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우투 Dec 29. 2020

깡촌 출신 남자의 49평 아파트 구입 1

내 아버지, 이재봉 씨의 이야기 

나는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운동선수로 키우겠다는 꿈이 있으셨다. 그러나 나는 성격이 운동선수가 못되었다. 아버지는 체격적으로 타고난 운동신경을 두고 왜 열심히 하지 않는지 고민했고 나를 트레이닝시켰다. 새벽 4~5시에 함께 일어나 줄넘기나 배드민턴을 치시며 긍정마인드와 스포츠 선수로서 가져야 하는 생각들을 대화를 통해 심어주셨다. 


아버지는 본인이 부모님이나 집의 지원이 없어 성공할 수 없는 운동선수라고 여겼다. 그도 그럴 것이 할아버지는 도박과 술을 자주 드시고 폭력을 행사했다고 한다. 할머니는 할아버지 대신에 대가족을 책임져야 했다. 그런 아버지는 할머니를 도와 집안일도 하고 막걸리를 사 오라는 할아버지 성화에 막걸리를 사러 먼 읍내까지 나갔다 돌아와도 혼이 나곤 했다 한다. 


그런 깡촌 시골에서 자란 아버지라고 스스로 얘기했다. 그러면서 달리기도 잘했고, 배구선수도 했고 축구도 재미있어서 선수를 하고 싶었지만, 아버지는 할 수 없었다 한다. 너무 배가 고파서 제대로 뛸 수 없었고 학교 점심시간에 물을 떠 마셨다고 했다. 또 친구들이 우유를 먹기 싫어 어쩌지 하면 아버지가 다 달라고 하여 마셨다 한다. 아버지는 그 우유 한두 개도 정말 소중했으므로. 그렇게 우유를 몇 개 챙기면 집으로 걸어가기 전에 하나 더 마시고 우유통을 아버지가 직접 옮기겠다고 스스로 손을 들고 당번을 섰다고 했다. 친구들 중에는 주기도 싫지만 마시기도 싫어서 우유통에 넣는 친구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우유통을 놔두는 장소에 가면 운이 좋은 날 한두 개 더 찾을 수 있었다고 한다. 


나는 무슨 드라마에서 보거나 소설에서 나오는 얘기 같았는데, 아버지는 본인도 그런 경험이 있다고 했다. 어머니도 동생도 모르는 얘기. 아버지는 조금 창피하기도 해서 가족들에게도 얘기 못했다 한다. 그런 아버지에게도 꿈은 운동선수였는데. 결국 운동화 한 켤레 살 돈이 없어서 시합에 나갈 수 없었고. 학교도 그만두고 집안일 밭일 논일하며 늦둥이로 태어난 동생인 삼촌을 돌보라고 해서 아버지는 학교도 그만두었다고 했다. 


그만두기 전에 아버지는 동생을 등에 엎고 학교를 갔다가 돌아오기도 했단다. 우는 동생에게 우유를 주고, 자신은 물을 마시기도 했다고 한다. 드라마나 책에서 읽은 것 같다고 했더니 아마 그 시대에 시골에서 못 사는 집은 한 번쯤 다들 그런 경험이 있을 거라고 하셨다. 아버지는 특히 할아버지가 경제적으로 활동을 하지 않아서 더 가난한 집이었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큰집에서 작은집으로 입양 온 양자였는데.. 큰집의 지원이 끊기자 생활고에 할머니만 더 고생했다고 말했다. 돈을 받아 술을 마시고 도박으로 다 날리니.. 집에 돈이 없었다 했다. 


아버지는 삼촌이 걸어 다닐 만할 때쯤 돈을 벌겠다고 많은 일을 했다고 한다. 그중 가장 잘한 일이 어린 나이에 운전면허증을 딴 일이다. 그 후에 서울에서 한 회사의 사장님의 운전기사로 취업을 했고, 그곳에서 지금의 내 어머니를 만나게 되었다 했다. 운전기사인  아빠가 사장님의 처제인 엄마를 보고 한눈에 반했다고 한다.  이모부는 눈치를 채고는 엄마를 다시 안동 시골로 보내셨다. 이모부 파이팅!이라고 속으로 얘기했다. 우리 아빠가 너무 좋지만, 우리 아빠를 만나 고생한 엄마가 그때 당시도 안쓰러웠다. 아빠는 엄마가 안동으로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는 바로 운전기사를 그만두고 안동으로 출발했다고 한다. 


