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우투 Dec 29. 2020

깡촌 출신 남자의 49평 아파트 구입 2

내 아버지의 이야기

우리 가족은 내가 6살쯔음에 제대로 된 집을 구할 수 있었다. 그땐 사글세라는 집 형태도 있었는데, 월세 개념이기도 했지만, 사실 사글세에 가까웠다. 집주인은 우리 집 건너편 산 위에 농장을 운영했다. 그때 양산에서는 꽤 큰 농장? 농원이 있었는, 주인이 여성이었다. 


어머니는 그분을 사모님이라고 불렀는데, 사모님의 남편은 부산에서 큰 시멘트 회사 사장님이라고 했다. 비워둔 땅 위의 창고를 집으로 고쳐 산다고 하니,  흔쾌히 허락을 해주셨다고. 원래는 창고를 임대할 생각으로 내놓으셨다고 했고, 아버지는 있는 돈에 잘만 고치면 적은 돈으로 넓게 살 수 있다는 생각에 임대를 하고 고쳐서 집으로 살 것이라고 하니, 주인이 허락했다고 한다. 


이사 온 후에 창고를 잘 고쳤는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서 주인인 사모님이 오셨는데, 엄마는 그때 처음으로 기사 딸린 검은 차가 집에 올라오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그때 당시에도 꽤나 고급스러운 승용차였다.  사모님은 창고를 어떻게 고쳤는지 궁금해서 일 년에 한두 번 종종 와보시곤 했다. 어머니가 너무 감사하다고 인사를 했을 때 자기에게 고마울 것 없다고 창고를 이렇게 깔끔하게 고쳐주니 좋다며 오히려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가셨다 한다. 


어머니는 그때 성공한 사람은 어떻게 말을 하고 사람을 대하는지 제대로 보셨다고 했다. 그때부터 자신보다 못한 사람을 함부로 대하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셨다 한다. 그 사모님이 어머니에게 사람으로서 대해준 첫 집주인이라고 했다. 그 사모님의 태도는 어머니가 그간 봐온 집주인들과는 너무 달라서 놀라셨다고도 하셨다. 그리고 우리가 심심할 때 농원에 놀러 오면 입장료를 받지 않겠다고 놀게 보내라고도 하라고 하셨다. 농장에 자주 올 수 없어 늘 비어있다고. 아이들이 뛰어놀면 나무들도 좋아할 거라는 얘기도 하셨다고 한다. 생각이나 말투가 정말 좋아서 어머니는 좋은 사람이라 느꼈다고 한다. 이미 여기에 돈을 내고 사는데 입장료를 받을 일이 뭐가 있냐며 매표소에 얘기를 해주시겠다고.  언제든 애들이 심심해하면 오라고 하셨다. 단 어머니가 함께 오시면 어른 입장료는 사고 들어와야 한다며. 

어머니는 왜 부자들은 그냥 부자가 아닌지 알게 된 것 같다며 그 사모님을 좋아하셨다. 


종종 나는 소풍 철이 지나고 나면 빈 농원에 놀러 갔다. 때론 동생을 대동하고 가기도 하고, 혼자 산을 타고 지름길로 올라가기도 했다. 그 농원은 산 위에 있어서 어린 나이로는 걸어갈 수 없었는데, 넘치는 체력에 나는 용감히 올라가서 농장을 둘러보고는 집에 돌아와 밥을 먹고 잠이 들었다 한다. 여자아이가 용감하기 이를 데 없다. 지금이면 꿈도 못 꿀 일이다. 내 나이 고작 6살~7살이었다. 


한동안  넓은 창고 집에서 잘 살다가 집으로 갈라 다른 분들이 이사 오게 나누었는데, 우리처럼 힘든 분들이 집을 찾는다는 얘기에 집이 너무 넓어서 우리 집을 반을 나눠도 괜찮겠다며 아버지가 방 하나를 그분들에게 양보했다.  그만큼 금액도 내려갔다. 

우리는 나머지 방 하나로도 충분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쓰게 될 방이 주로 사용하는 방보다 넓었다. 


