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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원 Jun 14. 2023

사랑을 받고도 사랑에 목마른 이유

나 아닌 누구도 나를 채울 수 없다





우리는 왜 아직도 사랑을 찾아 헤매는 걸까?


공부 잘하면 사랑해 줄게.

내 말을 잘 들으면 사랑해 줄게.

자랑스러운 자식이 되어주면 사랑해 줄게.

가족을 위해 희생하면 사랑해 줄게

너는 딸이지만 아들 노릇을 하면 사랑해 줄게.

네 아빠(엄마) 대신 나를 위로해 주면 사랑해 줄게.


네가 잘난 척하지 않으면 사랑해 줄게.

네가 나에게 의존하고 나를 떠나지 않으면 사랑해 줄게.

네가 무능하고 약해지면 사랑해 줄게.

네 감정과 욕구를 드러내지 않으면 사랑해 줄게.

네가 내 감정 쓰레기통이 되어주면 사랑해 줄게.

네가 독립적이고 능동적이지 않으면 사랑해 줄게.


우리는 이런 조건적인 사랑을 받고 자란다. 어른이 되어서도 조건적인 사랑을 하고 조건적인 사랑을 주는 부모가 된다. 사랑과 맞바꾸는 이런 조건들은 부모의 언어와 태도로 밖으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은밀하게 무의식적 수준에서 강요되는 경우도 많다. 의식과 무의식의 수준에서 각기 다른 메시지를 받을 때 아이는 더 혼란스럽고 고통받게 된다.


조건적인 사랑은 우리를 늘 목마르게 한다. 조건적인 사랑이 우리를 채워주지 못하는 이유는 부모가 사랑하는 것이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조건적인 사랑을 줄 때 부모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이가 아니라 부모 자신의 결핍이다.


부모의 결핍을 채워주는 대가로 사랑을 받기 위해서 아이는 지금의 자신과는 다른 존재가 되어야 한다. 나의 욕구와 감정을 버리고 내 삶의 중심이 나 자신이 아니라 부모가 되어야만 한다.


조건적인 사랑은 필연적으로 아이의 내면에 두려움과 불안을 일으킨다.

아이가 부모의 조건을 충족시켜 줄 때는  사랑을 주다가 아이가 조건을 충족하지 못할 때는 사랑을 철회해 버리기 때문이다. 부모를 필요로 할수록 부모를 사랑할수록 아이의 불안과 두려움은 커진다. 조건적인 사랑은 늘 목마르고 배고프다. 결코 우리를 쉬게 하거나 채우거나 자유롭게 할 수 없다.






우리가 찾아 헤매는 것은 무조건적인 사랑이다


진정한 사랑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쉬게 하고 충만하게 하고 두렵지 않게 한다.

여전히 사랑을 찾아 헤매고 있다면 내가 찾는 것은 조건 없이 주어지는 사랑이다.  


내가 못났어도, 잘났어도, 실패해도, 한심해도, 잘난 척 해도, 초라해도, 이해할 수 없어도, 이상해도, 보잘것없어도, 내가 문제를 일으켜도 언제나 한결같이  나를 사랑해 주고 수용해 주며 단단하고 안정된 연결을 느낄 수 있는 사랑을 우리는 원한다.


우리는 평생 무조건적인 사랑을 줄 누군가를 찾아 헤맨다. 부모에게 받지 못하면 배우자에게 원하고, 배우자가 주지 못하면 자식에게 집착한다. 인생 초기에 부모가 채워주지 않은 무조건적인 사랑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바깥을 떠돈다.




 


우리는 타인의 사랑을 받아야 완성되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엄마의 사랑을 받아야만 온전해지고 완성되는 존재가 아니다.

부모, 배우자, 자식의 사랑과 인정을 받아야만 부족함 없이 채워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자유롭고 충만한 사랑의 존재로 태어났다. 아이는 엄마의 사랑을 받고 완성되는 존재가 아니라, 엄마의 눈을 통해 나는 본래 부족함이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이다. 내가 만약 엄마의 눈 속에서 부족함 없는 나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나를 바라보는 나의 엄마가 행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이는 엄마가 완전한 존재라고 믿는다. 그래서 엄마가 나에게 충분한 사랑을 주지 않는 이유를 내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우리가 어린 시절 꿈꾸었고 지금도 여전히 기다리고 있는 완전한 엄마는 세상에 없다. 우리가 기다리는 엄마는 아이의 환상 속에 존재한다. 아이에게는 그런 엄마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아이에게 엄마는 내 삶을 온전히 맡겨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소중한 이들과 연결되기를 갈망하고 그들의 사랑을 갈구한다.

특히 부모, 배우자, 자식이 나를 사랑해 주어야만 나의 수치심이 해결되고 나의 공허함을 메우고 나의 결핍을 충족할 수 있다는 생각은 오해이며 착각이다.

어린 시절부터 시작된 밖에서 오는 사랑에 대한 갈망을 끝내야만 사랑받지 못함과 단절됨의 두려움과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다.






내가 나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할 때 비로소 두려움은 사라진다


사랑받지 못할까 봐 전전긍긍하지 않는 자유를 누리려면, 나를 잠시도 떠나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나를 사랑해 주며 나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존재가 늘 나와 함께 있어야만 한다. 누가 그런 존재가 되어줄 것인가.


