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장은 그림 언어에 가깝다.
바벨론 제국의 포로로 붙잡혔다가 귀환한 팔레스타인 공동체는 자신들의 신앙 공동체를 재건하기 위해 제사장들을 중심으로 성경을 대대적으로 편찬한다(역사비평학자들은 성경 내에 등장하는 이러한 관점 또는 문체를 'P문서'라고 부른다).
제사장적 관심('P문서')에 의해 최종적으로 편집되고 재구성된 책 창세기의 1장은 "혼돈과 공허와 어둠 속에 질식한 땅"(1:2)을 일곱 날에 걸친 창조를 통해 세상을 당신의 아름다운 '성전과 같은 모습'으로 만들어가시는 하나님의 우주적 여정을 시적인 운율을 담아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궁창(하늘)을 통해 땅을 뒤덮은 물을 두 영역으로 나누셨는데(6), 여기서 궁창은 히브리어로 '매우 단단한 것을 두들겨서 만든 넓고 평평한 구조물'을 뜻하는 '라키아'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고대인들은 하늘을 이러한 건축 구조물의 개념으로 생각했다. 여기서 궁창 위의 물, 즉 하늘 위의 물은 유대인들에게 천상 위 하나님이 계신 성전을 의미한다. 이러한 해석의 근거는 구약의 예언서로부터 출발하여 신약의 요한계시록까지 이어지는 고대의 성경 저자들의 우주관에 기인한다. 물론 창세기 1장의 최종 저자가 누구이며 무슨 의도와 의미로 이 텍스트를 저술했는지는 그 누구도 확신하여 답할 수는 없겠지만 필자는 성서 본문은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다른 성서 본문들의 세계관과 밀접한 영향을 주고받았으며 결과적으로 총 66권의 모든 성서 본문들은 오랜 역사 속에서 서로의 세계관을 오밀조밀하게 상호작용하면서 형성되어 오늘날의 한 권의 책이 되었다고 믿는다. 따라서 창세기의 우주관은 예레미야나 이사야, 에스겔 등과 같은 예언서의 우주관과 밀접한 연관이 있으며 이러한 우주관이 요한계시록 저자에게까지 이어져 일맥상통한 천상의 성전 이미지를 그려낼 수 있었고 이러한 우주관을 성서를 읽는 대부분의 고대인들 공유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믿는다(그레고리 비일). 필자는 이런 방식으로 텍스트를 읽고 이해하는 것이 성서를 저술하고 읽었던 고대의 성서 저자 및 1차 독자들의 낯선 세계관에 우리가 그나마 밀접하게 다가갈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해석 방식의 개념을 전문 용어로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이라고 한다.
이렇듯 성서의 저자들은 대부분 하늘 위를 하나님의 영원한 처소 곧 하늘 성전이라고 생각했으며, 구약의 예언자들부터 신약의 요한계시록 저자들까지 그러한 세계관 속에서 성서를 저술하였다. 창세기 저자 역시 하늘 위를 하나님의 영원한 성전이라고 이해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며, 이러한 세계관을 통해 창세기 1장을 이해하는 것이 역사적인 측면에서 볼 때에도 타당하고 생각한다. 이러한 고대 바벨론 포로 후기 귀환 공동체의 제사장적 시선을 통해 본문을 본다면 "궁창 아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여 뭍이 드러나는 이미지"를 우리는 충분히 성전 입구 앞에 보이는 커다란 대형 물두멍과 뜰 마당을 상상할 수 있다(9-10절).
하나님은 궁창 안에 큰 광명체와 작은 광명체를 두어 해와 달과 절기를 주관하게 하시는데(14절), 이는 히브리어로 볼 때 훨씬 더 대제사장과 작은 제사장들을 은유하고 있음을 느끼게 해 준다. 여기서 "해와 달과 절기들"은 히브리어로 유대인의 종교적 제의와 절기를 중심으로 한 달력을 공동체적 약속으로 재확립하고 싶은 제사장적 관심을 나타내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여섯날에 걸친 창조 작업이 끝난 이후 하나님은 일곱째 날을 안식일로 만드시며 쉬신다. 그리고는 그 휴식의 날에 복을 내리신다. 이것이 성경 첫 번째 책 첫 번째 장이 말하고 있는 안식일의 가장 기본적인 기능이자, 본질적인 의미이다(물론 안식일은 2장으로 되어있지만).