이사 온 분들 중 수화로 대화가 가능하신 분이었는데. 어머니는 이웃과 잘 지내고 싶어 그때 배우셨다고 한다. 제대로 배운건 아니지만 옆집 이웃과 대화하는 어려움은 없으셨고, 나중에 단지 배 우두 길 잘했다고 하신다. 지금 사용 하시진 않지만, 그 후로도 한동안 수화 쓰는 분들의 손짓을 보면 눈치껏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있었다고 했다. 


나도 나중에 커서 뭔가 다른 언어를 배워 둬야지 하고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동안 아버지는 나를 유치원 학원 등으로 다양하게 보내셨고 경험하게 하셨다. 아버지는 택시운전을 하셨고 부지런히 다니셔서 개인택시를 운영하는 게 꿈이었다. 그때 아버지가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꿈이었다. 그러나 사고가 있었고, 아버지는 당시 개인택시를 가질 자격이 되질 못했다고 한다. 그럴 바엔 계속 택시회사에서 일을 한다는 생각은 아버지를 힘들게 했다. 그간 택시회사에 다니시며 집 앞의 논도 2개나 구매하셨고, 집 옆 밭이랑 논을 빌려 작은 농장처럼 닭오리 거위 개 등 다양한 동물도 키우셨다. 또 구매한 논에 벼농사를 지었고. 대여한 밭에 야채 등도 심으셨다. 그 재료들로 우리는 굶지 않고 년간 먹을 수 있었다.  동물들을 키울 수 있게 되자 고양이도 개도 우리 집에 많아졌다. 내가 숫자를 세기 시작하자 개가 집에 몇 마리인지 세어서 그날 퇴근한 아빠에게 얘기하자, 아버지는 숫자를 벌써 셀 줄 아냐며 너무 좋아하셨던 기억이 난다. 3~4살부터 어딜 보내셨는데.. 숫자를 모르는 게 더 이상한 게 아닐까? 하고 지금 생각해본다.   

또 쌀이나 야채를 판매를 해서 생활비에도 보탤 수 있었는데.. 덕분에 아버지는 택시 운전이 가족을 넉넉하게 먹여 살리는 일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사고로 개인택시 운전사의 길이 막히니 택시운전 자체가 싫었다. 열심히 해도한 번 실수에 꿈이 무너져 내리니, 내가 생각해도 너무 한 처사라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그대로 택시회사를 그만두고 조금 먼 곳에 작은 쇠를 깎는 공장에 취업하셨다. 마땅한 졸업장도 배움도 없었던 아버지는 운전하나 믿고 일을 해오셨는데.. 이제 그 운전 말고 다른 일을 찾으니 마땅한 자리는 없었다. 일을 배우면서 월급은 적은 곳이라도 벌어야 했다. 조금 다니던 공장에서 기술을 배워, 본인이 기계를 구매해서 운영하면 돈을 더 잘 번다는 생각에 공장을 차리셨다. 처음엔 일도 꽤 되어서 외삼촌이 같이 내려와 일을 하셨지만, 나중에 일이 자 풀리지 않아 외삼촌은 다른 곳에 가시고, 우리는 다시 어려워졌다. 어머니는 임시로 일을 나가셔야 했고. 나랑 동생은 자주 집에 둘이서만 보냈다. 


다행히 집에 개가 많아서 보안은 걱정 없겠다며 어머니랑 아버지가 안심하신 듯하다. 진돗개만 꽤 큰 대형으로 3마리를 키웠고 모두 아버지 휘슬에 산꼭대기까지 뛰어갔다가 다시 내려오곤 하는 훈련이 잘된 개들이었다. 그러니 아버지랑 어머니가 믿고 개들에게 우릴 맡긴 거다. 그러나 사건은 그중 한 마리의 암컷이 새끼를 낳으며 터졌다. 부모님이 집 비운 사이 동생이 새끼 강아지가 보고 싶다는 얘기에 언니가 나섰다. 강아지를 한 마리 두 마리 꺼내고 세 마리 꺼낼 때쯤 너무하단 생각이 들었는지 내 손을 세게 물었다. 나는 따뜻함을 느꼈고, 동생은 울기 시작했다. 내 손에서 피가 철철 넘쳤고 옆집 사람들이 나와서 내손을 지혈하고 동생을 달랬다. 


아버지와 어머니도 나중에 소식을 전해 듣고 오셨고 나는 병원에 갔다가 손가락에 붕대를 감았다. 

