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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정화 Mar 06. 2020

형편없는 걸작선

<매트릭스>, <다크 나이트>, <아바타>

  모두가 좋아하는 영화를 나도 좋아한다고 말하기 위해선, 별다른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모두가 싫어하는 영화를 싫어하는 경우에도 그렇다. 모두가 싫어하는 영화를 좋아하는 경우에는, 조금 이상하게 보일 수 있겠지만 적어도 남들에게 내 취향을 인정받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그렇다면, 남들 모두가 입을 모아 명작이라고 이야기하는 영화를 비판하려는 경우엔 어떨까? 그건 꽤 많은 용기가 필요한 행동이다. 아마도 모든 사람들이 입을 모아 그 영화를 칭찬하는 탓에, 자신도 찝찝한 마음으로 그 영화 좋았다고 얘기해본 경험이 다들 한 번쯤 있을 것이다. 별로였다고 말하기 위해선, 너무 많은 사족을 덧붙여야 한다. 합당하고 치밀하게 자신의 논리를 설명해야만 자신의 생각을 이해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부터,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입을 모아 칭송하는 여러 작품들에 대한 비판을 해보려고 한다.

영화 '매트릭스' 스틸컷.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주)

  <매트릭스>는 왜 걸작으로 추앙받을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매트릭스가 칭송받는 가장 큰 이유는 이전 세기의 영화들과는 다르게, 이미 존재하던 수많은 레퍼런스들을 모아 새로운 스타일로 재탄생시킨 최초의 경우이기 때문이다. 매트릭스는 여러 예술매체에서 가져온 온갖 모티프를 늘어놓고 다양한 해석과 사유의 기회를 남겨두는 영화이다. 예를 들면, 기독교적인 상징이나, 통속의 뇌 이론, 그리고 홍콩 영화 스타일의 와이어 액션 등등, 이미 존재하는 것들을 짜깁기하여 새로운 독창적인 스타일을 만들어내고 있다.

  분명히 '최초'의 시도는 그 자체로서 칭송받을만하다. 하지만 그 최초의 시도가 여전히 이후의 세대에서도 충분히 사랑받을만한 가치가 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어떤 레퍼런스를 가져왔느냐가 아니라, 그 레퍼런스를 어떻게 활용해서 어떤 스타일을 창조했는가에 집중해서 영화를 본다면, 매트릭스가 얼마나 형편없는 영화인 지 알 수 있다. 대다수의 레퍼런스들이 깊이 있는 활용이나 은유로 남지 못하고, 보여주기 식으로 겉돈다. 주인공을 돈을 넣어두는 책이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이다. 그걸 또 클로즈업으로 보여준다. 이 영화가 철학적인 영화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철학적인 레퍼런스를 과시하는 이영화의 스타일이 세련되다곤 결코 말할 수 없다.

  7,80년대 홍콩영화의 액션 스타일을 가져온 것 역시 이 영화의 특징이다. 그것을 제대로 버무려서 새로운 스타일을 창조해냈는가? 아니다. 매트릭스의 와이어 액션은 그 당시에도 형편없었고, 지금 보기에도 형편없다. 매트릭스는 고작 20년밖에 지나지 않은 작품이지만, 대다수의 스타일들은 벌써 낡아버렸다. 그보다 수십 년 전에 나온, 우리가 훌륭하다고 칭하는 영화들은 모두 여전히 유효한 스타일을 발산해내고 있다. 매트릭스보다 불과 5년 후에 나온 쿠엔틴 타란티노의 <킬 빌>이 다양한 레퍼런스들을 얼마나 완벽하게 버무려냈는지 생각해보자. 결국 매트릭스는 이러한 스타일의 선구자였을 뿐, 낡고 형편없는 스타일만 남은 영화다. 여기서 20년이 더 지난다 해도, 이 영화가 명작의 반열에 남아있을 수 있을까? -아니다.

영화 '다크나이트' 스틸컷.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주) , (주)해리슨앤컴퍼니

  <다크 나이트>가 절대로 형편없는 영화는 아니지만, 분명히 과대평가된 영화이다. 히스 레저의 조커 연기가 완벽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블록버스터 히어로 영화지만 감독의 작가주의적인 특성들을 놓치지 않으면서, 철학적이고 심도 있는 메시지와 대중성 모두를 잡아낸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마냥 극찬할 만한 영화는 아니다. 이 영화의 단점은 크리스토퍼 놀란의 작가주의적 특성 그 자체에서 출발한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에는 관객이 개입할 그 어떤 틈도 허용하지 않는다. 모든 사건들이 도미노처럼 정확하게 딱딱 맞아떨어져 야만 한다. 화려한 기교들이 정확한 타이밍에 딱 딱 등장할 테니, 관객은 그저 입 벌리고 바라볼 것, 그뿐이다. 때문에 다크 나이트의 서사는 큰 하나의 사건이 아닌, 일련의 사건들의 빠르고 연속적인 배열을 쌓아나가는 과정이다.
   사실 이런 흐름을 마냥 단점으로 단정 지을 순 없는 일이다. 어떤 관객들에겐 이러한 화려한 도미노 쇼가 그 어떤 영화에서도 느낄 수 없었던 새로운 쾌감으로 다가올 테니 말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더욱 큰 문제는 조커라는 캐릭터의 즉흥성과 영화의 체계적인 움직임 사이의 부조화에 있다. 조커는 자동차를 쫓는 강아지, 모든 것이 즉흥적인, '악' 그 자체라기보단, '카오스'를 상징하는 인물에 가깝다. 하지만 영화 속 그를 포함한 모든 것은 너무나도 질서 정연하다. 종종 놀란의 단점으로 언급되는, 마치 사회 실험실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윤리 실험은 어김없이 다크 나이트에서도 드러난다. 배 위의 죄수들과 시민들, 그리고 범죄자로 변장시킨 인질들까지. 이 완벽하게 치밀한 계획들은 카오스 그 자체인 조커의 손에서 완성된다. 이 얼마나 큰 부조화란 말인가?

