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을 앞뒀으니 좀 선비답게 써야겠다. 어릴 때 국악원에서 盡人事待天命(진인사대천명)을 붓글씨로 쓴 부채를 받아다 소리를 했다. 사부님의 아버지가 손수 써서 하사하신 귀한 부채였다. 힘줘서 착 하고 펼치는 게 맘에 들어서, 그걸 쓰는 구절만 자꾸자꾸 연습했었다. 부채를 주면서는 그 글에 관한 이야기도 들려주셨다. 이건 적벽가(赤壁歌)에 나온다.
삼국지연의를 창으로 부른 적벽가 중 한 대목이다. 때는 208년. 양자강에서 유비네 동맹에 완전히 박살이 난 조조는 패잔병과 함께 퇴각하고, 제갈량이 그 길로 관우를 보내 조조를 찾아내 죽이라고 한다. 돌아가던 화용도에서 조조는 결국 관우를 맞닥뜨리고 만다. 진퇴양난에 퇴로는 없다. 싸워봤자 소용없는 것을 안다. 이에 조조는 옛 은혜를 생각하라며 자기가 하사했던 관우의 적토마를 그 면전에서 가만히 만져본다. 또 눈물로 호소한다. 마지막 수를 쓴 거다. 맘 약해진 관우가 마지못해 길을 열어 조조 군대를 보내준다. 명령을 거스른 자는 군법대로 처형해야 마땅하다. 허나 제갈량 역시 유비의 간청으로 관우를 살려두기로 한다.
사실 제갈량은 조조가 그때 죽을 운명이 아님을 미리 알고 있었다. 천문에도 다 써 있었다. 죽이지 못할 것이라면 은혜를 갚으라고 관우를 보냈다. 조조가 어떻게 나올지도 알았다. 그저 참모의 자리에서 참모의 일을 하되, 나머지는 하늘이 점지한 순리에 기꺼이 맡긴 것이다. 그때 나온 말이 수인사대천명(修人事待天命)이다. 인간의 번뇌에 앞서가는 거대한 운명의 흐름을, 어떤 직감으로 안다는 것. 그 날선 직감 앞에서 그러나 묵묵히 자기 몫의 도리를 하는 건 아름답다. 거기까지를 내다본 신끼도 좀 미친 거 같다. 선험적 지혜라고 하나. 초연한 군자의 마음은 오히려 대국을 품는다.
‘사람으로서 할 일에 최선을 다하고 하늘의 명(命)을 기다린다.’
때 묻으면 속상하고 정말 오랫동안 아끼던 부채였는데, 트렁크에서 한가위 갑작쇼 하던 날 갖고 가서 놀다 잃어버렸다. 부채 잘 있을까. 그러고 보니 다시 찾을 생각도 안 했다. 고이 간직돼서 누군가 잘 부치고 있기를. 부채도 트렁크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내일부터는 8월 모의고사 친다. 명창의 기운이 온다.
중모리| 쑥대머리 구신형용, 적막옥방으 찬 자리요, 생각난 것이 임뿐이라, 보고지고 보고지고, 한양낭군 보고지고, 오리정 정별후로, 일장서를 내가 못받으니, 부모봉양, 글공부에 겨를이 없어서 이러난가, 연인신혼 금슬우지 나를 잊고 이러는가, 계궁항아 추월같이 번뜻이 솟아서 비취고져, 막왕막래 맥혔으니, 앵무서를 내가 어이보며, 전전반측으 잠 못 이루니 호접몽을 어이 꿀 수 있나, 손가락으 피를 내여 사정으로 편지헐까. 간장의 썩은 눈물로 임의 화상을 그려볼까. 추우오동, 엽락시어 잎이 떨어저도 임의 생각, 녹수부용으 연을 캐는 채련녀와 제롱망채엽으 뽕따는 여인네도 낭군 생각은 일반인데, 날보다는 더 좋은 팔짜, 옥문 밖을 못나가니 뽕을 따고 연 캐겄나, 내가 만일으 님을 못보고 옥중 장혼이 되거지면 생전사후으 이 원통을 알어 줄 이가 뉘 있드란 말이냐. 퍼버리고 앉어 설리 운다.
