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내 법대로 한다 Jul 05. 2022

번호 해방 일지

‘바뀐 번호 안내 서비스해 드릴까요?’

‘아니요’


10년 동안 유지하던 번호를 드디어 바꿨다. 방송작가 일을 하면서 저장된 번호만 수백 개. 방송 선배들과 클라이언트 번호가 여럿. 프리랜서 쫄보라 괜히 번호 바꿨다가 일 안 들어올까 봐 그동안 고민만 하고 실행을 못 했는데, 결국엔 해냈다. 밥줄을 지키는 것보다 애매한 인연들에게서 해방되고 싶었다. 그래서 과감히 번호 안내 서비스도 신청을 안 했다.


번호를 바꾸고 카톡을 새로 깔았다. 카톡 친구 0명.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인생 2회 차를 셋팅하는 마음으로 신중하게 친구 셋팅에 들어간다. 여기서 관건은 오래된 인연을 가져가느냐 마느냐의 문제. 오래되고 끈끈한 사이라면 당연 챙기야지. 하지만 내 오래된 인연 대다수는 방 한쪽을 차지하는 기타같은 존재랄까. 한 때 잠깐 쳐서 소중한 추억이 있지만 지금은 구석에 박아둬 일 년에 한 번도 안 꺼내지만 차마 아까워서 버리지 못하는 애물단지 같은 인연들.


어찌해야 하나. 몇 년 만에 연락해서 만나도 반갑고 어색하지 않은 진한 우정을 가진 존재들도 아니지만 버리기엔 나도 아깝다. 솔직히 나도 인간인지라 본전 생각이 난다. 그래도 결혼식엔 불러야지. 나도 갔는데. 또 언제 있을지도 모를 내 결혼을 계획한다. 이래서 결혼은 빨리해야 한다. 늦게 하는 사람이 불리하다. 또 열받네.


여하튼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아깝지만 결국 그 인연들을 끊어내기로 한다. 오랜만에 연락해서 청첩장 주기도 겸연쩍고 그게 언제가 될지도 모르겠고, 여기서 정리하는 게 맞다 싶다. 물론 그중에 몇 명은 손절을 당했다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2년 이상 우리가 서로 연락 안 했으면 그 인연의 수명이 다 된 거 아닐까 싶다. 아마 근데 대다수는 손절당한지도 모를 거다.


그렇게 얼추 추려서 친구 목록을 재정비한다. 인맥의 종류는 크게 세 개. 가족, 일, 친구들. 진짜 인연만 꾸려서 소중하게 가져가야지! 희망찬 마음으로 카톡 프로필을 쭉 내려 보는데 어라, 조금 이상하다?


지금껏 내가 봤던 카톡 프로필과 다르다. 그렇다 그녀는 카톡 프로필을 그룹별로 관리하고 있었다. 실소가 터진다. 그 주인공은 바로 우리 숙모. 그래 아무리 오래되도 시댁 식구는 불편한 법. 이해한다. 개인의 사생활은 중요하니깐. 그룹 프로필까지 하면서 그동안 열심히 관리한 숙모의 노력이 거품이 됐다. 역시 세상에 완벽한 비밀은 없다.


카톡 친구 목록이 한결 단출해졌다. 이게 뭐라고 참 집착을 했을까. 일로 만난 인연이던 애정으로 만난 인연이던 연락처 목록에 된장처럼 푹 담가 둔다고 해서 인연이 더 절절하게 익는 것도 아닌 것을, 그저 보관만 해서 무엇하리. 식물에 물을 주듯 정기적으로 안부라도 물어야 인연이 이어지는 것을. 바보 같다 참,


우려와는 달리 아직까지 일에도 지장이 없지만, 앞으로도 크게 걱정은 안 한다. 일이던 인연이던 내가 필요하면 어떤 식으로든 나를 섭외하겠지. 될 대로 돼라. 마음이 한결 가볍다. 번호를 바꿔도 불편함 없이 잘 살고 있다. 아쉬움 하나 없이. 그게 뭐라고 집착을 했을까. #번호해방일지. 

매거진의 이전글 핸드메이드, 리미티드 김장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