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우투 Jan 01. 2021

깡촌 출신 남자의 49평 아파트 구입 4

나의 아버지의 이야기

우리는 안정적인 행복함을 맛보는 듯했다. 


빌린 은행빚은 갚으면 되었고, 아버지는 계속해서 돈을 벌면 어머니는 가져다주는 생활비를 아껴서 돈을 모으면 되는 것이었다. 아파트에 이사 오기 전 어머니는 공장일을 그만두셨는데. 어머니가 벌어오니 아버지가 안일하게 자꾸 사업을 구상한다는 것이다. 조금만 모아두면 자꾸 돈을 가져가는 아버지 탓에 집에 늘 돈이 없었다. 


어머니는 애들을 잘 돌보고 싶어 이제 일을 하지 않겠다고 아버지 보고 돈을 벌라고 했다. 아버지는 그때 위기감과 내 떨어진 운동화 얘기에 고철을 시작하신 거라고 어머니의 설명이 있었다. 


문젠 안정감을 찾은 뒤 생겼다. 아버지는 깡촌에 살아남아 격한 10대를 지나 드디어 20대에 본인의 다정한 가정을 꾸렸다. 잘 살고 싶은 마음에 여러 번 사업을 했지만 성공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서울에서 성공한 이모부의 운전수를 하면서 사업의 꿈을 키웠으나, 그 꿈은 수시로 무참히 무너졌다. 그 무너짐은 고스란히 가족들의 짐이 되어 힘든 시간들을 보내야 했다. 무려 15년 동안. 그런데 드디어 드디어 본인 명의 차량 2대 소유한 사업가가 되었다. 막 사회에 나왔던 10대 후반, 운전면허를 취득하고 운전수로 월급생활을 해서 시골에 생활비를 보태야 하던 시절과 비교하면 이름으로 된 2대의 자동차는 정말 뿌듯했다. 비록 한대는 고철일을 위한 폐차 직전의 트럭이었고, 한대는 연비가 좋아야만 했고, 기름을 덜 먹는 수동 자동차였지만. 


이제는 어엿한 사장님이고, 이 정도면 이사장도 사람을 좀 쓰면서 편하게 일하라고 주변에서 얘길 했다. 그래서 성공한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이미 경험했다. 정말 성공한 사장들은 운전수를 두고 일을 한다는 것을. 그는 꿈이 있었다. 이런 힘든 고철 일은 먹고살기 위해 시작했고 이제 막 먹고 싶은 것은 먹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 


남들에게 돈을 빌리기 위해 아쉬운 소리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이제는 빌린 은행 빚 이자 정도는 갚을 능력이 될 만큼 번다는 것. 비록 고철일이지만. 항상 그에게는 '비록 고철일이지만'이라는 생각이 따라다녔다. 아들이 없었기에 누구에게 물려줄 수도. 또 함께 일할 수도 없다는 것을. 그는 그쯔음 직원 두 명을 뽑았다. 그전에도 여러 번 먹고살기 힘든 어떤 노숙자를 직원으로 뽑아 반드시 이 일을 해야 하는 사람들을 직원으로 함께 다녔다. 문제는 그들은 우리 아빠와 생각 자체가 달랐다. 조금 힘들면 다음날 나오지 않거나 일을 하지 않겠다고 그만뒀다. 특히 여름은 너무 뙤약볕에 일해야 하는데.. 뜨겁게 달궈진 철들을 옮기고 실어내고 힘든 시간이 많았다. 또 겨울은 너무 추웠다. 추워진 만큼 옮겨야 하는 쇠들도 차가웠다. 


그렇게 그만둔 사람들이 많았다. 또 어떤 때는 술을 마시면 아침에 나와야 할 시간에 연락도 받지 않고 나오지도 않는 사람이 문제였다.  그래서 5년 넘게 고생을 아주 많이 했다. 드디어 제대로 반드시 일이 필요한 두 사람을 뽑았다. 한 명은 부모님과 연락을 거의 않는 고아와 비슷한 남자였다.  본인의 딸들보다 나이가 조금 많은 한 명. 아마 아빠와 엄마가 생활고로 힘들어 유산을 하지 않았다면 나에게 있어야 했던 오빠와 같은 나이 일지도 몰랐다. 엄마는 자주 너무 어렵게 시작해서 내가 태어나기 전 잃어버린 아이들을 얘기했다. 


나중에는 너무 힘들어서 아빠와 헤어질 생각까지 하셨다고 한다. 돈이 너무 없었고, 결혼을 허락받기도 어려웠다고 한다. 세 번의 유산 후에 내가 뱃속에서 6개월이 되었을 때 부모님은 결혼식을 올릴 수 있었다.  자주 어머니는 힘들 때마다 이 얘기를 하며, 나에게 오빠들이 3명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얘기했다. 나는 오빠들이 있었으면 좋았겠다고 대답한다. 그렇다면 지금 아버지가 힘든 일을 할 때 세명의 오빠가 도와줄 수 있으니, 아빠의 일에  직원 문제는 없었을 것이고. 나에게 그 일을 물려주고 싶다는 생각도 안 했을 거라면서. 