시골로 돈을 보내고 거의 돈을 모아두지 않아서, 안동까지 갈 차비도 없었다고 한다. 운전기사라 사장님의 차를 운전해 출퇴근하던 아빠가 일을 그만두니, 교통 자체가 막막해서. 일단 동서울 터미널에서 동해로 이동했다. 거기서 동해 도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고 한다. 얻어 탈 수 있는 차가 있으면 얻어 타고 그렇게 한 달이 좀 더 걸려 안동에 도착한 아버지는 시커먼 흑인처럼 피부가 그을려 안동에 왔다고 한다. 


안동 외가에서는 흑인과 흡사한 아버지 모습에 외국인이 어머니를 만나겠다고 마당에 드러누웠다고 생각했다. 온 동네에 소문이 났고, 외할머니는 몇 날 며칠 넉살 좋게 사람을 대하며 집에 갈 생각이 없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허락했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속상할 수 있으니 동네 조용히 두 분이 떠나가길 바라셨다고 한다. 


그 후 결혼을 허락받고 아버지랑 어머니는 결혼을 하셨다. 그 결혼식에 나도 참석했는데.. 어머니 뱃속에서 6개월 차였다고 한다. 태아의 상태로 나도 결혼식에 참석한 것이다. 


내가 태어날 즈음 아버지는 할아버지 같은 모습이었다고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그래서 결혼을 그만둘까 외가에 도망을 갈려고 생각도 하셨다고 한다. 그런 사람은 처음 만났다는 어머니는 충격이 심하셨다고 한다. 그런 어머니를 아버지는 전라남도 나주 시댁으로 보내셨고. 할머니는 그간의 스트레스가 고스란히 내 어머니에게 갔다고 했다. 할머니가 심한 소리도 많이 하고 혼을 냈지만, 어머니는 자신이 전혀 다른 경상북도 안동 출신이라 모르는 게 많아서 그렇다고 스스로 다독다독 하며 참으셨다고 한다. 


그리고 내가 태어날 때, 나는 엄마 아빠 두 분의 배가 모두 아파 태어났다. 어머니는 양수가 터졌고, 아버지는 맹장이 터졌다. 두 분이 왜 동시에 그렇게 경험을 하셨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얘기를 들을 때 눈물이 나면서도 너무 웃기다며 웃었다. 내가 초등학생일 때 들었던 이 출산 얘기가 너무 재미있고도 슬퍼서 울었는데. 아마도 할아버지와 다르지 않았던 아버지가 괘씸해서 하느님이 아버지에게 출산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느끼라며 아버지의 맹장을 터뜨리신 건 아닐까? 생각했다. 나는 양쪽 불교 집안에서 자라, 아버지가 교회 유치원과 주일 예배를 보내셨는데.. 그래서 하느님이라는 생각을 그때 했던 것 같다. 


여하튼 덕분에 나는 양쪽 부모님 모두 배 아파 태어난 아이가 되었고, 덕분에 소중한 아이가 되었다. 그래도 아버지는 한동안 할아버지와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어머니를 많이 속상하게 했다. 그러면서도 나를 데리고 여기저기 놀러 다니시기를 많이 했다. 그동안 어머니는 쉴 수 있었다.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산과 들 바다 전국을 돌며 놀러 다니셨다. 22세 23세에 어머니랑 결혼한 아버지는 충분히 그럴 만도 하다 생각했다. 


