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길이 할머니 또 난리네’
모든 일과가 끝난 늦은 밤, 요즘 엄마와 전원일기를 본다. 1980년부터 시작한 나보다도 나이가 많은 드라마. 어렸을 때 스치듯 봤던 드라마를 이제야 정독하고 있다.
얼마 전부터 케이블티브이에서 틀어주는 전원일기. 처음에 엄마가 보고 있을 땐 화질도 안 좋은 걸 뭐하러 보나 싶었지만, 어느 순간 나도 옆에 앉아 보게 된다. 이젠 보는 수준을 넘어 편성표를 찾아서 틀어댄다. 내가 편성표를 본 지가 언제였더라... 정확히 기억도 나지 않는데 어쨌든 화석 같은 드라마를 보려고 편성표를 검색하다니 기적 같은 일이다. 아 이 드라마엔 편성표 검색보다 신문지 편성표가 더 어울린다.
방영 당시 전원일기는 주말드라마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요즘 보니 심야 드라마란 타이틀이 훨씬 어울린다. 화질도 침침한 이 드라마의 매력은 편안함이다. 요즘으로 치면 자연인 프로그램 보는 느낌이랄까.
일단 인물들 중에 악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 간혹 얄미운 인물은 있지만 그들도 베이스는 착한 캐릭터들이다. 착한 사람들끼리의 아웅다웅은 피로감을 줄여준다. 고함과 비명 살인 폭행이 연달아 나와 시청자 협심증 걸리게 하는 펜트하우스와는 확실히 결이 다르다.
그리고 라떼는 하는 그 시절의 묘미가 있다. 손님상에 당시 유일한 다과로 봉지과자를 내놓는 풍경이며 지나치게 짧고 딱 맞는 초등학생 아이들 옷과 등장인물이 많은 드라마임에도 카메라는 3대뿐이라는 충격적인 사실. 그래서 보면 원테이크도 아닌 것이 요상하게 카메라를 휘둘러댄다. 카메라 감독이 바빴을 거라 생각된다. 그리고 기차가 지나가 오디오가 하나도 안 들리는데 그냥 리얼하게 대사를 치는 배우들. 어지간하면 기차 지나가고 했을 텐데. 그리고 방영시기가 길어지면서 작가도 헷갈렸는지 등장인물의 나이가 왔다 갔다 하고 이런 엉성한 매력이 참 볼만난다. 요즘 같으면 상상할 수도 없는 방송사고들에 실소가 나온다.
보다가 나도 저런 자극 없는 밋밋한 드라마를 써보자 생각이 들다가도, 신인이 내가 소재가 순한 맛이면 누가 볼까 싶기도 하고, 성공 공식 루트로 굳어져 버린 마라 맛 글을 포기할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깝긴 하다.
아마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작가가 한둘은 아닐 터. 콘텐츠의 양극화가 날로 심해지고 있으니 말이다. 펜트하우스까지 끝까지 매운맛이던지 윤식 당처럼 정말 순하고 담백한 맛이던지 노선이 명확해야 한다. 요즘은 어정쩡하면 안 보는 시대니깐.
어쨌든 난 요새 순한맛 영상이 좋다. 집값 폭등에 코로나 블루에 삶이 팍팍한 요즘 굳이 자극적인걸 봐서 에너지 낭비할 필요가 있겠나 싶다. 유투브도 과자 만드는 영상이나 글씨 쓰는 영상을 보고 있다. 심신의 평화를 위해. 지금은 그렇다.
근데 코로나가 끝나면 어떻게 될까? 활동성 있는 톡톡 튀는 영상이 인기일까? 지금은 재택근무도 많아 웹소설이 대세인데, 이 시장은 앞으로 가능성이 있는 걸까? 이젠 코로나 이후 시대의 콘텐츠를 대비해야 할 때. 어떤 게 먹힐까. 이번엔 돼야 하는데...
아 스트레스받아, 일단 전원일기 한 편 때리고 시작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