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Dancer>와 <어느 책방의 이야기> 비교 논평
기록과 표현, 주관과 객관 혹은 자연과 인위적인 것 등의 주제는 확실히 매력적이다. 두 대립항을 놓고 ‘무엇이 진짜인가?’라는 질문만 던지고 나면 논의가 시작된다. 대립하는 요소를 비교하기 위해 극단적인 상황을 가정하고, 또 ‘진정한 무엇’ 등의 수사가 등장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에 이르러 그 모든 요소가 결코 개별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현실을 떠올리면, ‘정도의 차이’로 문제에 접근할 수밖에 없음을 받아들이게 된다.
최정호의 <Dancer>와 정호윤의 <어느 책방의 이야기>를 비교분석 하는 일은 결국 ‘감독의 적극적인 연출, 혹은 소극적인 자세로의 관찰’이라고 하는 다큐멘터리 영화의 해묵은 논쟁을 반복하는 일이 될 것이다. 구상과 추상, 그리고 리얼리즘과 심볼리즘의 주제를 통해 수도 없이 다루었던, ‘물리적 세계 복제와 정신적 실재 구현 중 무엇이 진실에 가까운가’를 굳이 한 번 더 되풀이하는데 일말의 죄책감을 느낀다. 영화평론가 앙드레 바쟁의 글을 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궁색한 변명을 대신하고자 한다.
그런데, 이러한 연출가들 사이에 정도의 차이야 있다고 해도 다소간 명백하게 인정되는 이 같은 관련성들은 우선 1930년 시기에 있어서의 단층을 넘어서는 다리가 놓일 수 있다는 것, 무성영화에 들어있는 몇몇 영화적 가치는 발성영화 속에서도 살아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그러나 특히 무성영화를 발성영화와 비교하는 것보다도 이 양자를 통해 영화적 표현의 근본적으로 다른 몇 가지 양식상의, 구상상의 동족 영화들을 비교해보는 것이 보다 더 중요하다고 하는 것을 증명해준다. (『영화란 무엇인가?』, 앙드레 바쟁, 사문난적, 101쪽)
두 다큐멘터리 영화 <Dancer>와 <어느 책방의 이야기>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소리를 다룬다. <Dancer>에서 소리는 하나의 몽타주 요소이다. 감독은 주인공의 일상에 인터뷰를 얹어 놓으면서 관객들이 ‘평범한 젊은이의 일상’이 아닌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이 흔들리고 있는 한 무용수의 일상’을 발견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영상에 등장하는 객관적 이미지-출근하고, 보고서를 작성하고, 회의에 참석하는 젊은이-와 인터뷰가 상호작용하면서 감독의 의도를 만든다. 연출자가 겨냥한 내면적 진실을 묘사하기 위해 현실에 없는 내면의 소리를 영상에 덧붙인다.
반면 <어느 책방의 이야기>에서는 소리와 이미지가 어긋나는 경우가 거의 없다. 가만히 서서 무언가를 읊거나 앉아서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의 이미지는 병렬될 경우 단조로운 이미지의 연속이 된다. 그럼에도 감독이 소리와 이미지를 분리하지 않았을 때, 그 결정은 하나의 의도로 읽힌다. 감독은 ‘서점 사람들의 이야기 중 어떤 이야기를 담을 것인가’까지만 결정하고, 후에는 관객들이 대화를 나누는 인물들의 표정과 움직임을 관찰할 수 있도록 한다. 감독은 키네틱한 이미지와 편집을 포기한 대신 소리와 함께 인물들의 ‘현실’을 덜 가공된 형태로 제시했고, 결국 이 선택이 매력적인 캐릭터라는 장점으로 승화되어 다시금 단조로운 이미지를 극복하는 요인이 된다.
앙드레 바쟁이 무성영화와 발성영화의 중요한 차이를 지적하고 있는 글 「영화 언어의 진화」를 인용하자면, <Dancer>의 경우는 현실에 소리를 덧붙이고 있으며, <어느 책방 이야기>의 경우는 현실의 어떤 소리를 영화를 통해 드러내고 있다고 평할 수 있다. 사실 소리뿐 아니라 이외의 많은 부분에서, <Dancer>는 영상의 조형성과 몽타주와 관련한 영상 신봉자의 영화에, <어느 책방의 이야기>는 객관적 현실을 더 잘 보여주는 것을 최선으로 여기는 현실 신봉자의 영화에 가까움을 알 수 있다.
