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우보이의 노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엔딩노트>
우리는 흔히 인생의 말년을 생각할 때에, 백발노인이 되어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과거의 삶을 회상하며 천천히 눈을 감을거라고 착각하곤 한다. 하지만 죽음은 생각보다 우리와 훨씬 가까운 곳에 있다. 언제나 우리 바로 옆에서, 가까워지지도 멀어지지도 않은 채 함께 걷고 있다. 소파에 누워, 자기 인생을 회상하며 눈을 감을 기회는 우리 중 아주 극소수의 행운아들만 가질 수 있는 행운이다.
코엔형제는 이러한 죽음의 특성을 자신의 영화에서 얘기하길 좋아하는 감독이다. <카우보이의 노래>는 여섯개의 단편으로 구성된 작품인데, 그 중 두번째 이야기에서 코엔형제는 자신들 특유의 기이하고 어두운 유머로 죽음을 표현해낸다. 죽음의 위기에 처한 주인공이 우연을 계기로 살아남게 된다. 그러나 잠시 후 다시한번 죽음의 위기에 처해 사형대에 오르게 된다. 이번에도 우연이 자신을 살려줄것을 기대하면서, 자신의 사형을 바라보고 있는 군중 중 한 여자와 윙크를 나눈 뒤, 카우보이는 곧바로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자신이 세상의 주인공이라고 착각하지만, 죽음은 가차없이 누구에게나 평등하다. 모든 죽음이 반드시 극적이지만은 않다. 영화 속에서도 수많은 말을 남기고 천천히 죽어가는 주인공이 있는가하면, 아무 말도 못하고 순식간에 사려버리는 단역들이 있다. 누군가의 죽음은, 변명 한마디 남길 시간조차도 주지 않는다.
코엔형제의 죽음에 대한 암울한 비전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더욱 창의적으로 드러난다. 제목에서부터 노인이 되어서 천천히 소파에서 죽어갈 인생은 없다고 이야기한다. 극 중 악역 안톤 시거는 죽음 그 자체를 형상화한 캐릭터다. 길에서 만나는 자들과 동전던지기를 하고, 동전의 면의 방향에 따라 그를 살리거나 죽인다. 우연히 돈가방을 얻게 된 주인공은 안톤 시거를 피해서 도망치고, 안톤 시거는 그를 쫓으며 늙은 보안관은 안톤 시거를 쫓는다. 하지만, 주인공과 늙은 보안관 두 사람 모두 무력하다. 아무리 노력해도 보안관은 죽음의 발끝조차 따라갈 수 없으며 아무리 도망쳐도 주인공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이다. 그래서 영화는 주인공의 죽음의 순간도 극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애초에 승부가 안되는 싸움이었기에, 덤덤하고 평범하게 보여준다. 대신에, 영화 속 극적인 순간은 의외의 타이밍에 등장한다. 길을 걷던 안톤 시거가 갑자기 교통사고를 당하는 장면이다. 죽음 그 자체로 보였던 인물조차, 우연 앞에서는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니. 이 얼마나 지독한 염세란 말인가.
죽음을 가까이서 경험하는 것은 우리에게 간접적으로나마 죽음을 떠올려볼 기회를 마련해준다.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 만약 우리가 언제 죽을지 미리 알 수 있다면, 그건 크나큰 축복이다. 당신이 엄청난 돈을 가지고 있거나 엄청난 커리어를 이루어낸 사람이라면,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게 된 그날부터 꽤나 바빠질 것이다. 아직 해내지 못한 버킷리스트들이 꽤 많을테니까. 그러나 조금 더 현실적으로, 그리 대단한 걸 해내지 못했고, 당신이 죽은 후에 빈자리의 무게까지 짊어지고 살아가야할 가족들이 있다면, 당신은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 영화 <엔딩노트> 속 평범한 샐러리맨의 죽음이 좋은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그는 시한부 판정 앞에서 부정하지도, 분노하지도 않는다. 죽음을 겸허히 받아들이면서, 그에 대한 준비로 엔딩노트를 작성한다. 그가 완성해가는 엔딩 노트는 버킷리스트와는 다르다. 남은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이룰것인가에 대한 고민의 결과가 버킷리스트라면 샐러리맨의 엔딩노트 속에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의 결과들이 빼곡하다. 장례를 성당에서 치르기 위해서 인생의 말년부터 천주교를 믿기로 하고, 그저 어머니와 잠깐의 여행을 떠난다. 그는 차분하게 죽음을 준비하고, 차분하게 떠난다.
코엔형제가 보여주듯이 우리는 언제나 죽을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방금 평범한 샐러리맨의 죽음을 목도하였다. 자, 이제 다시 현실이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