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디면 나아질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아무리 견뎌도 나아지질 않아요, 이젠 더 이상 견딜힘도 없어요. 지쳤어요... 제 인생에는 좋은 일이 없어요. 항상 그랬어요. 죽을 때까지 그럴 것 같아요.”
경진은 울어 본 적이 없다.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그녀의 아버지는 평생 가정을 돌보지 않았고 엄마는 늘 우울하고 무기력했다.
어렸을 때부터 언제나 안개 속에 홀로 갇힌 기분이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에서 어디로 가야할지도 모른 채 그냥 불안과 두려움을 버티고 견디며 열심히 살았다.
아주 어릴 때부터 사는 것이 불안하고 두려웠지만, 불안하고 두렵다고 인정해본 적도 누구에게 말해본 적도 없었다. 불안하고 두렵고 슬픈 나를 인정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었다. 똑똑하고 강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무시당하고 싶지 않아서 더 열심히 공부했고 성과도 있었지만 그녀의 선택들은 자꾸 그녀를 불행하게 했다.
아버지와 다른 사람이라고 선택한 남편은 어느새 그녀의 아버지와 닮은 사람이 되어 있었고 엄마와는 다르게 살고 싶었는데 엄마와 똑 닮은 삶을 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평생 괜찮지 않았지만 괜찮다고 스스로 되뇌며 열심히 살았다. 그렇게 살면 나아질 줄 알았다. 견디고 버티면 좋은 날이 올 거라고 생각했다. 쉰이 훌쩍 넘은 지금 그녀는 깨닫는다. 견디고 버틴다고 해서 좋은 날은 오지 않는다.
사례 2.
“지금도 자꾸 엄마 생각이 나요. 모시고 사는 동안 엄마한테 못해드린 것만 자꾸 떠올라서 죄책감이 들어요.”
남희는 50대 중반의 여성이다. 4남매 중 둘째이자 맏딸인 그녀는 엄마가 원했던 대학을 나와 엄마가 원하는 집안으로 시집을 갔다. 엄마는 엄격하고 냉정한 사람이었다. 엄마의 결정대로 사는 것에 의문을 품어본 적은 없었다, 엄마가 흡족해 할 때 자신도 행복하다고 믿었다.
결혼 이후 남희의 삶은 엄마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그녀는 엄마에게 미안했고 자신이 초라하고 한심하게 느껴졌다. 몇 년 전 그녀는 병든 엄마를 그녀의 집으로 모셔왔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엄마를 간병하는 3년 동안 그녀는 오직 엄마 생각뿐이었다. 어떻게 하면 엄마가 편안할까. 어떻게 하면 엄마가 좋아할까. 엄마가 웃어야 마음이 편했다.
엄마에게 매달려있는 동안 남편과 아이들과의 관계는 더 소원해졌다. 엄마를 모시기전에도 이들과의 관계는 남희에게 힘들고 막막한 숙제였다.
“아이들이 자꾸 저 땜에 상처받았다고 옛날 얘기를 해요. 그래서 어쩌라구요. 자꾸 제가 잘못한 것처럼 말하는데 전 모르겠어요.”
엄마가 없는 지금 그녀는 엄마대신 동생들을 보살피며 산다. 동생들의 하소연을 들어주고 동생들을 밤낮으로 걱정하며 여전히 엄마의 맏딸로 살고 있다.
엄마의 시선은 그녀를 늘 따라다닌다. 죽음은 몸이 사라지는 것일 뿐 관계는 계속된다.
우리는 행복을 부모에게서 배웠다.
리옹 페로, <엄마와 아이>
누구나 행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우리는 모두 살 길을 찾아 움직이고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이다. 경진도 남희도 자신의 선택이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왜 그녀들의 선택은 그들의 삶을 방해하고 불행하게 만들고 있는 것일까?
효와 가족을 강조하는 사회와 자신의 미해결된 감정을 자식에게 의존하는 부모를 믿고 따르면 안전을 보장받는다. 착한 사람이 되고, 좋은 사람이 되고,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 순종하는 사람이 되고, 은혜 갚는 사람이 되면 인정 받고 사랑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보고 배웠다.
