 돌아가시고 2년후에 결혼을 했다. 결혼할 것이라는 걸 계획잡고 친정에 내려가서 어머니랑 대화하다가 덥다며 늘 누워서 쉬던 안방 앞 복도에 잠이 들었는데, 그때 오랫만에 아버지 꿈을 꾸었다.


속엔 아무것도 안 입고 그 위에 노란 잠바를 입고, 바지는 늘 입으시던 걸 입고 나를 내려다 보며 웃고 계셨다. "엄마 이상해. " 하고 잠에 깨서는 아버지 이야기를 했더니 어머니가 한참 생각하시다가.. 아! 옷을 하나 더 안넣었다. 하며 빠드린 민소매 티를 하나더 챙겨 그주에 절에가서 태우셨다. 그리고 한참을 또 꿈에 안나오시던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꿈에 나오신 날은 내가 임신 조산기, 산전우울증으로 심하게 고생하고 출산한 그날 밤이었다. 멀리 언덕에서 똑같은 노란 잠바를 입고 손을 흔들면서 끄덕끄덕 하시던 아빠. 이제는 가야한다는 표정이었다. 옆엔 큰 낫을 든 저승사자 같은 검은 물채도 같이 서 있었다. 아버지 덕에 조산하지 않고 9개월 잘 버티고 출산했구나 싶어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꿈에서 우리는 인사를 마지막으로 만난적이 없다.


그때 태어난 아이가 벌써 7살이다. 여태 아이는 종종 꿈에서 어떤 시커멓고 작은 왕자님을 만나서 놀았다고 한다. 아이는 "꼬마 왕자님 이야, 나랑 잘 놀아줘. 아주 크게 변신하다가도 또 아주 작게 변신도 해. 신기해! 나랑 엄청 잘 놀아줘!" 라고 했다. 그 꼬마 왕자님이 궁금해서 생김새 행동 말투 이런걸 물어봤는데... 나의 아버지랑 비슷했다. 어느날은 양말을 벗고 발가락 사이에 원단 먼지를 빼내는 자세를 보고는 깜짝 놀라서 물어보니 "꼬마 왕자님이 이렇게 빼는 거래 ㅋㅋ" 라고 웃는 거다. 살아계실때 아버지가 퇴근하고 오시면 하던 행동인데.. 그걸 이 꼬마가 어떻게 알까.


우연이겠지, 그냥 핏줄이라 그럴 수도 있지. 싶으면서도 내심 꿈에서 손녀 보고싶어 오시는구나 웃기도 했다. 자주 밤에 잠을 못자고 있을때면 아이가 히죽히죽 웃을 때가 있는데, 그땐 꼬마 왕자님 만나서 놀러가는 날이다. 아침에도 꼬마왕자님이랑 놀았다며 꿈 얘기를 아주 장엄하게 해준다. 그 놀이가 너무 귀엽고 재미있어서 꿈얘기 듣는게 좋았는데,, 6살이 되었을때, 혹시 손녀 보겠다고 환생 못하시는 것 아니가 싶어. 자는 아이 이마를 어루만지며 "이쯤 돌봐주셨으면 됐어요. 이제 가셔도 괜찮아요. 가서 새로 태어나서 살고싶은대로 사세요. 제가 잘 돌볼께요."라는 말을 몇일 연속 햇던 것 같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아이는 꿈이 잘 기억나지 않는지 꿈 이야기도 줄어들었다.


그동안에 어머니랑 동생은 아버지를 한번도 꿈에서 만난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내가 가셔도 괜찮다 말을 한 후에 다른 사람들의 꿈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어머니 말에 따르면 보고싶은 가족들 꿈에 나타났다고 한다. 그전까진 손녀 보고싶고 돌봐줘야해서 계셨던건가? 싶어 믿진않아도 믿고싶어서 그렇게 생각하며 웃기도 했다. 아이가 하루는 "이제 꼬마 왕자님이 안온대. 그래서 내가 나랑 안놀아줘? 했더니 막 웃었어. 엄마랑 아빠한테 놀아달라고 하면 된대. 그래서 우리 인사했어~ 근데 진짜 그날부터 꿈에 안온다. 가끔 와도 되는데.. 그치?" 라는 말을 해주었다.


아이에게도 마지막 인사를 하고 가신듯 하다. 살아계셨다면 얼마나 예뻐하셨을지 잘 알기에.. 외할아버지 이야기를 하나씩 들려 주었다. 이런 일이 있었다. 저런 일이 있었다. 엄마는 이런 배려를 받았다. 할아버지는 다 참고 기다려주고 대답을 해주었다. 엄마도 그런 엄마가 되겠다. 약속도 함께 하면서 말이다. 힘들어도 힘들다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웃으면서 넘기던 외할아버지가 참 멋지다. 엄마가 이제 그게 보인다. 지원이 키워보니 외할아버지가 무슨 마음인지 알겠다. 그런 말도 해주면서.


어제 문득 나의 건강이나 외모보다. 더욱 아이를 챙기는 모습을 어디서 봤을까? 생각하다가 나의 부모. 특히 돌아가신 아버지의 모습에서 시작된 것이구나 싶어..아버지의 기억을 기록에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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