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 힘들 때, 내가 어떻게 해 줬는데...!'
‘힘들 때 네가 있어서 떠난 거야’
친구와 한순간에 멀어진 지인. 친구는 지인에 대한 속상함을 토로한다. 아프고 힘들 때 옆에 있어 줬는데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냐며, 잘 되니깐 손절하냐며 화를 낸다. 어찌 보면 그들 사이에 당연한 수순이었다. 내 친구가 너무 순진했던 거지.
‘힘들 때 옆에 있어 준 사람은 모른 척하는 거 아니다’라는 말은 요즘 시대에 그저 옛말일 뿐이다. 나도 그녀처럼 한참을 아파하던 때가 있었다. 꽤나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있었다. 우린 그 힘들고 어렵다는 80만 원 받던 방송국 막내시절을 함께 했고, 생활고의 고민을 함께 나누기도 하고, 힘든 친구가 커피 한 잔을 요청하면 군말 없이 같이 카페에 가서 얘기를 들어주고, 막차 대신 밤샘 작업을 택했었다. 힘든 그녀에게 내가 힘이 되기 바랐다.
막내를 거쳐 연차를 차차 쌓이면서 우리는 삶의 더 많은 부분을 공유하기 시작했다. 서로의 가정사부터 연애사까지 모든 걸 함께했다. 그렇게 서로의 20대의 히스토리를 탄탄히 쌓아 올렸고, 그녀는 먼저 결혼을 했고, 결혼과 동시에 서서히 멀어졌다.
흔히 말하는 결혼과 동시에 손절은 아니었다. 결혼식 감사 인사는 안 보내도, 본인이 말할 상대가 필요하면 연락이 왔었다. 그제야 관계가 명확해졌다. 난 그녀에게 고민을 말하기 딱 적당한 상대였던 거다.
우리는 고민을 말할 때 정말 뼛속까지 절절한 절친이거나, 아예 나와 겹치는 지인이 없는 모르는 사람에게 말하고 싶어 진다. 왜? 그래야 위험 부담이 적어지니깐. 드라마 [또, 오해영]에서 오해영이 차 접촉 사고 난, 오늘 처음 본 사람에게 파혼을 아픔을 털어놓듯이.
애석하게도 그녀와 난 중간에 겹치는 지인이 없었다. 우린 정말 우연찮게 친해져 깊어진 사이였고, 겹치는 모임이 없기에 서로에게 더 빨리 마음을 터 놓을 수 있었다. 언제든 끊어낼 수 있기에 모든 걸 말할 수 있는 사이. 마음 아프지만 그게 우리 관계의 정확한 상태였다.
그렇게 찌질한 시절을 함께 보내고, 그녀는 그 뒤에 일이 정말 잘 풀렸고, 결혼까지 순조롭게 이어갔다. 꿈꾸던 삶을 살게 되면, 찌질하고 보잘것없던 시절의 나는 잊고 싶다. 나는 처음부터 반짝반짝 빛나는 삶을 살던 것처럼, 인스타 피드처럼 나의 이미지를 박제시키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그래서 별 볼일 없는 과거를 아는 지인은 더욱 불편하다.
물론 알고 보면 흙수저였다는 존리와 과거 월급을 167만원 받았다는 유투버 신사임당 같은 신화 같은 존재는 예외다. 그들은 흑역사를 얘기하면 얘기할수록 더욱 신화적인 존재가 된다. 이뤄놓은 성공의 스케일이 일반인과 다르기에.
하지만 일반인들은 다르다. 일반인 기준에서 잘 풀리면 태생이 온실 속의 화초였던 것처럼 살고 싶지, 굳이 궁상맞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다. 득 될 게 없기에.
가끔 생각한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간다면 우리가 정말 소소한 인사와 잡담 정도만 나누는 직장 친구 정도의 관계였더라면, 서로의 아픔을 공유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지금도 데면데면하게 1년에 한두 번씩은 만나지 않았을까.
근데 맹숭맹숭하게 지내고 싶진 않다. 차라리 뜨겁게 살고 싶다. 아픔을 공유하면 공유할수록 우리는 후에 멀어질 수 있을 거란 걸 알지만, 알면서도 그들의 얘기를 여전히 들어주고 싶고, 옆을 지켜주고 싶다.
훗날 멀어지더라도, 힘든 시기 나로 인해 잘 버텨내었으면 그걸로 되었다. 이젠 상처받지 않는다. 나도 그들에게 위로받았으니. 인연은 흘러가는 것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