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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날로그숲 Sep 15. 2021

단절은 쉽고 공존은 어렵다

no kids, yes pet zone에 부쳐

여행을 다니다 보면 분위기 좋은 카페도, 맛집으로 유명한 식당도 참 많다. 대체로 인스타그램에서 갈만한 곳을 물색하다 보니 사진 찍기 좋은 곳, 독특한 감성의 분위기를 자랑하는 곳이 대부분이다. 선택지가 너무 많아 매번 어디로 가야 할지 고민이 길어진다. 그러다가도 퍼뜩 “그래, 오늘은 너로 정했어!” 마음이 정해지는 건 순식간이다.


기대 반 설렘 반으로 찾았다가 입구에 커다랗게 경고문처럼 써 붙은 <노키즈존>을 심심치 않게 만나곤 한다. 언젠가부터 다른 손님에 대한 배려와 아이들의 안전사고 방지를 명분으로 노키즈존이 만들어졌다. 서로의 입장이 첨예하게 맞서는 이슈이기도 하다. 애들이 어릴 땐 애써 찾아갔다가 노키즈존이란 문구에 문전 박대당한 기분으로 돌아섰던 적이 여러 번이었다. 몇 번 그러고 나니 자연스레 노키즈존인지 아닌지 확인부터 하는 습관이 생겼다. 가능한 미리 피했다.  


그런데 이번 여행에선 어쩐 일인지 깜빡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커서 더 이상 키즈가 아니므로 신경 쓸 필요가 없어진 탓도 있고, 예전만큼 자주 다니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무튼 큰 아이가 가고 싶다는 카페를 찾아 동네 구석진 곳까지 찾아갔다. 그런 카페는 어쩜 그렇게도 구석에 있는지. 사람들은 또 어떻게 그 구석까지 잘도 찾아가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 신기한 사람들 중 우리도 포함이지만.


좁은 골목길을 돌고 돌아 어렵게 입구를 찾아 반가운 마음에 막 들어서려는데, 나무로 만든 감성 충만한 입간판이 눈에 띄었다. 내용을 읽어보니 예쁜 경고문이었다. 카페 정원은 고객 전용이므로 음료를 주문 후에 사진을 촬영해 달라는 당부였다. 그만큼 사진만 찍고 가는 얌체족이 많다는 뜻이겠지. 그리고 ‘no kids, yes pet zone입니다’라는 문구로 경고의 화룡점정을 찍었다.


고백건대 나도 한때는 아이를 꽤나 싫어했다. 식당이나 카페에서 시끄럽게 소리 지르며 뛰어다니는 아이의 거침없음이 싫었다. 울고 떼쓰면 세상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을 거라 믿는 아이의 뻔뻔함이 싫었다. 자기가 웃어주면 상대방도 당연히 웃어줄 거라 믿는 아이의 단순함이 싫었다. 천진한 얼굴로 팩트 폭력을 일삼는 아이의 무례함이 싫었다. 그런 아이들을 내버려 두는 부모가 이상했다. 나는 절대 저런 부모가, 아니 아예 부모 자체가 되지 않겠노라 했다. 그랬던 내가 두 아이의 엄마가 됐으니 역시 사람 일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그래서 아이를 불편해하는 어른들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한다. 오죽하면 노키즈존을 만들었을까, 그만큼 무개념의 부모가 적지 않다는 뜻이겠지. 그런데 노키즈, 예스펫은 조금 얘기가 달랐다.


“동물은 되는데 애들은 안 된다는 건 애들이 동물보다 못하단 건가요?”


중학생인 첫째가 날 선 질문을 했다. 난감했다.


“그럼 애들보다 시끄럽고 예의 없는 어른은 어떻게 해요?”


이번엔 둘째가 연타로 공격을 해왔다. 어른으로서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도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노키즈 예스펫이라니. 우리 집에는 더 이상 키즈가 없으므로 출입이 가능했지만, 우리는 한 치의 아쉬움도 없이 발길을 돌렸다. 이번엔 문전박대가 아닌, 우리가 보이콧하는 것으로 나름의 소심한 복수를 시전 했다(고 우리끼리 생각함). 그 후로 노키즈존을 다시 확인하게 됐다. 물론 우린 입장이 가능했지만, 계속 거부하는 걸로. 거기 말고도 갈 곳은 많으니까.


그러다 수플레팬케이크가 유명하다는 한 브런치 카페에 들렀다. 하얀 타일에 대비되어 유난히 도드라져 보이는 까만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부모님 주의존’

여러 사람들이 함께 이용하는 공간인 만큼 아이를 동반하시는 부모님들의 적극적인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그곳은 노키즈존이 아니라 부모님 주의존이었다. 업주의 어려움과 고민이 엿보였다. 그냥 다른 가게처럼 노키즈존이라 써 붙일 수도 있었을 텐데 ‘’부모님 주의존’’이란 재치 있는 표현을 쓴 주인의 따뜻한 마음과 배려가 느껴졌다. 배려란 서로가 조금씩 불편함을 나누는 것일 테니.


“아니, 어쩜 같은 말도 이렇게 예쁘게 할까?”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마음이 덩달아 환해졌다. 그래서일까? 나는 생애 최고의 수플레팬케이크를 맛봤다. 왜 유명한지, 나라도 열심히 입소문을 보태고 싶어졌다. 당당하게!


논란 자체를 거부하고 선을 그어 단절하는 건 어떻게 보면 쉽다. 오죽하면 그랬을까 싶은 이면의 안타까움도 있지만,  굳이 따지자면 하수라는 생각을 했다. 조금만 마음을 기울이면 언제나 해결방안은 있기 마련이다. 그런 면에서 ‘부모님 주의존’은 중수라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진정한 고수는 노키즈, 노펫 같은 존이 따로 필요 없는 無존이 아닐까? 서로가 상식선에서 조금씩 양해하고 조심한다면 고수의 길로 갈 수 있을 텐데...


늘 그렇듯 가장 기본인 상식이 제일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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