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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rganized Chaos Feb 13. 2020

*The Power of Vulnerability

티노 세갈의 작품을 살피며

   안드레 레페키의『코레오그래피란 무엇인가』에 인용된 미샤 시겔의 말을 빌리면, ‘춤만큼 붙잡아두기 힘든 예술은 없다.’ 휘발되기 쉽다는 특성은 역사를 거슬러 오랜 시간동안 무용예술의 아킬레스건이었다. 기록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무용은 서유럽을 중심으로 하는 서양예술사에서도 비교적 늦은 시기에야 독립된 예술장르로서의 토대를 마련한다. 근대에는 ‘키네틱한 신체’, ‘끊임없는 움직임’을 무용의 정체성으로 확립하는 전략을 통해 독립된 예술로서의 존재감을 확보했지만, 이는 춤의 멜랑콜리아를 더욱 가속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춤’이 ‘움직임’과 동일시 될수록, 춤은 더 빨리 눈앞에서 달아나게 되었으며, 결국 춤은 언제나 자신의 현재를, 더 나아가 과거를 상실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한다.

   아티스트 티노 세갈은 무용의 아킬레스건을 역이용해 작업을 전개한다. 티노 세갈은 특정한 소재나 주제가 아닌, ‘연출된 상황Constructed Situation’을 통해 작품을 구성한다. 유형의 오브제를 만들거나, 완결된 공연을 기획해, 전시, 상연하는 것이 아니라, 말, 행동, 움직임을 통해서 상황을 연출해낸다. 전시장 지킴이들이 다함께 자리에서 점프를 하며, “This is good, Tino Sehgal, 2001 Courtesy the artist.”라고 외치는 작품 <This is good>, 텅 빈 전시장에서 젊은이들이 다양한 자세를 취하며 키스를 나누고, 접근하는 관객에게 “Tino Sehgal, Kiss, 2004”라고 속삭이는 작품 <Kiss>, 이사도라 덩컨에서부터 머스 커닝햄까지, 역사 속 현대무용가들의 움직임을 재현하며, 스스로가 현대무용의 아카이브가 되기를 자처하는 작품 <무제(Untitled)>, 그리고 관객이 입장권을 내면, 미술관 지킴이가 당일의 뉴스를 낭독하고, 관객이 무언가 대답을 하면, 다시금 미술관 지킴이가 “This is new”라고 외치는 작품 <This is new> 등이 티노 세갈의 작품들이다.  

   티노 세갈의 작품에서 특히 눈여겨 볼 지점은 기획부터 판매에 이르기까지 작품을 구성하는 전 과정에서 기록을 거부한다는 점이다. 티노 세갈의 전시에는 작품과 작가의 사진도, 전시의 시작을 예고하는 개막식도, 작품해설을 위한 텍스트나 전시도록, 전시를 기록한 영상도 (공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섭외되는 공연자들과의 커뮤니케이션 역시 구두로만 진행되며, 움직임이나 호흡법에 대한 지시 역시 본인, 혹은 함께 작업하는 이들을 통해 직접 전달된다. 무엇보다 특이한 지점은 판매하는 과정 역시 증명서나 계약서 등의 서류 없이 오로지 입말을 통해 거래가 이루어지며, 후에 구매자가 이를 대여할 때 역시 오로기 기억을 근거로 대여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티노 세갈의 작품-연출된 상황-은 작가의 기획에서 완결되지 않는다. ‘해석은 관객의 몫’이라는 소극적 의미에서의 관객참여와도, 감상자와의 상호작용을 필요로 하는 인터랙션아트와도 다르다. 티노 세갈의 작품은 ‘물질적 변환을 통해 이미지를 드러내는 작가와 그것을 감상하는 관객’이라는 예술의 암묵적 규칙을 무너뜨리면서 시작된다. 감상자는 현장에 들어서고 나면 무엇을 감상해야 하는지 고민해야 하며, 어디까지가 작품에 해당하는지 혼란을 겪게 된다. 누군가 연출된 것인 양 행동이라도 하거나, 그래서 모든 사람들의 사소한 행동들 중 어떤 것들은 작가가 의도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작품은 더욱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된다. 작가와 감상자, 작품 내/외부의 경계가 모호해진다는 묘사도 적확치 않다. 차라리 현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사건’을 함께 경험하고 있다고 하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티노 세갈의 ‘연출된 상황’은, 미리 다듬거나 가공하거나, 모방하거나, 재현할 수 없는 현실에서는, 모든 개인들이 이와 같이 그저 현장을 경험할 수밖에 없었음을 환기시킨다.

   예술은 대체로 현실을 모방하는데 주력해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러한 예술의 종적이 재생산과 소비, 소유와 깊은 연관을 맺는다. 티노 세갈은 예술의 현장에 소유할 수 없는 무형의 작품을 작동시킨다. 이를 통해 티노 세갈은 현대예술에 깊게 개입된 자본주의적 생산원칙-유형의 작품을 끊임없이 제작해내고 그것을 소유하는-을 실험한다. 안드레 레페키는 무용이 키네틱한 신체를 전략으로 근대의 기획에 동참하면서 신체 내 존재하는 타자적 존재들-정지와 바닥, 즉흥성 등-을 과감히 삭제하고 마스터를 통해 안무를 재현하기를 요구했던 것을 언급한다. 이는 자본주의 사회가 타자적 존재들을 소비가능한 차이로 환원한 것과 맥을 함께 한다. 안드레 레페키는 저서『코레오그래피란 무엇인가』에서 ‘정지’를 통해 안무에 사유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경험하면 사라지고 마는 순간이 아니라, 기억을 통해 매순간을 확장하는 새로운 안무 개념을 제시한다. 비슷하게, 티노 세갈의 작품은 특정한 누군가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현장의 경험에 대한 여러 사람의 기억을 통해 아이디어가 공유되기를 꾀한 것은 아닐까.



   티노 세갈은 스스로 안무가, 혹은 무용가로의 정체성을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의 작업에서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 존재하는 무용의 특성을 발견할 수 있다. 나아가 무용계가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거나, 비평작업에 어려움을 겪는 이유로, 여전히 ‘기록의 어려움’이 꼽는 시점에, 티노 세갈은 오히려 되도록 흔적을 남기지 않는 방식을 택했다. 티노 세갈의 작품은 끊임없이 생산되거나 소비되기는 힘들지만,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의 기억에 경험으로 남게 된다. ‘현재를 잃으면 과거를 잃게 된다’는 데에서 ‘더욱 현재적인 것을 창조하기’로 인식 전환을 꾀하면서, 존재감을 회복한 사례라고 볼 수 있겠다.

   참고자료

안드레 레페키 (2006), 「코레오그래피란 무엇인가」, 현실문화

김수아, “티노 세갈: 무제한의 자유, 생각의 미로에서 유영하다”, 미술세계,

 http://www.mise1984.com/magazine?article=1269

임근준, “입으로 판매되고, 기억으로 저장되는 작품”, 한겨레21, 2011. 03. 16,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29216.html

“티노 세갈”,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faintb86&logNo=106114074&proxyReferer=https%3A%2F%2Fwww.google.com%2F


(성균관대학교 무용학과 2019학년도 1학기 무용음악 수업의 기말과제로 작성된 글입니다. 발표자료로 제작한 피피티가 이미지 파일로 첨부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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