나의 감정과 욕구를 표현하고 충족하려는 것이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경험하게 되면 아이는 생존에 불리한 자신의 감정과 욕구를 억압하고 차단한다. 그리고 내 감정과 욕구가 사라진 자리에 부모를 채워넣고 가짜 자기를 만든다. 그리고 부모의 해결되지 않은 감정을 돌보고, 부모의 자랑거리가 되고, 부모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 자신의 행복이라고 믿고 살아간다. 그렇게 가짜 행복이 수 십 년 동안 쌓이다보면, 어느 날 문득 내 안에 내가 없는 불안과 공허가 덮쳐온다.
고통이 주는 선물은 매우 크다. 거짓을 깨닫게 해서 진짜를 갈망하게 한다.
지금 이 순간은 나의 남은 생애중 가장 빠른 순간이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내 행복을 찾아 나서기에 언제나 가장 좋은 때이다.
착한 딸이어야 한다. 부모에게 순종해야 한다. 내 상처가 깊어도 부모를 이해해야 한다. 쓸모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부모의 은혜를 갚아야 한다. 부모가 있어서 내가 있다. 부모는 크고 나는 작다... 나를 가두었던 수많은 신념들을 깨고 그 안에 갇힌 나를 해방시켜야 한다.
그리고 머리가 아니라 몸에게 나의 행복을 물어야 한다.
나는 언제 평온을 느끼는가? 나는 언제 애쓰고 긴장하는가? 나는 언제 가득 채워지는 느낌이 드는가? 나는 언제 온전히 이완되는가? 나는 지금 온전히 나인가?
그래야 나를 묶고 있던 신념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래야 나의 진정한 행복을 발견할 수 있다.
몸은 알고 있다.
내가 언제 가장 나다운지. 내가 언제 가장 행복한지. 내가 언제 편안한지.
자궁 속에서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나의 삶을 살아온 것은 나의 몸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살아야 인정받는다. 저렇게 해야 사랑 받는다 강요하면서 내 몸을 억지로 끌고 다니는 삶을 멈추어야 한다. 멈추어 서서 몸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몸에게 자꾸 물어야 한다. 지금 어떠니? 편안하니? 행복하니? 무얼 원하니?
그렇게 몸과 함께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나의 행복을 발견해가야 한다.
2. 우리는 사랑을 새로 배워야만 한다.
사랑은 어떤 것일까? 무엇이 사랑일까?
수많은 책들과 시와 노래가 사랑을 말하고 모든 종교가 사랑을 외친다.
우리는 사랑에 대해 떠드는 수많은 말들에 둘러싸여 살아간다. 그래서 마치 사랑을 아는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된다.
‘사랑’이라는 단어 속에는 사랑이 없다. 사랑에 관한 시를 수 백편을 외우고 고린도 전서 13장을 매일 암송한다 해도 거기에 사랑은 없다. 수영을 책으로 배울 수 없는 것처럼 사랑도 책으로 배울 수 없다. 사랑은 말하고 듣는 것이 아니라 뛰어 들어 온몸으로 느끼고 온몸으로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사랑에 대해 2박3일을 말할 수 있다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사랑은 내 몸에 배인 사랑뿐이다. 우리는 어린 시절 부모와의 관계에서 경험한 것을 몸과 무의식에 사랑이라고 저장한다. 부모의 사랑이 자신을 불행하게 해도 아이는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 자신의 욕구를 채웠나를 따지지 않는다. 그저 맹목적으로 부모로부터 받은 것을 사랑이라고 믿는다.
아이가 어른이 되고, 책으로 읽은 사랑이 머리에 가득해도 우리는 몸에 배인 익숙한 사랑을 할 수밖에 없다. 내가 선택한 사랑이 결국 나의 족쇄가 되는 이유도 나에게 좋은 것이 아니라 내 몸에 배여 익숙한 것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은 받아 본 사람만이 줄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 지각된 것만을 저장하고, 저장된 것들만 꺼내 쓸 수 있다.
