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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여름 Mar 05. 2022

빈 성을 배회하는 갈색 개

프랑스인들에게는 함부로 휩쓸리지 않는 단단함이 있다. 함부로 다른 나라의 문명에 휩쓸리지 않는 마음. 고유한 에고를 가지고 자신의 것을그대로 지키고 있는 마음. 그런 모습이 사람들의 태도에서도 드러난다는 생각이 들어.



그들과 함께 거리를 걸으며 스며들다보면 자연스레 조급한 마음이 사라진다. 공원에 앉아 책을 읽는 마음, 센느 강을 따라 걷는 마음, 에펠탑을 바라보며 대화를 나누는 마음, 길을 걷다 멈추어 아이들을 바라보는 마음.



짧은 시간에 많은 곳을 보려고 서두르지 말고 어느 한 장소라도 깊게 음미하며 자신만의 순간을 만드는 것 . 이렇게 몇 개의 장소와 내밀한 개인적 관계를 만드는 것이 좋다. 파리는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길을 걷는 사람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생각이 든다.  사치와 허영의 파리가 있는가 하면 예술과 영감의 파리도 있지. 파리는 많은 돈을 가지고 화려한 물건을 좇는 이들에게는 본모습을 감춘다. 공원에 앉아 사람들의 일상을 살피는 일, 한적한 동네의 카페에 앉아 책을 읽으며 커피를 마시는 것은 화려함을 좇는 이들에게는 보이지 않지. 그런 이들에게 파리는 적당히 비위를 맞추지만 결코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는 않는다. 파리의 진정한 속내는 일상적인 풍경에서 드러난다는 생각이 든다. 비오는 날 아무렇게나 비를 맞는 사람들, 목줄없이 다녀도 타인에 전혀 신경쓰지 않고 주인을 잘 따라가는 강아지들, 야외 테라스에 앉아 책을 읽는 사람들, 공원을 뛰어다니는 아이들. 이 풍경을 오래도록 잊지 못할거야.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프랑스 노래를 틀고 말린 장미 향수를 뿌렸다. 창 밑을 내려보니 남자 한 명이 담배를 피며 통화를 하고 있었다. 간간히 외출을 할 때 마주칠 뿐 정확히 뭘 하는 사람인지는 모르겠다.  같은 건물에 살고 있다. 나오자 마자 파리에 온 게 실감이 났다.  벽너머로  들리는 아이들의 웃음 소리, 작은 횡단보도와 그것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 각자 갈길을 걸어가는 사람들.



커다랗고 부피가 커서 가방에 넣을 수 없는 일기장을 몇 장 찢었다. 그랬더니 일기장이 전체가 찢어져버렸다. 너덜 너덜 해져버린 일기장. 일기장을 묶고 있던 본드가 전부 뜯어져버려 결국 작은 사이즈 노트를 하나 구매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드는 생각. 파리 사람들 옷을 너무 잘 입어. 프랑스인들은 에고이스트라는 말은 사실이다. 그들은 옷을 통해, 그리고 애티튜드를 통해 자신을 표현한다. 설사 자신의 역할이 웨이터라도 그 역할에 최선을 다한다.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그 역할에 충실하는 모습이 보인다. 정말로 에고이스트야.



언제쯤 두근 거리지 않을 수 있을까? 길을 걸어다니는 것만으로도 자꾸만 두근 거린다. 여기는 거기인데, 여기는 저기인데. 파리 속에


숨겨진 기호들을 발견하는 일은 즐겁다. 오늘은 정처없이 떠돌다가 빈 성을 만나 오래도록 머물렀다.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곳이 너무 아름다워서 깜짝 놀랐다. 미니 베르사유 같았어. 집 옆에 이런 공간이 있다는게 너무 행복했지.