사실 어머니가 26세에 내가 태어났고, 아버지는 당시 4살 차이가 나는 22세였다. 내가 3살이 되었어도 아버지는 아직 25살의 내가 태어난 해의 어머니보다 1살이나 어린 연하였다. 철이 안 든 것이다. 그렇다고 나를 어머니에게 맡기기만 하고 혼자 노신 것은 아니라,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내가 걷기 시작하자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다니셨고, 그때 돌아다닌 사진들이 내 사진첩이 따로 있을 정도로 아버지는 잘 모아주셨다. 내가 3살이 될 때 아버지가 나를 데리고 다니신 이유는 또 있었다. 나에게 동생이 생긴 이유다. 어머니는 갓난쟁이 동생을 돌봐야 해서, 나를 신경 쓸 수 없었는데.. 에너지가 넘치는 나를 아버지가 맡아야 했다. 아버지는 특별히 고정적으로 다니는 회사가 없어서 자주 놀러 다니셨고. 놀러 나갈 때 나를 데리고 가셨다. 그때 아버지는 지금의 딱 나 같은 생각을 하신 것 같다. 이 아이랑 노는 것이 재미있구나! 


나도 지금 5살짜리 아이를 키우는데.. 2살까지는 스스로 제대로 걷질 못해서 늘 안거나 어딘가에 눕혀 두었다. 밖에서는 자주 기저귀를 제때 갈거나 분유를 타 줄 수도 없어서 힘들었는데, 3살이 되자 스스로 걸으니 둘이서 외출하는 일이 재미가 있었다.  아마 아버지도 그랬던 듯싶다. 3살 때 이후로 초등학교 입학 8살까지 나는 5년간 아버지랑 전국을 돌았다. 아버지가 보여주고 얘기하는 것이 신이 났던 모양이다. 


기억 속에 강에서 낚시하고 캠핑하던 일. 궁금해하니 텐트 치는 법도 가르쳐 주시고, 나는 튜브를 하고 아버지는 팬티만 입고 강 반대편까지 갔다가 다시 오는 일. 어떤 산의 절에 가서 절밥을 먹고 불상 앞에서 절을 하고 절으르 돌면서 아버지가 이것저것 얘기해주시던 일 등 기억이 조금씩 날 때 지금은 돌아가신 아버지가 무척 그립기도 하니 말이다. 


그는 어릴 때 힘들었고 마음을 의지할 수 있는 곳은 큰누나였다고 한다. 큰 누나는 나에게 큰 고모인데, 일찍 시집을 가서 아버지가 자주 만나기 힘들었다고 했다. 할아버지에게 많이 혼나는 날이나 할머니가 보낼 물건이 있다고 심부름을 시키면 멀리 시집간 고모집까지 걸어가서 하루 이틀 지내다 집으로 돌아갔다고 했다. 


차로 타고 가도 먼 곳을 아버지는 그렇게 어릴 때 걸어 다니며 기초체력을 쌓았나 보다. 

그런 아버지가 어린 나를 3살 때부터 데리고 다니며 노는 모습을 보셨으니, 아마 나를 잘 파악하신 듯했다. 아버지랑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운동선수를 시키겠다고 어느 날부터 결정하시곤 여자는 배구선수라고 정하셨다고 한다. 너무 어릴 때는 힘드니깐 중학교 1학년이 되면 시켜야지. 하고 시기도 정해두셨다고 했다. 


그 전에는 공부를 제때 못한 아버지의 한을 내가 풀었다. 3살 피아노 학원,  4살 사립유치원, 5살 웅변학원, 6살 교회 유치원, 7살 병설유치원. 내가 기억하는 교육기관만 3살부터 시작된다. 아버지는 집에 생활비를 제대로 가져다 주지는 않으셨다. 할아버지가 그렇듯 아버지도 본인이 하고 싶은 곳에 쓰셨다. 물론 그 돈을 본인을 위해 쓰시는 일은 술, 담배. 나머지는 나의 교육에 투자하셨다. 책을 사 오시기도 하고 신 문물. 비디오와 티브이가 합쳐진 비디오 티브이를 사 오시기도 하고. 책 전집. 장난감 등등 다양했지만, 어머니는 쓸데없는 돈을 쓴다는 생각에 속상하셨다고 했다. 그 돈 어머니를 주면 더 유용하게 잘 쓰고 남겨서 저축도 할 텐데 하며 말이다. 


