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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상한새벽 Oct 05. 2020

#2. 의리?의리!의리...

퇴사, 띄어 쓰고 이직


의리란 무엇일까(진지한 건 볼드체로).


살면서 별로 생각해 보지 않았던 문제였다. 사실 생각할 일이 별로 없기도 했다. 내 인간관계는 그리 의리의리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의가 상할 일도 별로 없었던 평탄 무난함 그 자체였다. 그런데 지금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람들로 인해 태어나서 처음으로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있었다. 정말이지 의리란 무엇인가.


발단은 이랬다. 이제는 정말 취업을 하지 않으면 슬슬 위험하다는 위기감에 구직 사이트에 임시저장만 해 두었던 이력서를 슬그머니 오픈한 지 얼마 안 된 때였다. 이력서 공개, 구직 중 상태 변환 버튼을 누르면서도 이걸 누가 보긴 할까 생각했는데, 감사하게도 여기저기서 연락을 받았다. 이게 말로만 듣던 헤드헌터들의 잡 오퍼구나.


벌써부터 세상의 수많은 회사와의 소개팅(?) 약속이 잡힌 것 같아 그렇게 기분이 좋았다. 받은 메일들을 찬찬히 읽어보다가 그중 가장 익숙한 이름의 회사에 시험 삼아 이력서를 보내보기로 했다. 메일에 쓰여 있는 직무 요건에 최대한 맞춰 경력을 다시 한번 정리하고 동트기 전에 오퍼 메일 답장을 보내 놓고 나니 세상 뿌듯했다. 오랜만에 생산성을 발휘한 기분이었달까.


그런데 정작 이 회사와의 만남을 주선한 헤드헌터는 내가 보낸 예스 사인에 반응이 없었다. 오전이 가고 점심시간이 지나고 법정업무시간도 끝났는데도 그에게서는 어떤 메일 회신도 문자도 오지 않았다. 내 메일을 읽긴 한 건가 궁금했지만 그렇다고 "읽으셨나요?라고 묻는 것도 이상했다. 초록창 지식인 검색 결과에 따르면 헤드헌터가 먼저 연락주기 전에 아쉬운 티를 내면 안된다고 나와 있었다. 그래, 내가 직장이 없지 가오가 없나!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의기소침해지는 건 어쩔수가 없었다. 그냥 구직 사이트에서 불특정 다수에게 전체 메일 돌렸던 건가. 아니면 나보다 그 포지션에 더 잘 맞는 후보를 찾은 건가. 저녁을 먹고는 구겨진 자세로 티브이를 보고 있는데 모르는 번호가 핸드폰 화면에 떴다. 얼른 티브이 소리를 낮추고 공손하게 무릎을 꿇고 앉아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 내 예상과 달리 전화를 준 사람은 내가 이력서를 보낸 적 없는, 또다른 헤드헌터였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이미 이력서를 보내 연락을 기다리고 있던 그 회사의 같은 포지션을 추천하려고 전화를 준 거였다.


"죄송하지만 사실 거기는 제가 오늘 아침에 이미 다른 헤드헌터 분께 이력서를 보내둔 상태에요."


아... 하는 장탄식 후에 한껏 실망한 목소리로 그 분이랑 진행 중이신 거에요? 라는 질문이 돌아왔다.


"음, 일단 저는 그럴 생각으로 메일을 보내놓았는데 아직 진행 관련해서 연락은 못받았어요."


그 말에 헤드헌터의 목소리가 급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아직까지 연락이 없는 거면 진행이 안되었을 거라면서 혹시 모르니 그 사람에게는 지원 취소 문자&메일을 보내 놓고 자기한테 다시 이력서를 보내주면 재빠르게 진행해서 답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래도 일단 보내둔 곳의 연락을 기다려야 할 것 같다고 거절했지만, 계속되는 설득에 점점 마음이 나중에 연락온 분에게로 기울기 시작했다. 아직 진행 전이라면 큰 일은 아니겠다 싶기도 했고, 이왕이면 좀 더 친절하고 피드백을 잘 해주시는 분과 하는 게 심적으로도 편할 것 같았다.


그게 실수였다. 내가 몰라도 뭘 너무 몰랐던 것이었다.


안녕하세요. 오늘 이력서 보냈던 새벽입니다. 해당 회사 관련해서는 따로 진행하게 되어 지원 의사를 철회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어쩌구저쩌구 하는 감사의 말로 마무리하고는 전송 버튼을 눌렀다. 그런데 문자를 보내고 얼마 되지 않아 핸드폰이 바로 울렸다. 그 문자에 대한 답도 내일 모레쯤 오겠거니 생각했던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거 심상찮은데.


설마 했던 것이 역시나였다. 통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쏟아지는 말들은... 와, 이러다 집 앞에 찾아오는 거 아닌가 싶었다. 정말이지 그 정도 레벨의 분노였다. 상도덕이 없는 샊이라면서 샹욕까지 하면서도 분이 쉽게 풀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사람 간에 의리가 있는데 말이지 하는데 그냥 주어만 늦게 끼어든 헤드헌터였지 사실상 나보고 들으라는 얘기나 다름없었다.


이러다가는 그의 욕지거리를 계속 듣고 있어야 할 것 같아 이력서를 넘기고 나서 전혀 연락을 받지 못해 난 진행 전이거나 다른 후보가 생긴 줄 알았다며 일단 말을 끊었다. 자기는 이미 PM에게 넘겨서 작업 중이었고 정리가 되면 인사팀 담당자에게 넘기고 차차 연락을 줄 생각이었다는 게 그 헤드헌터의 변이었다. 일단 이직을 막 시작한 나는 그런 내부 프로세스까지는 알 수 없었고 적어도 문자 하나라도 주셨으면 제가 이런 실수를 안했을텐데요 라고 했더니 기세가 한풀 꺾이는 듯 싶다가 그냥 자기네랑 다시 하기로 하면 끝날 일이라고 나를 다그쳤다.


그렇다고 이미 한 번 바꾸기로 한 걸 또 번복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적어도 나의 도덕관에는 그랬다. 어차피 이 사람에게 의리 없는 인간으로 찍힌 마당에 안그래도 스트레스 받는 이직 기간에 이런 자잘한 커뮤니케이션 문제로 기 빨리는 실랑이를 벌이고 싶지도 않았다.


서로의 입장차는 말을 할수록 확실했다. 비유하자면 나는 내가 잠수이별 당했다고 생각한 거고, 상대방은 본인이 환승이별 당했다고 생각하는 거였다. 웃긴 건 이 정도의 배신감을 말하기엔 우리의 연애 기간은 1일도 못된다는 거였다.


이정도 되니 손에 들어온 물고기에 신경을 전혀 쓰지도 않다가 본인이 받을 수당에 문제가 생길 것 같으니 뒤늦게 성질을 부리는 것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이제 욕을 먹든 말든 더더욱 함께 하고 싶지 않아졌다.


사과&거절의 말을 다섯 번 넘게 반복하고 나서야 의리의리한 통화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나가도 나가도 초대되는 카톡감옥처럼 또 다시 전화가 걸려오지 않을까 무서워 핸드폰을 멀찍이 내려놓고 보는데 다행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다시 켠 티브이에선 챙겨 보려고 했던 예능 재방이 한창이었다. 정말 좋아하는 방송인데도 그날따라 내용이 잘 들어오지 않았다. 왠지 모르게 이렇게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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