정처없이 걸어다닌 하루. 파리는 걷기 좋은 도시다. 길을 떠도는 갈색 개가 된 것처럼 파리를 정처없이 떠돌아 다녔다. 떠돌아 다닌 개에게도 좋은 하루를 선사해주는 게 바로 파리다.가고 싶은 곳을 기록해둔 건 많았지만 여기도 가야하고, 저기도 가야하는 의무감을 느끼고 싶지는 않았다. 그냥 가고 싶을 때 가면 되니까. 우선은 거리를 걸으며 파리를 느끼고 싶은 마음이었다.



발견한 빈 성은 마치 미니 베르사유 같았다. 입구부터 나무가 예쁘게 조형되어 있었다. 내부에는 현지인 5명 정도가 있었고 전시를 설명하는 언어는 프랑스어밖에 없어서 읽지 못했다. 다들 진지하게 한 글자 한 글자를 읽지만 나는 그럴 수 없어서 슬펐다. 불어를 잘했다면 나도 오래 머물면서 천천히 볼 수 있었을텐데.  마레지구를 구경했다. 옷가게를 들러 아우터 두 장과 니트 두 장을 샀다. 한국에서 절대 찾을 수 없을 디자인이라 신났다. 프랑스에서만 잘 어울리는 옷. 청록색의 반팔 니트 한장과 핑크색 가죽 잠바, 갈색 니트 집업과 무늬가 현란한 합성 모피. 옷을 산 뒤 젊은 작가들이 그린 그림을 파는 샵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서점을 들어가기도 하고, 신인 작가의 사진전을 구경하기도 했다. 정말로 떠도는 강아지 같지?



파리는 정처없이 걷는 사람의 마음도 풍족하게 만들어준다. 떠도는 갈색개가 된 기분이었지만 나쁘지 않았어.  빈성을 떠도는 갈색 개, 센느 강을 떠도는 갈색 개, 마레 지구를 떠도는 갈색 개, 셰익스 피어 컴퍼니를 떠도는 갈색 개.





센 강을 걸으며 강아지를 산책 시키는 사람들, 런닝을 하는 사람들, 악기 연주하는 영상을 찍는 커플들을 구경하며 카페 드 플로르로 향했다. 왜 그토록 많은 책에서,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리고 많은 영화들이 파리에서의 산책을 그토록 극찬했는지 알 것 같은 순간이었다. 파리는 자꾸만 걷게 만드는 도시다.  힘든 것도 잊어버리게 만드는, 예쁜 도시. 파리!




길을 떠돌던 중 작은 일기장과 엽서 3장을 샀다. 길을 걸으며 수없이 많은 엽서 샵을 보았지만 다들 너무 전형적이었다. 전형적인 것은 싫다. 그나마 예쁘고 디자인 되어 있는 엽서를 파는 곳이 있어 들어가서 엽서를 샀다. 카페에서 엽서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지나가다가 영화관을 발견했다. 알아듣지도 못하겠지만 여기서 영화 한 편을 봐야겠다며 체크를 한 뒤 다시 길을 떠났다. 그렇게 카페 드 플로르를 왔다.헤밍웨이와 피카소, 살바도르 달리가 있었다는 카페.  하지만 그냥 역사가 깊은 관광지 카페에 온 기분이었다. 그 어떤 문인도 이제 이곳에서는 토론할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시끄러워서. 초콜릿이 너무 맛있어서 이내 그걸 잊어버렸지만 문득 그때 그 예술가들은 어떤 음료를 먹었을지 궁금해졌고 웨이터가 친절하다는 생각을 하고는 헤밍웨이의 파리시절 일기를 읽었다. 아무리 가난한 사람도 잘 지낼 수 있고, 글을 쓸 수 있는 파리라는 헤밍웨이의 표현이 와닿는다. 정말 그런 것 같아. 아무튼 읽으면 읽을 수록 헤밍웨이 참 귀엽다. 도스토예프스키를 잘 못 읽었다는 것도.



다시 플뢰르를 나와 걸으면서 생각한 것.