그리고 나는 아직까지도 내 왼손 손가락에 흉터를 보며 그날 기억을 떠올리곤 한다. 

누가 부탁을 해도 위험한 일은 절대 하지 말아야지, 나서지 말아야지. 생각하면서. 


그날 강아지를 낳은 그 진돗개는 아버지에게 허리띠로 많이 맞았다. 그리고 아버지가 휘슬을 불면 산 위로 뛰어갔다가 다시 내려오고. 맞고는 또 산 위로 올라갔다. 아버지는 강아지가 훈련이 덜 돼서 나를 물었다고 생각하신 것이다. 나는 맞는 강아지가 지르는 깨갱거리는 소리와 아버지 허리띠 소리에 너무 놀라서.. 내가 다쳤을 때보다 더 울었다. 그리고 결국엔 나가서 아버지에게 소리쳤다. 내가 잘못했어. 때리지 마. 유순이는 잘못 없어!


그 강아지의 이름은 유순이였다. 다음날부터 유순이는  내가 앞에 나타나면 꼬리를 배속으로 넣고 몸을 낮춰 내가 머리를 쓰다듬을 수 있게 바라보았다. 강아지가 왜 아무리 주인에게 학대를 당해도 반갑다고 와서 꼬리를 흔들고 놀아달라고 한다는지 나는 그날 스스로 눈으로 봤다. 나는 그 후로 너무 미안해서 유순이의 강아지를 만지지 않았다. 동생은 아버지를 통해 강이지를 꺼내어 만졌지만, 나는 그것마저도 만지지 않았다. 무척 미안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유순이는 내 붕대 감은 손을 수시로 핥아 주었는데. 자신이 그렇게 맞고 산을 여러 번 타며 혼났음에도 내 손이 걱정되는 진돗개 유순이와 아기 강아지들에게 미안해서였다. 


아버지는 강아지들에게도 무섭게 대하셨지만, 그건 많은 강아지가 집에 함께 살아야 했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생각한다. 각자 목줄로 자기 집 근처에 묶여 있었고, 아버지는 부지런히 새벽마다 밥을 챙겨주시고 출근하고 퇴근하면 강아쥐를 살피고 집에서 쉬셨다. 


그런 부지런함과 정성에 강아지들은 아버지를 거역할 수 없는 존재로 여겼다. 덕분에 나는 많은 동물들과 함께 개가 어떤 존재인지를 정확히 알게 되었고, 내가 어른이 되어도 아버지만큼 챙길 수 없다면 개를 키우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8살이 되어 초등학교 입학하고 1달가량 지났을 때. 우리는 양산 창고 집에서 마산이라는 도시로 이사를 가게 되었는데, 이유는 우리 집 앞 도로를 넓히는 공사를 시작해서.. 이제 집에서 도로로 나갈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아버지가 집 도로 옆에 논을 2개 사놓으셨던 것도 팔라고 연락이 왔다고 한다. 


그 시절에 1억 정도라는 돈을 받으셨는데, 아무래도 보상과 함께 아버지가 잘 거래를 하신 듯하다. 

아마 어머니 모르게 다른 곳의 땅도 조금 사놓은걸 함께 파셔서 큰돈을 받으셨던 게 아닌가 싶다. 

개들도 동물들도 모두 데려갈 수 없어서 아버지는 지인들과 농장에 모두 파시거나 맡기셔야 한다고 했다. 


내 기억에 선명한 하나는,, 나를 물었던 그 유순이가 제일 마지막으로 집을 떠났는데,, 꼭 자기는 데려가라는 듯 트럭 우리 안에서 빙글빙글 대며 끙끙 알았고.. 눈에 눈물이 고여있었다. 자기가 곧 우리랑 헤어지는 것을 알기라도 하듯. 우리 집에서 시멘트 바닥 내리막길을 내려가는 트럭 안 유순이는... 이동하는 트럭 케이지 안에서 계속 우리를 바라보다가 트럭이 도로에 들어서자 크게 짓기 시작했다. 보내지 말라고 제발 자기도 데려가라는 듯. 


