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겐 언니가 없다. 있었는데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이번 추석에 문득 그 언니에 대해 생각했다.
엄마는 언니를 ‘잃어버렸다’고 했다. 어릴 적 그 얘기를 들으면서 엄마가 참 답답하다고 생각했다. 미아 찾기 센터에 신고라도 하시지, 엄마는 왜 적극적으로 언니를 찾는 노력을 하지 않는지. 그때가 언제였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아마도 초등학교 4, 5학년 무렵이었던 것 같다. 여느 날처럼 동생들과 둥그런 밥상에서 저녁을 먹던 날, 엄마에게 그 얘기를 처음 들었다.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도대체 왜 찾지 않느냐고 거듭 물었지만, 엄마는 아무 말 없이 눈길을 돌릴 뿐이었다. 얼핏 눈물을 보였던 것도 같다.
그 언니는 엄마의 아픈 손가락이었다. 당신이 일생일대 결심을 하고 상경하던 날. 엄마는 오빠보다, 젖을 뗀 지 얼마 안 되었을 어린 언니를 바라보며 오래 눈에 담아 두었을 것이다.
박완서 작가의 책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를 읽으면서 엄마 생각이 났다. 박완서 작가의 어머니도 남편이 황망하게 세상을 떠나자 큰 아이(박완서 작가의 오빠)만 데리고 서울로 떠난다. 내 자식만은 아픈 사람 앞에서 푸닥거리나 하다 치료시기를 놓친 촌이 아니라 서울에서 공부시키겠다는 결심 때문이었다. 그 대목을 읽으며 엄마의 그때 그 마음을 헤아려 보았다. 어쩌면 엄마의 상경도, 내가 이제껏 짐작한 것처럼 ‘이 사람이랑은 더 이상 못 살겠어’가 아니라, ‘내 자식만은 이 두메산골에서 키울 수 없어’가 아니었을까 하고.
오래지 않아 엄마와 아빠는 서울에서 재결합한다. 그러나 엄마는 언니를 다시 볼 수 없었다. 아버지 살아 계실 적에 그 언니에 대해 어렵사리 물었는데, 급체였던 것 같다고 짧게 말씀하실 뿐이었다. 아마도 가장 늦게 전깃불이 들어왔을 그 두메산골에서 체하면 고작해야 손이나 따줬을 것이고, 언감생심 의사를 부를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때문인지 엄마는 막장 드라마를 보시다가도 자식 버리는 것 아니다,라는 말씀을 혼잣말처럼 하시곤 했다. 그 말씀 속엔 단 한 번도 어린 딸에 대한 사랑을 저버린 적이 없다는 고백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늦어버렸다는 자책이 뒤엉켜 있으리라. 어쩌면 엄마와 아빠의 연결, 우리 가족의 재탄생은 언니 덕분이었는지도 모른다. 엄마에겐,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의 유일한 자식이 된 오빠마저 잃을 수 없다는 굳은 다짐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고등학교 때, 교회 친구집에 우르르 몰려간 적이 있었다. 그 아이 앨범을 보다가 새삼 집안 차이가 느껴졌다. 부모님이 해마다 사진관에 데려가서 찍어줬다던, 그 애의 생일 기념사진들 때문이었다. 새하얀 와이셔츠에 재킷, 멋진 모자까지 제대로 갖춰 입은 아이가 해마다 커가는 게 보인다. 어릴 적 내 사진이라곤 돌 무렵 엄마 아빠, 오빠와 찍은 가족사진뿐인 나는 그게 몹시 부러웠다. 그런데 철석같이 믿고 있던 그 사진마저 내가 아니란 사실을 몇 년 전에야 알았다. 사진 속 까까머리 그 아이는 너무 일찍 하늘나라로 떠나버린 나의 언니였다.
몇 해 전, 엄마 아빠 사진을 모아 새 앨범에 끼워 넣으면서 아버지랑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날이었다. 여태껏 나라고 믿어 왔던 사진을 보며 “아니 아빠, 난 왜 이렇게 놀란 표정이야, 머리는 또 왜 박박 밀어 줬대?”라고 했더니, 아버지가 폭탄발언을 하신다. “야. 그거 너 아니다.” 의아해하는 내게 아빠가 덧붙여 말한다. “늬 오빠랑 비교해 봐라. 너랑 일곱 살 차인데 오빠가 너무 어리잖니.”
맞네. 오빠가 초등학교 1학년 얼굴이 아니네. 난 당연히 오빠 다음엔 나니까 나라고 생각했던 건데, 엄마는 그동안 아픈 상처 때문에 사실대로 얘기해 주지 않았던 것이다.
이로써 어릴 적 내 첫 사진은 여섯 살 무렵에야 등장한다. 유치원에 입학하기 위해 찍었던 증명사진. 두 살 터울 동생이 둘이나 생겨나고, 아버지 사업이 잘 되면서 번듯한 우리집도 생겼지만 카메라는 여전히 사치품이었던 모양이다. 우리 동네에 배경화면이 멋진 이동식 사진관(아마도 손수레를 개조한)도 자주 찾아왔건만, 엄마는 흔하디 흔한 그 사진마저 찍어주기 않았다.
내 사진이 아닌 게 돼 버렸지만 그래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세상에 온 흔적도 없을 뻔한 언니 모습이 단 한 장의 사진에 남아 있으니 말이다. 온 가족이 장에 갔을 때였을까. 다 함께 엄마 친정에 다녀온 길이었을까. 아빠가 웬 바람이 불어 사진을 찍자고 했을까. 자 찍습니다, 하나 둘! 소리에 조명이 번짝 하자 언니가 놀랐던 모양이다. 겁먹은 표정이지만 사진 속 언니는 이목구비가 뚜렷해 보였다. 언젠가 작은 아버지한테도 들었던 것 같다. 네 언니 예뻤다고, 그리고 첫 딸이라 온 가족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고. 할머니가 아들만 내리 여섯을 낳은 집안에 드디어 여자 아이가 처음으로 태어났으니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데 선물처럼 왔다가 너무 빨리 가버렸으니 다들 얼마나 슬펐을까.
그 언니가 살아 있었으면 어땠을까, 가끔 생각하곤 한다. 언니는 분명 나보다 얘기도 잘 들어주고 살가웠을 것 같은데. 나는 사실 언니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놀랍게도 어린 시절 여동생을 챙겨주거나 놀아 줬던 기억이 별로 없다. 나는 점잖은 장녀 노릇을 했고 동생들은 자기들끼리 놀았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철이 든 후에야 우리 자매는 가까워졌다. 둘 다 까칠하지만 매일 서로의 수다를 받아줄 줄 아니, 이것만으로도 고맙고 소중하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언니를 떠올리며 언니 노릇에 대해 생각한다. 이제야 철이 드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