영화 '아바타' 스틸컷. ⓒ해리슨앤컴퍼니

  마지막으로, <아바타>이다. <아바타>의 서사와 주제의식, 연기, 연출 따위에서, 우리는 그 어떠한 대단한 가치도 느낄 수 없다. 이 영화의 흥행은 오직 기술만으로 얻은 성취에 가깝다. 이후 <라푼젤>이나 <라이프 오브 파이>와 같은 굉장한 작품들이 나오긴 했지만, 그럼에도 이 영화가 3D 기술을 활용하는 능력은 역사상 최고 수준인 것만은 분명하다. 가장 이 기술을 제대로 이해하고, 최고의 영상미를 보여줬다.
   본 작은 판도라라는 독특한 공간을 잘 설정하고, 구현하며, 잘 보여준다. 아크란과 첫 교감 이후, 첫 비행을 하는 장면은 정말로 3D로 봤을 때도 지금도 감동이 생생한 장면이다. 아크란의 머리 위에 올라타서 발버둥 치고 난 후, 아크란과 머리를 통해 교감을 나누는 장면은, 그 설정도 참신하지만 낯선 자연, 세계와의 교감을 시각적으로도 잘 구현해낸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첫 비행에서는, 굉장히 화려하고 넓은 범위에서 판도라 행성의 곳곳을 보여준다. 이외에도 영화 러닝타임 내내, 아름다운 영상들이 줄곧 펼쳐진다.
   <아바타>는 마치, 21세기 최고의 영화 중 하나로 평가받지만, 10년, 20년 뒤에는 절대 지금과 같은 평가를 받을 수 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3D 기술 자체의 한계에 있다. 10년 전만 해도 3D 영화는 영화 생태계를 뒤바꿀 대단한 흐름처럼 보였다. 아바타는 이 흐름의 중심에 있었던 엄청난 흥행작이었으며, 3D 기술에 대한 하나의 상징과도 같았다. 하지만 3D 영화가 주는 위력은 그 당시에 비하면, 훨씬 약해졌다. 3D 기술은 언젠가부터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기술이 되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3D 영화는 더욱더 그 입지가 작아질 것이다. 20세기 이후 예술의 역사는 곧 기술 발전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산업사회의 기술이 탄생시킨 첫 예술매체는 영화였다. 영화의 등장은 수천 년 간 실재의 생생한 재현이라는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발전해왔던 회화의 목적과 의의를 한순간에 빼앗아 왔다. 기술의 발전이 예술의 흐름을 바꾸는 것을 넘어서, 새로운 예술을 탄생시킨 것이다.
   기술은 계속 발전할 것이고, 우리는 언젠가 새로운 예술 매체를 마주할지도 모른다. 현재 가장 유력한 다음 예술매체의 후보는, 게임이다. 똑같은 사각의 프레임 안에서 작동하지만, 게임은 수용자로 하여금, 자신의 자유의지를 매체 안에서 발휘하고 주위 환경을 변화시킬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다시 말해, 같은 사각형의 프레임 안에서 영화는 카메라의 눈을 이용해 작동하는 반면, 게임은 수용자의 눈을 이용해 재창조된 세계를 보여주는 매체이다. 게임은 사각형의 프레임에 대해 영화보다 덜 의존적이다. 만약 VR기술이나 AR기술과 같은 첨단기술들이 예술의 영역에 적용된다면, 그들 또한 분명히 영화가 아닌 게임에 더욱 잘 어울리는 기술로 보인다.
   3D 기술의 등장은, 영화와 게임의 한계를 사각형의 틀에서 벗어나게 했다. 하지만, 3D 기술은 영화보다는 게임에 더욱 잘 결합하는 도구이다. 게임은 수용자의 경험이 더욱 현실적이고 실제와 같을수록 긍정적인 효과를 보일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다르다. 영화는 카메라의 눈을 따라갈뿐더러, 무엇보다 편집이라는 매력적인 도구가 존재한다. 우리가 아무리 생생한 영화를 만드려고 해도, 그것은 간접체험에 불과하다. 또한, 사각형의 틀은 영화가 스스로에게 부여한 한계이지만, 그 한계가 창의력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3D 안경은 또 어떠한가? 안경을 통해 영화를 바라보는 것이 온전히 영화를 경험했다고 부를 수 있는 것인가? 그것은 오히려, 예술 수용자와 프레임 사이의 관음을 방해하는 장애물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3D 영화는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무성영화가 사라져도 무성영화의 대표작들이 폄하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이 가진 시의성, 주제의식, 연기, 연출 따위가 갖는 가치는 영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바타는 아니다. 그저 이 기술을 잘 활용하여 많은 수익을 올린 영화로만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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