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 앤 더 시티
그런 남자와는 결코 사랑에 빠지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아무렇게나 말려져 있는 곱슬머리, 밀지 않은 수염, 무엇보다 몸을 가득 채운 문신에 음악이 전업이라는 남자.
난 어느 순간부터 아침에 일어나 그의 음악을 듣고 있었다. 처음에는 가사가 없다는 이유로 아침부터 생각없이 가볍게 들을 수 있다는게 그 이유였다. 3일 정도를 듣다가 내가 이미 그의 트랙리스트를 세 번도 넘게 반복해서 모두 들었다는 것, 그리고 음악 속 그의 목소리가 가끔씩 나올 때마다 얕게 소름이 돋으며 곧장 그를 떠올리게 된다는 것을 알고는 그대로 꺼버렸다. 다시는 듣지 않을거야. 왜냐하면 내가 음악에 빠지는 건지, 그에게 빠지는 건지 도저히 구분할 수 없는 채로 헷갈렸기 때문이다.
그와 또 마주쳤다. 이번에도 그는 그의 작업실로 나를 초대했다. 돈도 없는 그가 레드 와인 한 병을 사들고 코트와 청바지를 입은 채로 나를 마중하러 나와있었다. 처음에는 그 청바지가 참 촌스럽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정이 들었는지 그런 것조차 좋게 보이네.
“자고 가도 되는데. 그냥 정해요. 자고 갈지, 친구집 갈지.”
작업실에서의 대화가 어느덧 2시간 넘게 이어질 때즈음. 그가 넌지시 오늘 자고 갈거냐고 물어왔다. 나는 모르겠다고 답했다. 사실 친구집은 가지 않아도 되었지만 그렇다고 자고 간다고 말하는 건 어쩐지 자존심이 상했다.
친구에게 연락을 해보겠다고 했다. 아마 지금 친구는 나를 계속 기다리고 있을거라고 둘러대면서.
한 시간이 흐르자 그가 갑자기 일어나 옷장을 뒤졌다.
잠옷을 가져오더니 말했다.
“이 시간에 어디를 가요. 그냥 자고가.”
사실 나는 친구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와 나는 결국 또 잠들었다. 나는 그의 침대에서, 그는 그가 평소 자는 침대 밑에 바로 이불을 깔고.
저번과 똑같았다. 섹스는 하지 않았지만 밤을 함께 샜다. 이번에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다니.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 일이 없었다고 하기에는 우리가 너무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 밤 동안,
나는 그의 깊은 속내가 담긴 깊은 일기장을 읽고 그는 나의 편지를 읽고 나는 그가 읽던 조지 오웰의 책을 읽고
또 한참 음악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는 기분이 좋아보였고 내가 예쁘다는 말 대신 옷이 예쁘다고 말했다.
자주 그의 시선이 나에게 멈춰있었고 얼굴을 마주하고 누웠고 나는 그게 부끄러워 자주 얼굴을 들지 못했고 이불 속에 얼굴을 숨기기도 했다. 바보처럼.
우리가 취해있지 않았어도 그런 밤이 올 수 있을까
레드 와인이 없었다면 이런 얘기까지는 안 했을거라는 생각에 문득 그에게 서운해졌다.
이럴 땐 와인에게 서운해야 하는건지, 술을 먹은 우리에게 서운해야하는건지.
아침 7시 30분에 그위 침대에서 깼다.
그는 여전히 나의 밑에서 이불을 깔고 자고 있었고 나만 생각이 많은 채로 계속 그의 모니터의 스포티파이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듣고 있을 뿐이었다.
술과 잠은 이미 깨버렸고 그는 새근새근 잠을 자고 있었다.
문득 나가고 싶어졌다.
오늘 밤도 이렇게 끝이 났구나,
홀로 옷장앞으로 가서 스타킹을 신고 치마를 입고 상의를 입고 그를 깨웠다.
저 이만 가야할 것 같아서 갈게요.
그는 문앞까지만 나를 배웅했고 다시 자러들어갔다.
택시를 불러 종로까지 30분을 달렸다.
차에서 내리고 나서도 차에 영원히 타있는 기분이었다.
멀미와 숙취를 겪는 것 처럼 몸이 쓰라렸고 머리도 아팠다.
나도 그도 따로 연락하지 않았다.
특별하게 서로에게 잘못한 게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냥 그게 무슨 법칙이라도 되는 것 마냥 우리는 그렇게 끝났다.
마음에 멍에가 든 것 같은 날이 삼일정도 이어지다가 이내 겨우 괜찮아졌다.
그리고 생각했다.
가끔은 서로의 서사를 모르는 채로 그저 기대고 싶은 밤이 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고,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때만큼은 서로가 서로밖에 없는 것처럼 굴고 싶어지는 그런 날이 있다고.
그게 바로 도시의 사랑법이다.
내일은 그 상대가 누가 될지 모른다.
하지만 아침이 되면 길을 나선 뒤 커피를 마시고
가능한 묵직한 감정은 빠르게 잊어버린다.
인스턴트 햄버거처럼 내 사랑도 그렇게 빠르게 구겨넣는다.
사랑할 상대는 넘쳐나고 나는 아직 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