그러나 그것보다 더 큰 문제가 생겼다. 주변의 사장님 들 중에는 술 시중을 원하시는 분들이 계셨는데. 아버지가 매번 가셔서 기다리셨다가 결제를 해드려야 했다. 거래처 유지의 이유였다. 사장들은 모르지만, 그 밑에 자주 보시는 분들은 본인 주머니에 들어오는 돈이 없으니 일종의 접대를 원한 것이었다. 시골에서 마땅히 갈 곳이 어디 있을까, 노래방에서 아줌마들을 불러다 노는 것이다. 그리고 돈을 주고 술값도 내고.. 아버지는 한동안 나에게 노래방 소파에서 기다렸다 끝나면 모든 돈을 결제하고 나오기도 하고. 때론 같이 노래방에서 놀기도 했다는 얘길 해줬다.  그 얘기를 듣게 된 이유는.. 내가 모든 걸 봐 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호기심이 강했다. 어렸을 때부터 어른들의 고스톱 놀이. 카드놀이 등 신기한 건 꼭 확인하고 봐야 했다. 슬며시 뒤에서 보고는 참견까지 할 정도였다. 우리 아버지는 고스톱을 정말 못 치셨는데,, 내가 5살쯤 시골 친구들과 버스를 대절해 놀러 가셨다. 그곳에서 남자들끼리 모여 술을 마시며 고스톱을 쳤는데, 궁금한 내가 아버지 뒤에서 구경을 한 것이다. 고스톱에 집중한 어른들은 내가 보고 있어도 몰랐고. 알았더라도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천 원짜리 오천 원짜리만 원짜리가 오가는 자리였다. 그땐 그런 고스톱이 불법인지, 도박인지 그런 건 몰랐다. 생애 첨 보는 장면이었고 어른들은 술을 마시고 안주를 먹으며 신나 있었다. 


내 눈엔 정말 재미있는 게임 같았다. 그림이 있는 카드를 들어 던지면 쫙쫙 재미있는 소리가 났고, 누군가 패를 던질 때 누군가는 크게 웃거나 아~ 하고 탄성 어린 소리를 내기도 했다. 신기해서 계속 지켜보다가 아버지 화투 패에 참견을 했다. "아빠 이걸 내야지." 아버지가 내려는 패보다 내가 냈으면 하는 패가 더 좋았기 때문인데, 어르신들은 몇 번 참견하는 나를 보고. 굳이 그걸 거절하고 본인이 내고 싶은 패를 내고서는 모든 게임을 진 아버지를 보고 "딸이 대신 앉아야겠다~ 패를 더 잘 보네~" 했다. 아버지는 멋쩍시며 그만 쳐야겠다고 자리를 떴다. 화투를 치려고 가져온 돈을 다 잃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그날 나를 마주 보기 위해 쭈그리고 앉아 얘길 하셨다. "이건 어른들이 하는 놀이야. 배우면 안 돼. 그리고 엄마한테도 아빠 게임에 진거 비밀이다." 

어린 내가 비밀로 할 일이 없다. "엄마 아빠 돈 다 줬어. 근데 아저씨들은 나보고 하래. 아빠보다 내가 더 잘한대" 


그는 도박에도 소질이 없고 또 관심도 크게 없이 그냥 주변에 휩쓸려 함께하고 즐거운 시간이 좋았던 사람이다. 그런 이 사람에게도 한 가지 꿈은 있었다. 자신이 운전수 하던 그 사장님처럼 운전수 딸린 사장이 되고 싶다고. 그래서 꿈을 꾸기 시작했고, 책도 많이 읽고, 신문도 매일 봤다. 그가 봤던 그 사장님처럼. 


그 사장님은 일찍 돌아가셨을 때 노후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서. 또 사업을 하며 진 빚들은 남은 가족들이 감당할 정도가 아니어서 모두 처분하고 빚을 갚는데 써야 했다. 여의도에 땅이 있었지만 팔아야 했고, 급히 처분된 땅은 제값을 받을 수 없었다. 그 땅이 급하게 처분된 후 여의도 개발이 발표되었고, 땅은 엄청난 가격으로 뛰었다. 


우리 아버지는 보았고. 실제로 가족으로서 느낄 수 있었다. 지금 당장의 성공은 성공이 아닐 거라는 것. 자신이 꿈꾸는 운전수가 운전해 주는 차를 타려면 이제 시작이라는 것. 당장 주변의 고철장 사장님들만 보더라도 아직 운전수가 운전해 주는 차를 탈 수는 없었다. 타지 않았다. 내 아버지는 고철일을 하며 다른 사업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주식에 대해 물어보고 다시 투자를 해보기도 하고, 컴퓨터가 익숙하지 않아서 딸인 나에게 컴퓨터를 배워 주식 프로그램을 실행하고 거래하는 방법을 공부하고 알려달라는 요청도 있었다. 또 친구들 중 주식하는 사람이나 주변에 주식하는 사람들에게 물어보기도 하고, 이제 조금 생긴 여유돈으로 보험이나 투자상품에도 생각이 있어서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런 일반 직장인들이나 여윳돈을 굴리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한다는 방법을 모두 찾아보았다. 


그러다가 한 친구가 연락이 왔다. 여윳돈이 된다면 차라리 직접 투자를 하는 것은 어떠냐고. 

그렇다면 주식보다 더 큰돈을 벌고 당장 창립 주주가 되는 것이라고.


그 말이 솔깃했다. 고철 일을 계속해서 돈을 벌어  해당일에 투자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절친한 친구가 하는 얘기니 믿을 만했다.. 당장 그 친구가 자신이 투자를 하고 같이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항만 사업이었고, 우리 아버지도 이미 곧 작업을 시작하겠다고 뉴스에서 읽은 그 사업이었다. 투자할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이 들어서 투자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당장 은행에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투자를 하기 시작했다. 빨리 시작할수록 투자수익이 높을 거라는 생각도 있었다.  투자금이 늘어날수록 수익은 더 커질 테니 시작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는 1억이라는 큰돈을 친구가 하고 있는 항만 사업에 투자했다. 




깡촌 출신 남자의 49평 아파트 구입 4 끝

깡촌 출신 남자의 49평 아파트 구입 5에서 계속


작가의 이전글 깡촌 출신 남자의 49평 아파트 구입 3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