어머니도 다른 개들은 몰랐지만, 유순이만은 꼭 데려오고 싶으셨다고 한다. 그런 일이 있었음에도 너무나 말 잘 듣고 오히려 더 낮은 자세로 가족들을 대해서 미안했다고 하셨다. 그리고 그간 가장 많은 새끼를 낳아서 우리 가족에게 보탬도 되었다고 했다. 진돗개로 좋은 품종이라 계속해서 교배도 가능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정말 잘 키워줄 분을 찾다 찾다 마지막에 유순이를 보낸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나는 모든 동물들과 헤어졌다. 그리고 시골 양산에서 도시 마산으로 이사를 갔다. 아버지의 능력에 부산은 살기 힘든 동네였다. 부산을 지나 김해를 지나 창원을 지나 마산으로 이사를 왔다. 차로 그리 먼 길은 아니지만 걸어갈 거리는 아니다. 서울의 끝과 끝을 달리는 시간보다 양산에서 마산 거리가 더 가까웠다. 


마산에 구한 집은 화장실이 밖에 있었고, 부엌은 제대로 갖추었지만, 무척이나 집이 작았다. 어머니는 옥상이 있는 이층 집이라 좋았지만, 방이 하나에 다락이 작게 달린 집은 좁게 느껴져서 답답하셨다고 한다. 단지 산 위 근처 집이라 경치는 좋았다. 마산 바다가 보였다. 집 바로 앞엔 놀이터도 있었다. 

집주인은 2층 집 옆에 따로 단독주택에 마당이 있는 집에서 살고 있고 주차장도 따로 있어서 우리와 간섭이 거의 없었다. 집주인은 또 마당에 벌을 3통 치고 있었는데,, 정원에 꽃나무가 많아서 봄여름엔 꽃향기가 무척 좋았다. 종종 벌이 집에 들어오는 일이 있어서 아버지는 창문에 방충망을 보수해주셨다. 


내가 동생이 벌에 눈두덩이를 쏘인 일이 있었는데.. 그때 한참 유행하던 외화 '빈센트'의 눈 같아서 너무 웃었던 일이 있다. 정말 눈이 통통 부어 빈센트와 똑같은 눈이었다. 동생은 첨에 아프다 가렵다 난리였지만 엄마랑 내가 웃으니 왜 자긴 아픈데 웃냐고 난리였다. 엄마가 거울을 주 벼 빈센트랑 똑같다고 하니 동생은 자기도 보고 웃고 말았다. 정말 똑같았기 때문이다. 다음날 눈이 더 부었는데 한동안 우리는 벌에 쏘이면 빈센트가 된다며 벌을 조심해야 한다며 재미있게 보냈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만 벌에 쏘이면 안 된다며 여기저기 창문과 문에 어떻게 방충망을 추가할지 고민하셨다. 


아버는 마산에서 조금 먼 거리에 공장을 차리셨고 외삼촌을 다시 부르셨다. 외삼촌은 이번엔 매형이 자본금을 들고 제대로 시작한다는 생각에 다시 오셨다. 아버지 친구분들도 2분 함께 일을 시작하셨으나, 처음과 달리 한동안 시간이 지나고 일은 잘 풀리지 않았다. 나중에는 점심을 사 먹을 돈도 아낀다며 라면과 계란으로 식사를 하는 아버지를 보았다. 아버지는 라면을 끓이며 혼자 일할 땐 라면도 안 먹는다며 얘기해 주셨다. 빨리 일하고 집에 가서 먹으면 되니깐 굶는다는 것이다. 근데 내가 와서 오늘은 라면을 먹는다며 좋아하셨다. 계란은 삶은 계란이 좋은지 라면에 넣어서 먹을 건지 물어보시고는, 내가 삶은 계란이 좋다고 하자 물에 씻은 계란을 통째로 라면 물속에 넣으셨다. 삶아진 계란을 꺼내고 라면을 끓이자 나는 아버지가 모든 면을 나에게 주시는 것을 봤다. 본인은 국물이 좋다며 라면 국물에 남은 계란 하나와 찬밥을 넣어 끓인 후 드셨다. 


