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이야기>, <미행>, <블레이드 러너>,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두 남녀의 이혼 과정을 다룬 영화의 제목이 왜 <결혼 이야기>일까. 이혼 역시 결혼의 일부이자 결혼의 마지막 단계다. 이혼이 끝나야, 결혼이 끝나는 것이다. 사랑하지 않아서 이혼하는 것이 아니다. 혼자서 태어난 인간이 누군가와 함께 평생을 살아가는 일에는 사랑이라는 잔잔한 파도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미행>에서, 남의 집에 몰래 들어간 도둑은 일부러 남의 집 진열장을 어지럽히면서 자신이 다녀갔음을 알린다. 관광지에서 기분 좋은 마음으로 산 기념품들, 고생해서 만들어낸 직소 퍼즐, 대개 이런 존재들은 우리 시선 앞에 항상 존재하면서도 시간이 지날수록 그 존재가 흐릿해진다. 사라지고 나면, 혹은 사라질 뻔한 위기에 들고 나면 그제야 다시 그 물건이 소중해진다. 뒤늦게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하고, 다시 거기 얽힌 시간과 노력들이 떠오른다.
이혼도 마찬가지다. 결혼 생활 내내 익숙해져 있던 것들 혹은 애써 무시했던 것들이, 다 끝이 난다고 하자 비로소 모든 게 다시 보인다. 사랑하지 않아서 이혼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이혼한다고 해서 관계가 끝나는 것도 아니다. 사람 사이의 일들 중 어느 것도 이분법으로 갈리지 않는다. 더군다나 그 사이에 짙은 감정과 긴 시간을 남겼을 결혼 속에는 얼마나 많은 복잡한 관계가 얽혀 있는가. 이 복잡한 관계들이 변호사들의 거친 언쟁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잔혹하다. 서로의 잘못을 따지고 서로의 이윤을 가르고, 아들과 함께 할 수 있을 시간까지 비율에 맞추어 나누고 나면, 비로소 결혼이 끝이 난다.
모든 순간 속에서 경험하는 중인 결혼생활도, 관광지에서 사 온 이후 줄곧 거실 한편을 차지하고 있는 기념품도, 왜 이렇게 희미하게 인식될까. 그들은 종종 우리의 시선에서 배경으로 존재했지만, 우리는 한 번도 그들을 응시하지 않았다. 응시가 없으면 존재도 없다. 김춘수 시인의 꽃에 등장하는 문구처럼, 이름을 불러주어야 비로소 꽃이 된다. 누군가 응시해야만 그것은 비로소 존재한다. 응시란 단순히 시야에 담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책을 읽을 때 아무 생각 없이 눈만 움직이면 모든 의미들이 다 증발하는 것처럼, 그 사람에게 온전히 집중할 때에 그것을 비로소 응시라고 부를 수 있으리라.
리들리 스콧 감독의 <블레이드 러너>에서 응시는 오직 인간만이 가진 재능이다. 그 사람이 인간인지 레플리컨트인지 확인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실존에 관해 물음과 동시에 카메라를 켜서 그 사람의 눈동자를 관찰해야 한다. 눈은 곧 사람의 창이다. 창 밖에 있는 사람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방 안에 스스로가 존재해야 한다. 그래서 응시는 권력이다. 응시당하는 자에게 실존의 권한을 부여하는 권력이다.
정말로 응시는 권력이 맞을까?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이 주종 관계에 대해 반기를 든다. 화가가 그림을 그릴 때 피사체를 바라보는 행위는 화가가 피사체에게 응시라는 권력을 발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피사체 역시 화가를 바라보고 있다. 응시라는 권력을 발휘하려면 화가 자신의 존재가 선행되어야 하는데, 그 존재는 과연 어디서 오는가?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응시자와 피 응시자의 관계, 예술작품과 수용자의 관계를 대등하게 바라본다. 그린다는 행위는 대상과 화자 모두에게 존재를 부여한다. 비극적으로 기억될 낙태라는 경험을 한 여성에게, 나머지 두 여성이 그 당시의 장면을 재현하면서, 그림으로 남기자고 제안한다. 동등한 관계에서 함께 이루어진 일련의 예술적 경험들을 통해서, 그녀에게 이 날의 경험은 하나의 초월적 경험으로 승화될 것이다. 결말부에는 카메라의 눈을 빌려 기어이 관객까지도 이 응시의 수평적 관계에 끌어들인다. 예술 속의 응시는 두 존재의 공유된 결합으로 다시 한번 치환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