나를 가득 채우는 사랑, 나를 자유롭게 하는 사랑을 하고 싶다면 우리는 사랑을 새롭게 배워야만 한다. 새로운 사랑을 받고 느끼고 몸에 새겨야만 한다.
3. 새로운 사랑을 어떻게 시작할까?
우리는 욕구가 충족 될 때 몸이 이완되고 가득 채워진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사랑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부모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어린아이는 부모에 의해 자신의 욕구가 즉각적이고 섬세하게 충족될 때 사랑받는다고 느낀다. 배가 고파 울면 배가 채워지고, 품이 필요하면 안길 수 있고, 격려가 필요할 때 격려를 받고, 지지가 필요할 때 지지를 받으면 사랑받는다고 느낀다.
우리가 ‘상처’ 라고 부르는 사건도 나에게 중요했던 욕구가 거부되고 좌절된 기억이다. 아이의 생존과 성장에 필수적인 욕구가 거부되고 좌절 될수록 상처는 깊고 크게 남는다.
한 인간이 전 생애에 걸쳐 자신의 잠재력을 충분히 발휘하고 살기 위해서는 이런 욕구들이 어린 시절에 충분히 채워져야만 한다.
갓 태어난 아이의 울음과 몸짓에서 욕구를 읽어내고 충족시켜주는 최초의 존재는 부모이다. 아기가 보내는 신호에 부모가 즉각적으로 반응하고 섬세하게 채워주는 경험이 반복될수록 아이의 몸은 사랑받는다는 느낌을 더 깊이 새긴다. 그리고 사랑으로 가득 채워지는 느낌은 아기의 존재에 스며든다. 사랑으로 가득 찬 아기의 몸은 자라서도 세상을 안전하게 느낀다. 아기에게 부모는 최초의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린 시절 몸에 새겨진 대로 사랑한다. 우리는 7세 이전에 저장된 기억을 재현하며 평생을 살아간다.
사랑을 새로 배울 때 우리는 사랑을 먼저 느껴야만 한다. 내 몸이 이완되고, 가득 채워지며, 존재가 충만해지는 사랑을 하나씩 하나씩 느껴야 한다. 아기를 매일 매일 새롭게 키우듯 그렇게 내 몸에 하나씩 사랑을 새기면 된다. 사랑은 그렇게 배우는 것이다.
갓난아기에게 헌신하는 엄마처럼 나의 욕구에 집중하고 관찰하는 것에서 사랑을 시작하자. 사랑하면 궁금해진다. 지금 괜찮아? 지금 편안해? 뭐가 불편해? 어디가 불편해? 어떻게 하면 편안해 질까? 뭘 먹고 싶어? 뭘 하고 싶어?
나의 욕구를 누군가 알아차리고 채워주기를 더 이상 기다리지 말자. 누군가에게 내 욕구충족을 의존하면 나의 행불행이 그에게 묶이게 된다. 자유는 내 욕구를 내 자신이 읽어내고 스스로 충족할 수 있을 때 얻어지는 것이다.
어린 시절 사랑 받지 못했다고 절망할 필요는 없다. 세상에 완전한 부모는 없고 누구에게나 상처는 있다. 어른이 되어 나에 대한 사랑을 배울 때 좋은 점은 아기처럼 사랑을 줄 누군가에게 의존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내가 필요한 만큼 나를 자주 돌보고 내가 원하는 만큼 섬세하게 내 욕구를 채워줄 수도 있다. 그렇게 스스로 자신의 욕구를 하나씩 채워갈수록 나는 주체적이고 능동적이고 자유로운 사람이 되어간다. 누구에게도 나의 행복을 의존하지 않을 때 나는 자유를 얻는다.
멋지지 않은가. 이것은 나의 가장 큰 상처를 나의 가장 큰 힘으로 만들어 가는 길이며, 부모의 행복을 넘어설 수 없었던 내가 진정으로 부모를 넘어서는 길이다.
painted by Haewon
내가 나에게 사랑을 주는 일은 내 안에 가장 빛나는 꽃밭을 가지는 일이다. 내가 씨를 심고, 내가 물을 주고, 내가 세심하게 한 포기 한 포기 돌보며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가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