조만간 빠르게 가봐야 할 곳은 오랑주리와 루브르, 에펠탑.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를 가다가 본 풍경. 자그마한 공원에 아이들이 가득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예뻐서 한참동안 멈춰 있었다. 작은 지푸라기를 트럭에 소중히 모으는 아이, 나뭇가지를 들고 잔디밭을 헤집는 아이, 건물 벽에 붙어 재밌다고 낄낄거리는 아이.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아지는 풍경이었지. 그 모습을 보며 D가 내게 한 말을 떠올렸다. 내가 찍은 사진을 보고 그가 한 말.



“넌 작은 것도 유난스럽게 바라보는 시선이 특별하지.”


그가 나를 보는 시선이 이런 것이었을까? 지푸라기를 특별하게 바라보는 아이들, 나뭇가지 하나로도 행복할 수 있는 아이들, 벽에 붙어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아이들. 순수하고 맑은 아이들을 보는 게 참 좋았다.



다시 길을 나와 걸어가다가 캐리어를 깔고 앉아 노래를 흥얼거리는 청년을 보았다.그는 담배와 캐리어 하나만 있을 뿐인데 세상을 다 가진 사람처럼 계속해서 행복하게 노래를 부르고 웃었다. 그리고 그것을 계속 바라보는 나를 향해 하트를 날렸다. 행복해보였어.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에 도착했다. 사실은 별로 기대를 안했다. 왜냐하면, 이곳은 너무 유명하니까. 그래서 사람이 많을 게 뻔하고, 관광지 같을 게 뻔하니까.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현지인들이 아직까지도 애정을 하는 공간이었다. 그러니까, 헤밍웨이가 돈이 없어서 이곳에서 책을 외상하고 글을 썼듯이 정말로 글을 쓰고 책을 읽는 젊은 이들이 모여있었다.  2층 공간에서는 젊은 작가들이 글을 쓰고, 머리를 마구 풀어헤치고 츄리닝을 입은 히피가 클래식 피아노를 치고 있고, 사람들이 아무렇게나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영화에서 튀어나온 사람들 같았어. 책을 읽는 모습은 어찌나 아름다운지. 사실 내가 카페 드 플로르에서 이런 풍경을 기대한 거였는데! 거긴 그러지 않아서 슬펐거든. 그냥 일반적인 카페같았거든.관광객으로 가득차서 너무 시끄러웠거든


하지만 이곳은 여전히 현지인들이 이용을 하고 있었고, 그 명맥을 아직도 이어가고 있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앞으로 이곳을 자주 오게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걷다가 지칠 때 언제든 이곳에 들러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커피를 마시게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하나 또 든 생각은, 한국에도 이런 공간 있으면 참 좋을 것 같다는 생각.



이곳을 자주 오게 될 것 같다. 글을 쓰고 책을 읽는 사람들이 있는 곳. 나도 한달 간 여기서 책을 읽고 글을 써야겠다. 마음이 무척 편안하다. 외롭긴 한데 파리는 그걸 잊어버리게 너무 아름답다. 고독마저 마비시키는 아름다움은 외로움을 잊게 만들어.







에임리스 원더링.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걸으면서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걷는 행위. 배회하는 개처럼. 일본의 사진작가 모리야마 다이도가 한 말. “시내에 나갈 때는 아무 계획없이 나갑니다. 그냥 거리를 걸어 내려가다가 골목길이 나오면 길을 따라 그냥 돕니다. 정말 나는 배회하는 개같이 산책을 합니다. 내가 어느 곳으로 가야 할지는 주변의 냄새로 결정합니다. 그렇게 걷다가 피곤하면 멈추는 거지요. “




배회한 나의 오늘 하루


-  예쁜 

-마레 지구 둘러보며  사기 

-센느 강을 건너 카페  플로르

-세익스 피어  컴퍼니 

-센느 강에서 머물기 

-돌아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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