나는 그때부터 라면 면을 먹기가 싫었다. 아버지가 나를 먹이기 위해 포기한 라면의 면이 싫어서, 내가 국물에 밥을 말아먹고 아버지가 라면 면을 제대로 드셨으면 했다. 그 후로 종종 아버지 공장에 따라갈 때면 라면 면이 맛이 없다고 하며 국물에 밥 말아 김치랑 먹는 게 좋다고 얘기했다. 나도 아버지도 똑같이 반반 나눠먹거나, 나는 과자 먹을 거라 아버지 다 먹으라며 끼니때마다 라면을 끓이는 아버지에게 그러면서도 과자는 꼭 사주시는 아버지에게 같이 먹자. 다 드셔라 양보할 수 있었다. 나에겐 배고플 때 먹을 과자가 있었으니까... 아버지는 언제부터는 내가 과자를 남기고 가면 배고플 때 그걸 먹기도 하셨다고 한다. 나는 과자도 이제는 하나씩 아버지 입에 넣어드리고 같이 나눠먹게 되었다. 아버지는 웃으면서 얘기하셨는데 나도 웃으면서 맛있지? 하면서도 어린 나이에 아빠를 더 챙겨야겠다 생각한 모양이다. 


그동안 동생은 어머니랑 집에 있었다.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는 몰랐지만 주로 어머니는 겨울에 입힐 스웨터를 짜셨다. 어릴 때 내 가입던 스웨터를 풀어 실을 추가해 다시 크게 만들고, 또 동생도 필요하다고 하자 동 생것도 뜨셨다고 한다. 이상하게 항상 나를 먼저 떠주셨는데, 동생은 입기 싫어하기도 했지만, 나는 잘 입고 다녀서 계속 떠주고 싶었다고 하셨다. 


지금 어머니는 옷을 만드는 일을 취미로 하시는데, 어머니가 만든 옷을 현재도 나는 잘 입고 다니지만 동생은 잘 입지 않는다. 본인의 스타일과 맞지 않는다고 하며 입지 않는단다. 나는 내가 잘 입고 다니니 이런 거 이런 패턴 원단 얘기하며 더 만들어 덜라고 했다. 그대로 내가 결혼해 아이가 태어나자 외할머니가 된 우리 어머니는 외손녀에게 원피스도 바지도 티셔츠도 만들어 주신다. 내 어머니에게 옷 만들기 취미가 생겨서 나는 지금도 무척이나 기쁜다.  먹고살기 바빠 취미 하나 없는 어머니에게 옷 만들기라는 취미는 무척 멋졌다. 


어머니는 작아진 내 옷을 동생에 맞춰 줄여 입히고, 그것도 작아지면 인형 옷을 만드셨다. 인형 옷이 젤 어려웠다고 하셨다. 너무 작아서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데 바느질에 안 맞으면 다시 만들어야 하니 실패도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냥 뜨개질이 편했다고 하셨다. 풀었다 다시 떠보기도 하고 하니 돈도 안 들고 계속 무언갈 만들 수 있어 재미있는 취미생활이었다고 하신다.  지금은 코바늘로 수세미만 떠보신다. 

바느질은 옷 만드는 걸로 충분하시다면서. 



그 시절 아버지가 공장을 할 때는 초반기엔 어머니도 집에서  우리를 돌보기만 하셨다. 한두 달 지나 내가 학교 친구가 생겼을 때 그 어머님이 부업 마스터로 이어폰을 줄에 넣는 작업을 하시는 걸 보곤 그 일을 받아 같이하셨다.  그러나 아버지 공장이 어려워지고 모든 직원이 떠나자 어머니는 남의 집 일도 하셔서 일당을 받아오시기도 하고, 가정부 일도 하시곤 했지만, 하루 벌고 일이 없을 땐 쉬니 학교와 유치원을 가는 두 딸에게 돈이 부족했다고 한다. 취업을 해서 고정적인 수입이 있어야 먹고살 수 있겠다는 생각에 어머니는 공장에 취업을 하셨다가 나중에는 수출후문이라는 공장에 취업을 하셨다. 반찬은 콩나물과 김치 등 간단하고 돈이 덜 드는 저렴한 반찬들이었는데,. 콩나물과 김치가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다. 