영화 <Dancer>의 구조는 ‘쿨레쇼프 효과’의 구조를 차용한다. 서로 비슷한 세 번의 같은 연습 장면 사이사이에 각기 다른 일상을 배치한다. 물론 세 번의 이미지를 통해 상이한 의미를 창출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차이를 갖는다. 그러나 여전히 두 이미지의 결합을 통해서 객관적인 이미지 밖의 새로운 의미를 생성한다.
<Dancer>가 감독의 관찰보다는 의도와 전략을 통해 구성된 영화라는 것이 가장 명확하게 드러나는 부분이다. <Dancer>의 몽타주는 병렬되는 이미지 자체보다, 두 이미지가 붙는 방식이 몽타주의 효과를 자아낸다. 감독은 관객의 기대를 역행한다. 무용수가 등장해 몸을 풀고 나서, 관객이 ‘아, 이제 춤을 추겠구나.’하는 지점에 춤이 아닌 평범한 일상을 배치한다. 이와 같은 과정이 세 번이나 반복될 때 관객들은 답답함의 정서를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 정서는 실제로 무용수로의 정체성을 갖고 살아가는 주인공이 춤을 추지 않는 일상을 살아갈 때 느끼는 내면의 상태를 공감하게끔 한다. <Dancer>는 피부와 맞닿은 물리적 세계보다 그 내부의 세계에 집중하고 있다.
직후에 다룰 <어느 책방의 이야기>에서는 감독이 주인공과 관객 사이를 매개하고 있다면, <Dancer>는 감독이 주인공의 삶을 매개로 관객에게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Dancer>는 관객의 세밀한 관찰이 요구되는 부동의 이미지를 제공하지 않는다. 이는 관객을 상대로 한 실험이자 적극적인 액션이며, 이때 ‘관찰’이 아닌 ‘체험’이 관객의 몫이 된다. 영상에 드러나는 이미지가 얼마나 가공되었느냐를 척도로 평가하면 <Dancer>는 <어느 책방의 이야기>에 비해 덜 현존에 가까우며, 더 재현적이다. 하지만 <Dancer>를 통해, 비록 주인공이 실제로 마주하는 현실과는 조금 괴리가 있더라도, 멀리서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과 비슷한 정서를 직접 체험할 수 있다면? 그때 관객이 느끼는 정서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과연 무엇이 현존이며, 무엇이 재현인가.
제대로 춤을 추는 장면이 단 한 장면도 등장하지 않는 이 영화의 제목이 <Dancer>임에도 그것이 관객을 기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전략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만일 이 영화가 시야에 포착되는 순수한(?) 현실을 약속한 영화였다면, 감독이 뒤로 물러나 있는 만큼 제목을 통해 관객을 통해 무엇을 관찰하라는 암시를 주어야 한다. 하지만 <Dancer>는 감독의 적극적인 편집으로 그때그때 관객에게 무엇에 집중해야 하는지를 명확히 지시한다. 그 무엇들이 겨냥하는 목표가 바로 ‘기대를 저버리는 데에서 오는 답답함’,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이 그렇지 않게 되었을 때 느끼는 당혹감’인 것이다. ‘불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과 ‘불쾌하게 이야기하는 것’은 다르다.
만일 혹 관객이 이 영화가 객관적 현실을 보여주는 영화인지, 감독이 의도를 갖고 이끌어가는 영화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느냐고 반문한다면, 흑백 영상이 바로 그 암시라고 대답할 것이다. 감독은 이미 색채를 삭제하며 물리적 현실을 왜곡하였다. 관객의 몫은 감독이 현실을 왜곡하면서 강조하려고 한 지점을 파악해내는 것이다. <Dancer>의 경우에는 춤이 아닌 일상에서 드러나는 몸의 움직임과 형태가 그것이다. 유럽의 오래된 표현주의 영화들의 경우 ‘흑백’이란 것이 유일한 옵션이었겠지만, 현대에 와서 표현주의와 흑백, 조형성의 강조, 그리고 인간의 내면 표현이 한데 묶여 하나의 개념을 구성하게 되었음을 떠올린다. <Dancer>에서 감독은 물리적인 현실을 가공하기를 주저하지 않고 있으며, 이를 통해 관객에게 의미를 발견하라고 하기 보다는 감독이 현실에서 발견한 의미를 표현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영화 내의 메시지를 명확히 하기 위한 매뉴얼, 일종의 ‘영화 만들기 법칙’을 따르다 보면 영상은 점점 현실 그 자체와는 멀어지기 마련이다. 현존하는 것들은 애초에 언어나 법칙, 규칙과 같이 완벽하게 분절되지 않고 모호하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물론 현실의 특정 부분을 강조하고, 그 강조점을 위해 이외의 부분을 조금 톤다운 시키는 것은 현실을 전달하는 탁월한 하나의 방법이다. 하지만 그 방법이 ‘현실’이라는 목적이자 출발점을 망각할 때, ‘원래 현실은 그렇지 않잖아!’라는 메시지가 힘을 얻는다. <어느 책방의 이야기>는 공간의 중첩을 통해 ‘사실 현실은 이렇잖아!’라고 말한다.
