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내 법대로 한다 Nov 03. 2021

우울증에도 스펙이 필요하다

‘네가 뭐가 부족해서 우울증이야?’

‘멀쩡히 돈 벌고 있고, 집안 문제없고, 아픈데 없고, 아무 문제없는데 네가 왜 우울증이야?’


자꾸 채근하는 친구를 견디다 못해, 우울증 고백을 했더니, 스펙을 따지고 든다. 그녀의 말은 내가 불행할 게 없는데 왜 우울증에 걸리냐는 타박.


우울증에도 스펙이 필요했던가? 흔히 말하는 불행의 3대 원칙, 질병, 가난, 가족의 문제가 없다고 해서, 난 우울증에 걸릴 자격도 없는 사람이란 말인가. 그럼 불행의 3대 원칙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심각한 우울증일까? 혹은 불행 3대 스펙이 없는 사람들은 우울증에 걸릴 자격조차 없다는 건가.


사람마다 우울을 느끼는 정도는 차이가 있고, 각각의 원인은 다르다. 모든 걸 다 갖춘 듯 세상 아쉬울 거 없어 보이는 재벌들도 우울증에 걸릴 수 있다. 그들도 우울할 권리가 있다.


하지만 그 친구처럼 말하는 이들이 많다. 물론 그들의 선한 의도는 ‘너는 우울해하지 않아도 돼, 모든 게 완벽해’란 의도로 안정과 평온을 주고 싶었을 거다.


근데 이게 우울증 걸린 사람 입장에선 감정을 부정당한 느낌이 든다. 마치 고등학교 때 열이 40도까지 올라서 죽겠는데, 담임이 꾀병 부리지 말라고 조퇴도 못하게 하는 기분이 든다. 힘겹게 말한 우울증이 꾀병 취급당한 게 몹시 불쾌하다.


보통 우울증에 걸리는 사람들은 타인에게 자신의 감정을 외면받아, 그 상처가 곪고 곪아 우울증이 발현된다. 감정의 외면을 받아 다친 사람에게 ‘우울증 걸릴 수 있는 스펙’을 논하는 건, 그 사람의 감정을 두 번 부정하는 일이다.


물론 우울증이란 질병을 내세워, 타인에게 무조건적인 희생을 바란 적도, 나를 불쌍하게 봐주기를 원한적도 없다. 그저 내 감정에 공감해주길 바랬다. 내 우울증을 가여워하기보단 인정해주길 원했다.


‘넌 우울해할 이유가 없어’보단 

‘지금은 맘껏 우울해해도 돼’


그저 온전한 인정이 고팠다. 우울증인 날 위해 웃겨 달라는 것도, 즐겁게 해 달라는 것도, 뭘 함께 하자는 것도 아닌 그냥 내가 원한 건 그저 그 순간, 타인의 순수한 공감이었다.


그런데 그 공감 하나도 내 주기 아까운 걸까. 사람들은 참 함부로 타인의 슬픔을 재단하고 평가한다. 당신은 우울증 입학 심판관이 아니다. 어줍지 않게 판결하지 말고, 공감도 하기 싫으면, 그저 그냥 들어만 주자. 그럼 중간은 간다.


타인의 삶의 슬픔을 결코 당신이 수치화할 수는 없다.  

매거진의 이전글 [브런치소식] 경향신문 인터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