어머니가 공장에 다니며 살림을 챙기실 때 아버지는 모든 돈을 잃고 마지막으로 공장을 정리하며 기계를 헐값에 팔아 마지막 돈을 마련하셨다. 큰돈은 그렇게 몇 년 만에 사라졌고, 아버지도 어머니도 씁쓸한 표정으로 공장에 인사를 하고 우리 가족은 트럭을 타고 마산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그 후 트럭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는데, 쇠를 깎는 공장에서 나온 쇠가 고철장으로 간다는 걸 알게 되시고는 고철을 모으는 분들이 일정의 돈을 공장에 내고 남은 쇠를 사 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쇠를 고철장에 팔아 차익을 남겨 돈을 버는 형태였다. 아마 요즘도 그럴 것이다.


아버지는 공장을 운영하실 때 아무리 돈이 없어서 저 일은 안 해야지... 하고 생각하셨다고 한다. 절삭유와 함께 공장 기계 아래에서 쇠가루를 퍼내는 일도 힘들거니와 그것보다 더 나쁜 공기에 건강도 싫었다고 하신다. 그러나 이제는 당장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을 따라다니며 일당을 받으시기로 했다. 그러면서 새로운 공장을 알아보셨다 한다. 그도 여의치 않아서 일감이 없으면 다른 곳을 다니며 일을 알아보셨다. 여기저기 일을 알아보시다가 나이트클럽 무대 수리하는 일도 해보셨고. 어깨 형님들 눈에 띄어 잡일도 하셨다고 한다. 그런데 아이 아빠로 그런 일을 하려고 하니 심적인 부담이 크게 다가와서 할 수 없었다 한다. 하루는 나를 데리고 마산 근처 백화점 꼭대기에 있던 나이트클럽에 나를 데려가셨는데.. 무대 고친 것이 잘못되어 수리하러 오셨다고 했다. 그때 내가 처음 어깨 형님을 보게 되었는데, 무섭기도 하면서 사람 인상이 좋아 보였다. 


단번에 어린 내가 봐도 화가 났지만 좋게 " 다시는 안 무너지게 잘 고쳐주십시오. 그럼 일 끝나면 가시고요 하면서 무대 고칠 부분을 알려주고 얘기를 좀 더 하시다가 가셨다" 아버지는 힘들 때 도와 주시 형님인데 무대가 무너질 뻔해서 너무 죄송하다고 나에게 설명해 주셨다. 다시는 고장이 안 나게 못을 여러 번 계속해서 박아두시고 발로 꾹꾹 전 무대를 밟아보시며 또 고장 날지 모를 무대를 수차례 확인하시고는 나와 함께 자리를 떴다. 


보통 부모라면 이런 자리에 자식을 데려오지 않을 법도 한데, 아버지는 간혹 이런 자리에 일부러 나를 데려가셨다. 아마 나를 데려가면 그 아저씨가 강하게 못 나오리라 생각해서 그랬던 걸까? 그렇다면 다행이다. 나는 꾸벅 인사를 하고 정말 해맑게 웃으며 그곳을 돌아다니며 예쁘다고 말로 표현할 줄 아는 아이였으니까. 그래서 그 아저씨는 화를 못 냈을 것 같다. 


그 후로 아버지는 집을 수리하거나 무언가를 만들 때 두 번 다시 고장 나지 않게 , 철저히 처음부터 튼튼하게 만드셨다. 그 습관 덕에 아버지에게 공장 숙소나 컨테이너 하우스를 의뢰하는 수주가 종종 들어왔고 아버지는 한동안 그 일로 가족의 생계에 보탬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어머니의 공장 월급만큼은 되지 못해서 우리는 필요한 돈을 겨우겨우 벌어다 하루 벌어 하루 산다고 하셨다. 


어머니랑 아버지의 경제사정을 어릴 때부터 듣고 눈으로 보고, 또 궁금하면 물었기에 나는 어느 정도 상세히 알 수 있었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왜인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얘기하게 된다고 하셨다. 그리고 내가 호기심이 많아 자꾸 질문을 하니 대답을 하다 보면 이 얘기 저 얘기 다 하게 된다고도 하셨다. 


아버지는 그렇게 이일 저일 하시다가, 내가 초등학교 4학년 가을 때 전화를 한통 받으셨다. 


"딸 농구 선수시키십시오." 