이 본문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떠한 진실을 알려주는가?
안식일의 의미를 다시 한번 돌이켜 생각해 보자.
성경이 말하고 있는 안식일의 의미란 무엇인가?
온 세상을 성전과 같은 하나님 나라로 창조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원대한 꿈과 이를 향한 모든 성스러운 노동에 대한 보상이자 쉼의 약속이다. 따라서 안식일은 하나님을 향해 어떠한 제의적 의무와 책임을 다하기 위해 책정된 날이 아니라, 이 세상을 성전과 같은 하나님 나라로 건설하기 위해 하나님의 성스러운 노동에 참여된 모든 백성들에게 보상과 안식을 주기 위한 날인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피조물들은 그저 하나님의 노동에 참여됨으로 그 존재의 의미를 되찾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신약을 한번 바라보자.
'안식일'에 유대인들의 교리와 종교적 책무를 어기신 예수님의 행동은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는가?
예수님은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치시고, 밀 이삭을 베어 굶주린 제자들을 먹였으며, 귀신 들린 자를 고치셨다. 이는 명백히 유대교 교리를 어기는 중범죄였다. 그럼에도 목수의 아들 예수는 일하셨고, 먹이셨고, 사람들과 세상을 고치셨다.
예수님에게 '안식일'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가르치는 내용대로 '아무 일도 하지 말며 오직 종교적 제의를 위해서만 최선을 다 하는 날'로 여겨지지 않았다. 예수님에게 안식일은 아직 쉴 수 없는 날이었다. 그저 매일의 일상과 같이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지 못한 수많은 이들을 떠올리시는 슬픈 날이었으며, 그런 이들에게 작은 하나님 나라를 선물할 수만 있다면 언제든 뛰쳐나가 그들에게 참다운 안식을 선물하기 위해 열심히 노동해야 하는 날이었다. 예수님에게 '안식일'의 안식은 아직 합당하지 않은 것이었다. 좀 더 강하게 말하면 안식일에 회당과 성전에서 드려지는 제사와 예배들은 하나님 앞에 합당한 것이지 않았다. 잠깐이라도 성전을 뒤엎으시며 장사하는 자들에게 채찍질 하시던 예수님의 행적을 떠올려보자. 예수님에게 진정한 안식일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날 딱 하루였다.
"다 이루었다"(요 19:30)
그러므로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는 제사와 예배에 있지 않다. 아직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지 못한 피조물들에게 주어지는 잠깐의 '쉼'에 있으며, 무너진 나와 내 이웃의 일상을 다시 일으키는 선한 창조에 있다. 예수님의 뜻을 받들어 오늘날 우리의 제사와 예배들을 돌아보자. 우리의 예배는 얼마나 '아직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지 못한 자들'에게 '쉼'과 '일으킴'을 선물하는 일에 연결되어 있는가? 그러한 예배에는 자유가 있다. 자유 없는 자들에게 자유가 주어지는 것. 쉼이 없는 자들에게 쉼이 주어지는 것. 이로 인한 자유와 탄성의 예배. 이것이 안식일이 존재하는 이유이며, 창세기 1장에서 야훼 하나님이 그려내고 있는 천지창조의 목적이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무엇을 보여주는가? 예수님은 어떠한 살림도 없이 그저 종교적 제의를 지키기 위한 날로 변질되어버린 안식일을 꾸짖으신 것이다. 죽어가는 이를 외면하고 지나가던 제사장과 레위인의 예배는 어떠한 생명력도 발휘하지 못한다.
예수님은 안식일을 어기면서까지도 병든 자, 귀신 들린 자들에게 작은 하나님 나라를 경험시키는 일을 멈추지 않으셨다.
여기서 더 놀라운 것은 예수님은 고침을 받은 이후 그들에게 종교적 의무와 교리 관하여 그 어떤 것도 강요하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구원을 얻었으니 예배에 헌신하라는 상업적 교리는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에게 있었을 뿐이다.
예수님을 끝까지 따른 극히 소수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귀신 들린 자들, 병 고침을 받은 자들은 고침을 받은 그 자리를 끝으로 예수님과의 만남을 끝맺었다.