아버지는 그래도 자신이 번 돈은 밥 먹을 만큼만 집에 주면 나머지는 꼭 하고 싶은 걸 하셨다. 돈이 더 필요해서 집에 닭장을 지어 생활비를 아끼시고, 개를 키워 교배로 태어난 강아지를 팔아다 돈을 더 마련하셨다. 그러면서도 내가 무언가 배우고 다니는 것에는 포기를 않으셨다. 하지만 그냥 기관을 보낸다고 공부를 잘하거나 뭘 제대로 배우는 것이 아님을 나는 지금은 잘 알고 있다. 아버지는 그때 보내는 것만으로도 졸업장을 가져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생각하신 모양이다. 본인이 누리지 못한 것을 나에게 최선을 다해 쏟아부으셨다. 


그의 노력으로 나는 어릴 때 하고 싶은 것은 다 할 수 있었다. 비록 집 한 채 제대로 없어서 가난하게 살았지만 3살 때부터 어디를 다니고 배운 내가 아버지에게는 자랑거리였다. 엄마는 아빠가 맨날 친구들 만나 놀면서 돈은 안 갖다 주거나 쥐꼬리만큼 준다고 속상해하셨다. 그러나 애를 키우면서 나는 알게 되었다. 어머니가 못 받은 생활비는 내 교육비였고, 내 장난감, 비디오테이프, 예쁜 옷, 간식 값으로 나갔다는 것을. 아버지는 딸에게는 가장 필요한 것을 먼저 사주고 싶어 하셨다. 


어느 날은 아버지 친구네 놀러 갔는데, 그 집 아이에게 자전거가 있었다. 어른들끼리 방에서 놀고 그 집 아이는 나와 놀지 않았다. 나는 심심하던 차에 밖에 있는 자전거를 타봐도 되겠냐고 아버지에게 물었고, 아버지 친구분과 친구분 아내는 타도 좋다고 허락해 주셨다. 또 그 친구도 아직 자전거에 대한 애착은 없었는지 타도 상관없다고 대답해서 나는 충분히 자전거를 맘껏 타는 날이었다. 


그날 내가 탄 자전거는 자전거 뒷바퀴 양쪽에 작은 보조 바퀴가 달린 것으로 아이들이 타는 사이즈였다. 

내게는 조금 커서 발이 땅에 닿지 않았는데. 어떻게든 타보려고 노력했다. 다행히도 바퀴가 4개라 넘어지진 않았고, 페달을 열심히 밟다 보니 30분 만에 마스터해서 탈 수 있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내가 집에 들어오질 않아서 나와본 아버지는 놀라셨다고 한다. 내가 3시간 만에 자전거를 완전히 마스터하고는 맘 껏 타면서 집 앞 도로를 왔다 갔다 하고 있더란다. 아버지는 너무 대견해서 그 주말에 돈을 마련한 다음 바로 핑크색 4발 저전거를 사주셨다. 안장이 높아 조절을 해도 해도 높았는데. 

나는 탈 수 있다고 반드시 이 핑크색 자전거가 필요하다고 했다. 내 생에 첫 핑크색이었다. 


그렇게 그는 당장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막노동을 해서라도 나에게 필요한 것을 사주는 사람이었다. 지금 생각하니 정말 나에게 가족에게는 최선을 다해서 필요한 것을 가져오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관심과 사랑, 그리고 경제적 공부였는데 그는 그걸 몰랐고 몸으로 몸소 평생 고생하다가 돌아가셨다. 살만하니 돌아가셨다. 간암 위암 판정으로. 


나의 아버지는 많은 일을 했다. 시골에서 자라서 결혼 후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부산 바로 위 양산에 사셨다. 운전면허로 할 수 있는 일이 택시운전이 전부였는데. 택시회사 근처에 마련한 집은 창고를 고쳐 집으로 바꾼 곳이었다. 우리 가족에겐 부엌이 따로 있는 집이란 것이 처음 생기는 날이어서 엄마도 나도 너무 기뻤던 기억이 난다. 

창고 전체를 아버지는 스스로 잘 수리해서 방하나가 10명도 더 잘 수 있는 크기로 만드셨다. 그리고 한쪽에 자계장 3칸을 채워 넣으셨다. 그리고 스테인리스로 스스로 만들어 어항 선반을 만드셨다. 아버지는 꼭 어항에 물고기를 키우고 싶어 하셨다. 


그에게 첨 생긴 집다운 집이었다. 월세지만 집이었다. 


깡촌 출신 남자의 49평 아파트 구입 1 끝. 

2에서 계속.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