모두 내 곁을 떠나도 끝까지 나를 떠나지 않고, 평생 잠시도 나에게서 물러설 수 없는 유일한 존재는 나 자신뿐이다. 나는 내가 경험한 모든 사건들의 유일한 목격자이고, 나의 고유한 감정과 생각들의 일어남과 움직임을 느끼고 바라볼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다. 그래서 나의 상처와 감정을 온전히 수용하고 이해하며 무조건적인 사랑을 줄 수 있는 존재는 나 자신뿐이다.


조건적 사랑을 받으며 두려움과 불안 속에 살아온 사람이 자기 자신과 무조건적 사랑으로 연결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 나 자신에게 정성을 쏟아야만 한다. 사랑받고 인정받기 위해 밖으로만 쏟았던 관심과 에너지의 방향을 내면으로 돌려 나에게 온전히 집중하는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 바깥으로부터의 사랑을 갈망하는 몸에 밴 습관이 바뀔 때까지 인내심을 갖고 나 자신을 사랑하고 돌보아야 한다.






나 자신과의 무조건적 사랑, 어떻게 시작할까?


이것은 나 자신과 이전에 해본 적 없는 완전히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나 자신을 안다고 생각하다. 그러나 어린 시절 자신의 욕구와 감정이 존중받지 못하고 부모의 감정과 욕구를 따라야 했다면 아이는 자신의 진짜 욕구와 감정을 모른 채 어른이 된다.


아버지의 사랑과 인정을 받기 위해 아버지의 든든한 큰 딸로만 살았던 나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난생처음 나 자신과 대면해야만 했다. 그때 나는 나 자신을 너무 모른다는 것에 큰 충격을 받았었다. 내 것이라고 믿었던 감정과 욕구는 내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것이었다. 삼십육 년 동안 나는 자신과 단절되어 있었다.


단절되었던 나 자신과 다시 연결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생각과 감정과 몸의 느낌을 관찰하고 이해해야 한다. 이해하기 위해서는 알아야 하고 알기 위해서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나의 무의식적 습관에 질문을 던져보자. 부정적인 느낌과 감정을 피하기 위한 내 몸의 습관속에는 나의 숨셔진 이야기가 들어있기 마련이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초콜릿에 집착했었다. 초콜릿을 살 수 있을 만큼 용돈이 모이면 아무도 없는 골목에 쪼그리고 앉아 천천히 초콜릿을 녹여 먹었다. 초콜릿을 사기 위해 아버지 가게에서 돈을 훔치기도 했었다. 어른이 되어서도 스트레스를 받거나 부정적인 감정이 올라오면 혼자 몰래 초콜릿을 녹여 먹었다.


질문을 던져보자. 언제 초콜릿을 원하게 되지? 어떤 초콜릿을 가장 좋아해? 그 초콜릿을 가장 좋아하는 이유는 뭐야? 왜 항상 초콜릿을 씹어먹지 않고 녹여 먹어? 혀 위에서 녹여 먹을 때 어떤 기분이 들어? 그것은 무엇을 먹을 때의 느낌과 비슷해? 초콜릿을 먹을 때 몸의 느낌은 어때?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는 나의 의식을 머리가 아닌 몸에 머물도록 해야 한다. 몸에 배인 습관의 답은 몸만이 답할 수 있다. 나는 '초콜릿과 나'의 관계에 대한 답이 떠오를때까지  초콜릿을 원할 때의 내 몸의 느낌, 초콜릿을 먹고 있는 내몸의 감각, 먹고 난 이후의 내 몸의 느낌에 나의 의식을 집중했다. 


어린 시절에는 남몰래 숨어서 초콜릿을 먹던 인적 드문 골목길이 있었다. 

어른이 되어서도 스트레스를 받거나  불안이나 공허함이 올라오면 남몰래 조용한 곳을 찾아들어가서 나만의 초콜릿 박스를 열었다.


나는 한번도 초콜릿을 씹어먹은 적이 없었다.  언제나 조심스럽게 혀 위에 올려 천천히 녹여 조금씩 삼켜 먹었다. 혀 위에서 녹아내린  달콤쌉싸름한 초콜릿이 부드럽게 목을 넘어갈때면 온 몸이 스르르 이완되었다.

놀랍게도 내가 매혹되었던 것은 초콜릿의 달콤함이 아니었다. 

내 몸은 입속에서 사르르 녹아내려 부드럽고 따뜻하게 목구멍을 넘어가는 그 느낌을 사랑했다. 나는 왜 그토록 이 느낌을 잊지 못하고 지속적으로 추구했던 것일까?


나의 집요한 물음에 내 몸이 대답했다.

엄마젖을 찾는 아이처럼 간절하게 초콜릿을 사랑했노라고.

불안하고 공허한 아기의 몸이 엄마의 젖을 찾듯 내 몸은 초콜릿이 주는

부드럽고 따뜻한 위로를 찾아간 거였다.

내 의식은 알지 못했지만 내 몸은 내가 무엇을 잃어버렸는지를 알고 있었다.

 

사랑하면 알고 싶은 것이 많아진다. 사랑하면 바라보고 집중하게 된다. 그리고 조금씩 더 이해하게 된다. 더 이해하게 되면 사랑도 더 깊어진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타인(부모도 엄연한 타인이다)이 나를 사랑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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