중모리| 도련님이 하릴없어 말 우에 올라앉으며, 춘향아, 잘 있거라. 춘향이도 일어나서 한 손으로 말 고삐를 잡고, 또 한 손으로 등자 디딘 도련님 다리 잡고, 아이고 여보 도련님, 한양이 머다 말고 편지나 종종 허여 주오. 말은 가자고 네 굽을 치는디, 임은 꼭 붙들고 아니 놓네.
자진모리| 저 방자 달려들어, 이랴! 툭 쳐 말을 몰아 다랑다랑 다랑다랑 다랑다랑 다랑다랑 훨훨이 넘어갈 제, 그때에 춘향이는 따러갈 수도 없고, 높은 데 올라서서 이마 우에 손을 얹고, 도련님 가시는 데만 무뚜뚜루미 바래볼 제, 가는대로 적게 뵌다. 달만큼 보이다가, 별만큼 보이다가, 나비만큼 불티만큼, 망종 고개 깜빡 넘어가니, 아이고 우리 도련님 그림자도 못 보것구나!
중모리| 그 자리 퍽썩 주저앉어, 아이고 이를 어쩔거나! 가네 가네 허던 님은 이제는 참 갔구나. 내 신세를 어이헐꼬? 집으로 가자 헌들 우리 도련님 앉고 눕고 노던 데와, 옷 벗어 걸던 데며, 오리 내려 신 벗듯 디 생각나서 어쩔거나. 웃음 소리를 언제 듣고, 장난을 허든 데며, 언제 볼거나. 아이고 아이고, 내 신세야!
아니리| 호남의 남원이라 허는 고을이 옛날 대방국(帶方國)이었다. 동으로 지리산 서로 적성강(赤城江), 남적강성허고 북통운암허니 금수강산이 번화승지(繁華勝地)로구나. 산지형이 이러허니 남녀간일색도 나려니와 만고충신 관왕묘(關帝廟)를 모셨으니, 당당한 충렬이 아니 날수 있겄느냐. 숙종대왕 즉위 초에 사또 자제 도령님 한 분이 계시되, 연광(年光)은 십육 세요 이목이 청수(淸秀)허고 거지현량(擧止賢良)허니 진세간(塵世間) 기남자(奇男子)라. 하로난 일기 화창하야 사또 자제 도령님이 방자불러 분부허시되 얘, 방자야, 예-이. 너의 고을 내려 온지 수 삼삭(三朔)이 되었으나 놀기 좋은 경치를 몰랐으니, 어데 어데 좋으냐? 도령님. 아 인제 공부하시는 도령님이 승지(勝地)는 찾아서 무엇허시려오? 이애, 네가 모르는 말이로다. 자고로 문장들이 승지 강산을 구경허고 대문장이 되었으니라. 내 이를 터이니 들어 보아라.
중중모리| 기산 영수(箕山 潁水) 별건곤(別坤乾) 소부(巢父) 허유(許由) 놀고 채석강 명월야(采石江明月夜)에 이적선(李敵仙)도 놀아 있고 적벽강 추야월(赤壁江秋夜月)의 소동파(蘇東坡)도 놀고, 시상리 오류촌 도연명(陶淵明)도 놀아 있고 상산(商山)의 바돌뒤던 사호(四皓)선생이 놀았으니, 내 또한 호협사(豪俠士)라. 동원도리(東園桃李) 편시춘(片時春) 아니 놀고 무엇허리. 잔말말고 일러라 (…)
제일 좋아해서 많이 부른 춘향가(春香歌)! 춘향가는 한자도 이쁘다. 봄바람 같은데 어쩐지 처연하고. 춘향이를 생각하면 그렇다.
노래 순서는 반대로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