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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여름 Jan 26. 2022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김환기와 김향안의 사랑


천재성을 가졌지만 마음이 약한 남자와 지성을 지닌 지혜롭고 강인한 여성이 만났다. 이 둘이 만나 사랑한 덕분에 끝내는 위대한 것을 이루게 되었다. 한국에서 가장 비싼 값에 팔리고 있다는 그의 그림. 이는 어느 한쪽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용기를 내어 떠나기를 잘했다. 아름다운 길 위에 우연들이 하나씩 보태져 더욱 아름다운 곳에 이르고 있다.’

김환기


그는 나라가 혼란스러웠던 시기에 안정적인 교수직을 포기하고 파리로 나가 그림을 그렸다.




“도무지 세계에서 내 작품의 위상이 어느정도인지 알 길이 없다.”



오직 그림을 그리는 것밖에 몰랐던 그는 세계로 나갔을 때 그의 위상이 어느정도일지를 궁금해 했는데, 이는 그저 꿈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꿈을 현실로 실현 시키는 실천력을 지닌 지성적인 아내가 있었다. 향안은 프랑스로 가겠다는 결심을 하자마자 바로 남편보다 먼저 파리로 떠나 불어를 공부하고 온갖 미술관을 돌아다녔다. 그녀의 그런 진취적인 실행력은 김환기가 꿈꿔온 이상을 실현하는 데에 커다란 힘이 되었다. 그는 아내의 실행력에 힘입어 파리로, 뉴욕으로 나아가 그림을 그렸다. 김환기가 44세의 나이에 교수직을 포기한 채로 타국으로 떨어진 순간에도 향안은 계속해서 그를 보살피고 힘썼다.



완전히 공동체가 되어 두 사람이 함께 페달을 밟아 나아가는 과정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어쩌면 이 두 명은 ‘환기’라는 하나의 페르소나를 향해 함께 노력한 공동체 인지도 모르겠다. 한 사람에게는 그림을 그리는 천재성이 있었고, 또, 한 사람에게는 현실과 직접 맞닿아 그림의 가치를 현실로 뻗어나게 할 줄 아는 영민함이 있었다. 둘 중 어느것도 빠질 수 없는 것. 두 가지가 조화를 이루어 이뤄낸 것이다.



사는 동안에 계속해서 생활고를 겪었던 그이지만 시간이 흘러 그의 아내 향안 덕에 많은 사람들에게 그 가치를 인정받고 아직까지도 최고 기록을 갱신하고 있다니! . 얼마나 사랑이 깊으면 남편이 세상을 떠나서도 작품에 애정을 가질 수 있는걸까. 감히 상상 조차 할 수 없는 깊은 사랑이야. 수화가 오래 살아서 본인의 작품이 멀리 멀리 나는 것을 보았으면 좋았을텐데.



스티븐 호킹은 말했다. 세상에는 무엇인가 특별함이 있다. 그것은 경계가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노력에 한계는 없다. 우리는 무언가 할 수 있고 생명이 있는 곳에 희망도 있다. 기적을 만든 것은 하늘이 아니라 지극한 사랑이다. 사랑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



​김환기, 산울림(1973)


그의 작품이 계속해서 신기록을 갱신하며 천문학적인 값으로 팔려나가는 것을 보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의 그림에 깊은 울림을 받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김환기를 모르던 시절에도 나는 줄곧 전시회장에 멈추어 서서 그림을 유심히 바라보고는 했었다. 유명한 화가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본 작품에서 그의 그림은 정말... “사람이 어찌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지?” 라는 생각으로 감탄하고 멈추어 뚫어져라 바라보게 하는 힘이 있었다. 위엄이 있고 터질 것 같은 에너지가 있었다. 하나 하나 그 점들을 그렸을 그를 생각하면 자연히 나도 마음이 울려 무언가를 열심히 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나는 그처럼 끊임없이 나를 시험하고 싶다. 안주하는 생활은 원치 않는다. 설사 주어지더라도 다시금 버린 뒤 추구하는 이상을 위해 끝까지 노력하고 싶다. 김환기가 그랬듯이. 내가 무슨 대단한 사람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저 내 삶을 살아갈 것이라는 믿음이다. 오직 나만이 살아낼 수 있는 삶을 살아내고 싶다.






정현주, 우리들의 파리가 생각나요


“사람 하나 사라졌을 뿐인데 우주가 텅 빈 것 같았다.”



김환기는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오래도록 그를 괴롭힌 목디스크 수술에 들어간 후 , 그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거짓말처럼 한 순간 자신의 짝꿍이 사라져버렸을 때. 다시는 커다란 키로 캔버스 위에 서서 그림에 몰두한 그의 모습을 볼 수 없었을 때. 다시는 5월이 와도 함께 속닥거리는 새들의 소리를 들을 수 없고 파리의 공원을 산책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향안이 얼마나 절망에 빠졌을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나라면 그를 따라가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절망하지 않고 다시금 그녀의 몸을 일으켜 파리로 떠났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살아있는 동안 온 힘을 다해 여전히 그를 사랑하는 일이었다. 그가 죽기 전 꿈꿨던 이상들을 현실로 만드는 일. 그의 미술관을 세우고 재단을 설립하는 일. 그렇게 오래도록 남편의 그림이 사람들의 마음에 가닿을 수 있도록 하는 일, 짧은 생이라도 세상에 와주어 고맙다는 말을 오래도록 전하는 일.. 그녀는 자신의 방식으로 부지런히 게속 수화를 사랑했고 계속 글을 씀으로써 수화의 가치를 세상에 알렸다. 그렇게 수화의 그림을 세상과 만나게 했고 전시를 기획하기도 하며 수화에 대한 사랑을 놓치지 않았다. 결국 77년에 뉴욕에서 열린 김환기 회고전에는 여느때보다 많은 사람들이 왔다. 수많은 업계 사람듷의 찬사가 가득 그 공간을 메웠다. 그렇게 죽고 나서야 그는 자신만의 화랑과 미술관을 가질 수 있었다.



환기 미술관





별들은 많으나 사랑할 수 있는 별은 하나밖에 없다




계속해서 곱씹었던 , 김환기를 떠나보낸 후 향안의 일기. 사랑은 나누는 상대가 누구이냐에 따라 그 순간의 공기와 느낌을 비롯한 모든 것이 달라진다. 어찌되었든 그 사람은 오직 하나다. 하늘에 떠올라 있는 별들이 수없이 많지만 사랑할 수 있는 별이 하나인 이유.



그러나 별이 하나라고 해서 슬퍼할 이유는 없다.  향안이 각별하게 여겼던 이상을 사별로 떠나보낸 뒤 다시 환기를 만나 사랑할 수 있었듯이 , 내게도, 그리고 우리에게도 그런 사랑이 다시금 찾아오리라 믿는다. 하나 밖에 없는 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다시금 별을 찾아 애틋하게 여기게 되는 마음으로.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김광섭,저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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