책방의 공간적 특성에 대해 언급해야 한다. 좁은 공간에 최대의 수납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책방은 대개 책장으로 둘러싸인 미로와 같이 여러 겹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의 방에서 다른 방으로 이동하는 문 역시 책으로 둘러싸이면서 액자와 같은 형태를 띤다. 대부분의 영화는 관객이 감독의 의도를 잘 읽을 수 있도록 다층적인 공간, 동시다발적 사건을 좀처럼 허용하지 않는다. 공간을 중첩하더라도 감독은 초점을 통해 각 층위에 우선순위를 부여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앙드레 바쟁이 이야기하는 공간적 깊이를 사용한 데쿠파주를 통해 애매모호한 현실을 그대로 관객에게 전달한다. 영화의 시작 시퀀스, 두 번째 숏은 언뜻 보기에는 흔한 숏-리버스숏의 리버스숏에 해당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글을 낭독하는 인물 너머로 보이는 또 다른 선명한 두 인물을 발견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감독의 눈에 비친 주관적인, 혹은 내면의 진실보다 객관적인 현실을 드러내고자 하는 의지는 인물을 담아내는 방식에서도 일관되게 드러난다. <어느 책방의 이야기>에는 명확한 중심인물이 없다. 상징보다도 눈에 보이는 것 그대로 관객들은 실제 풀무질 책방이 한 중심인물을 통해 운영되고 있지 않음을 파악할 수 있다. 감독은 서브캐릭터처럼 등장하는 인물들을 중심인물에 의존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중심인물과 관련이 없는 서브캐릭터의 이야기도 편집하지 않는다. 관객은 감독이 지정한 중심인물과의 관계를 통해서가 아니라 개별인물들을 독립체로 관찰할 수 있다. 영화의 중후반부에 중심인물이라고 느꼈던 인물이 돌연 퇴근을 감행함에도 관객이 당황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이다. 이 영화의 캐릭터가 매력적인 것은 단순히 감독이 어쩌다 우연히 좋은 인물을 만났기 때문이 아니다.
영화의 주된 공간인 풀무질 책방은 마침 지하에 위치해있다. 카메라가 퇴근하는 이의 뒤를 밟으며 지상으로 올라올 때, 무언가를 덧붙이기보다는 눈길이 잘 닿지 않는 것을 드러내는 이 영화의 운동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서점이라는 공간은 실상 온갖 메타포의 집결지이다.-그것도 문자로 이루어진- 그럼에도 감독은 최대한 뒤로 물러나-서점이 좁기 때문이기도 하다-의미에의 욕심을 내려놓고 현실을 관찰한다. 심지어 수많은 교훈적인, 의미과다의 이야기 역시 캐릭터의 개성으로 흡수된다. 사람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촬영할 때, 탁월한 몇 경우를 제외하면, 감독의 연출이 잘 관찰된 한 인물의 개성보다 훌륭하기 힘들다고 한다. 이 영화에는 그 관찰의 미덕이 잘 드러나 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이 다큐멘터리 촬영을 인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관객에게 숨기지 않는 것은 두 영화의 공통점이다. 감독들은 다큐멘터리 촬영 역시 인물들의 삶에 일어나는 하나의 의도된 사건임을 인정하고 있다. 두 감독은 모두 애초에 완벽히 순수한 현실을 담아내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지 않다. 이데아적 성격의 유일한 현실을 염두에 두고 무엇이 나은가를 겨루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다양한 현실의 양태 중 자신이 생각하는 현실을 더 탁월히 묘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은 것이라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두 감독의 선택이 근본적인 차이를 갖는 것처럼 분석하였지만 그것은 서로 상충하는 차이가 아니다. 두 영화에 드러난 대립항이 아닌 두 축을 이용해 정도의 균형을 찾으며 새로운 영화를 탐구할 때, 더 다양한 현실을 발견할 수 있다.
(성균관대학교 영상학과 2018학년도 1학기 다큐멘터리의 기초 수업의 기말고사 과제로 작성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