학교에 찾아온 산호초등학교 농구부 코치와 감독 선생님의 전화였다. 자주 그분들은 우리 집으로 찾아오시거나 전화를 걸어 농구 선수할 것을 추천하셨다. 체격이 좋다. 당장 선수로 뛸 건 아니지만 미래가 밝다. 키우고 싶다 등의 애기로 아버지를 설득했고. 아버지는 마지막에 "농구라는 운동을 아느냐?" 하고 나에게 물으셨다. 


티브이에 나오는 농구를 보여주시며 저런 운동인데, 여자들도 한다고 한다. 그 팀이 마산여자중학교에서 훈련을 하는데, 내가 와서 직접 보면 어떻겠냐고 친구들 만나 공도 만져보라고 했다는 것이다. 


나는 가겠다고 했고 아버지는 그날  업무 일정을 비워두고 함께 마 여중 농구부 체육관에  함께 가주셨다. 


가는 길에 내가 중학교 1학년이 되면 배구선수를 시키고 싶다고 하셨다. 그래서 운동은 생각도 안 했고 초등학교 3학년 때 합기도만 시키신 거라 하며, 내가 하기 싫으면 농구는 안 해도 된다고 하셨다. 오늘은 그냥 구경만 하는 날이니 마음 편하게 먹고 자신감 있게 인사하라고도 해주셨다. 


도착한 날 창원의 한 친구도 첨으로 농구 구경을 왔는데, 우리는 서로 마음에 들었나 보다. 서로 내성적인 성격에 처음 농구를 보러 오는 날이었고, 집에 돌아가서 "농구를 해볼래?"라는 질문에 둘 다 똑같은 대답을 했다고 한다. 


"그 애가 한다고 하면 할게요" 


아버지는 배구선수를 시킬 예정이니 농구를 하다가 싫으면 얘기하라고 배구 학교를 알아보시겠다고 했다. 나는 그냥 그 친구랑 놀면 재미있겠다고 생각해서 농구를 하겠다고 했다. 나에게도 사연이 쌓인 게 있었기에 전학을 하는 것도 문제가 아니었다. 아버지는 잘 알고 계셔서 거듭 질문하고 내 대답과 결정을 따르겠다고 해주셨다. 


나는 그렇게 농구를 위해 학교를 전학했고, 아버지는 농구부 친구들의 부모님과 친해졌다. 

그리고 다른 부모들은 어떻게 아이에게 정성을 쏟는지 제대로 알게 되셨다. 


그 후에 아버지는 계속해서 새로운 일을 찾고 계셨다. 돈을 벌어야 운동선수를 하는 딸을 지원해 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어느 날 내가 열심히 뛰는데 친구 아버님이 유심히 보니 양쪽 발이 다 찢어진 운동화를 어머니가 실과 바늘로 기워서 겨우 뜯어질 듯 말뜻 한 채로 계속 신고 운동하는 모습을 보신 것이다. 


생활비도 겨우 벌어서 쓰는 집이라 나도 굳이 운동화를 사달라고 조르지 않았나 보다. 그때 농구화는 벗어서 체육관에 두고 갈아 신은 신으로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니 부모님이 운동화 상태를 아실리 만무했다. 가끔 세탁을 위해 가져 가면 조금 뜯어진 부분을 어머니가 기워주셨다. 때론 본드로 붙여주시기도 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 시점에 나는 운동을 열심히 했다. 그냥 시킨 대로 열심히.  친구 아버지가 다 뜯어진 운동화를 신은 나를 보고 부모님께 연락을 했던 모양이다. 아버지는 친구 아버지에게 운동화를 먼저 사달라고 부탁하셨고, 그날 운동이 끝나고 나는 친구 부모님과 운동화를 사러 가게에 갔다. 운동을 시작하고 두 번째 운동화였다. 아버지는 본인이 어릴 때 운동화가 없어 운동을 그만둬야 했던 때가 떠올라 무척이나 속상하셨다고 했다. 


그날 번 돈을 운동화 값으로 지불하고,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아서 안 하는 일을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하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그렇게 하기 싫었던 고철 일을 시작하셨다. 가족을 위해서. 


깡촌 출신 남자의 49평 아파트 구입 2 끝

깡촌 출신 남자의 49평 아파트 구입 3에서 계속




            

작가의 이전글 깡촌 출신 남자의 49평 아파트 구입 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