하나님이 주시는 안식은 어떠한 것도 요구하지 않는 안식이다. 하나님의 성스러운 노동을 경험하는 것, 그저 거기에 참여되는 것만으로도 피조물들에게 구원과 안식은 주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안식일은 하나님 나라에 참여된 모든 존재들에게 값없이 주어지는 쉼이다. 하나님은 모든 존재들이 동등하게 쉴 수 있는 날을 당신의 노동의 대가로 여기셨다. 온 피조물들의 쉼. 그것이 하나님의 노동의 목적이자 종착지이자, 안식의 참 의미일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주일성수라는 말이 있다. 다시금 이 단어를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예수님에게 주일성수란 무엇일까? 교회 안이 아닌, 교회 바깥에 놓인 아직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지 못한 자들, 아직 성전을 경험하지 못한 자들을 찾아가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창조와 안식을 선물하기 위해 존재하는 날은 아닐까?
창세기 1장의 하나님이 하늘 성전이 아닌 궁창 아래 아직 성전이 되진 못한 흑암 가득한 땅을 향해 내려가 일곱날을 할애하여 천-지창조를 성실히 이행해 나가셨듯, 예수님이 공생애 사역을 성전 내부가 아닌 성전 바깥을 향해, 거룩한 예루살렘이 아닌 하찮고 부정한 갈릴리와 사마리아를 향해 두루 다니며 아직 성전을 경험하지 못한 자들 위해 실천하셨듯, 우리의 주일 역시 궁극적으로는 교회 바깥 저 세상을 향해 존재해야 한다. 참다운 안식을 모든 피조물들이 동등하게 누리기 위하여 말이다.
이러한 주일의 모습은 두 가지로 요약되어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가르치는 안식일에 대한 참다운 자세이다. 우리는 우리의 종교적 제의와 교리보다 한 사람의 생명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교회 바깥에 아직 하나님 나라, 곧 성전을 경험하지 못한 자들을 언제든지 섬기고 그들에게 아무 대가 없이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나님의 창조와 쉼을 선물해줄 수 있어야 한다. 예수를 믿지 않아도, 불교와 이슬람교를 믿더라도, 성소수자라도, 그들에게 선물의 대가를 요구해서는 아니 된다. 그들은 원수가 아니다. 우리와 같이 사랑을 경험하고, 동등한 쉼과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는 자들이다.
둘째는 안식일에 당신의 제자들에게 밀 이삭을 베어 먹이신 예수님의 합리성이다. 우리는 아직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지 못한 자들을 섬기기도 해야 하지만, 이미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여 예수님을 열렬히 따르며 자기를 희생해 교회를 섬기고 있는 제자들의 굶주림 역시 예수님처럼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 교회를 섬기는 자들에게 열정 페이를 요구하지 말라. 당대 최고의 교리를 어기면서까지 최소한의 밀 이삭이라도 베어 제자들을 배불리려하셨던 예수님의 신실하심을 기억하자. 교회를 섬기는 자들을 굶게 하지 말자. 그들을 배불려 하나님 나라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 나가게 하자.
이 두 가지를 모두 현실적으로 충족시킬 수 있는 적용이 무엇인가?
바로 헌금이다. 교회에 소속된 공동체원들이 모두 헌금을 열심히 그리고 신실히 내는 것, 그리고 그 모인 헌금을 하나님과 세상 앞에 떳떳하고 투명하게 잘 운영하여 정말 먹여야 할 자들과 고쳐줘야 할 자들을 살려내는 교회가 되는 것이 참다운 안식을 위해 교회가 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하나님 나라 행동인 것이다. 목사든, 교사든, 성가대원이든 모두가 함께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하는 존재임을 기억하며 그들을 합당하게 먹일 방법을 고안하자.
교회에 모일 헌금에 사명감을 갖고 신경 쓰자.
헌금에 신경 쓴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첫째는 헌금을 신실하게 내는 것.
둘째는 먹여야 할 사람을 합당하게 먹일 수 있는 헌금이 되도록 헌금을 섬세하고 투명하게 그리고 합당하게 배분하는 것.
그러므로 공동체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이 헌금이 모이는 것에, 쓰이는 것에 관심을 갖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필요한 만큼 함께 정성을 쏟아 모으고 그리고 합당하게 쓰일 수 있게 모두가 관심을 기울여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