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상도 사랑해 줄 수 있니?

by 삼일

3개월에 한 번씩 대학병원에 갈 일이 있는데, 갈 때마다 절차가 복잡하고 사람이 많아서 없던 병도 생길 것 같단 생각을 한다. 다행히 몇 번 다녀보니 접수, 수납, 처방전 발행 정도는 키오스크로 빠르게 마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내가 키오스크 앞에서 터치 몇 번으로 할 일을 해결하는 동안 대부분의 어르신들이 인포데스크 앞에서 대기표를 뽑고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쉽게 목도할 수 있었다.


몇 달 전 평소와 같이 대학병원에 외래 갔다가, 검사에 이상 소견이 있다고 난데없이 타과 진료까지 보게 된 적이 있다. (다행히 이상 무) XX내과 진료실 앞에서 대기하는 환자들 중 20대는 나뿐인 것 같았다.

내 접수가 처리될 때쯤 진료를 막 마치고 나온 한 할아버지께서, 대기표를 뽑지 않고 간호사에게 다가가 이것저것 질문하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주의 깊게 지켜보지 않아 무슨 질문을 하셨는지 기억이 잘 나진 않지만, 대충 무슨 검사를 어디서 어떻게 받으면 되는가와 같은 질문이었고, 그분의 말씀을 간호사께서 끊어내더니, 대기표부터 뽑으라 하였다. 그 할아버지는 간호사에게 수차례 질문을 더 던졌지만 돌아간 대답은 똑같았다. “아버님~ 대기표 먼저 뽑으시라고요.”


그러자 그 할아버지가 말했다. “하여간 XX내과 년들은 싹수가 없어… OO과 사람들은 친절하던데.”


띠용; 듣자마자 너무 놀란 나머지 나도 모르게 간호사의 표정을 살피려 고개를 홱 돌렸는데, 더 놀라운 것은 아무 타격도 없어 보이는 그녀들의 표정이었다.


이 해프닝은 내 담당 교수님께서 내 이름을 호명하자마자 머릿속에서 지워졌고, 오늘 할머니와의 대화를 통해 다시 상기되었다.


약사가 의도적으로 약 한 통을 주지 않았다며 전화로 악을 쓰는 젊은이의 이야기, 다른 약국에서 처방받은 약을 비슷한 계열의 다른 약으로 바꿔서 내놓으라며 약국 직원들에게 큰 언성으로 반말을 퍼붓는 노인의 이야기였다.


할머니에게 말했다.


“젊고 빠릿빠릿한 나도 큰 병원에 가면 모든 것이 헷갈리고 어지러운데, 하물며 어르신들은 얼마나 혼란스럽겠느냐고요. 그 과정에서 답답하고 짜증이 나는 건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무례하게 대하면 안 되는 것 아니에요? 그런 환자들을 수도 없이 마주하는 의료진들의 마음도 이해가 간다고, 나는. 그날 XX내과 간호사에게 막말을 퍼붓고 간 노인이 그대로 처방전 들고 할머니 약국 가서 똑같이 행동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도 든다고~!”


할머니의 약국에 오는 진상 손님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이 무슨 거의 매일 새로운 진상 에피소드가 생겨나고, 진상 짓도 각양 각색으로 다채로우며, 놀랄 만큼 의연하고 때로는 깔깔 웃으며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는 할머니를 초연하다고 칭해야 할지 대단하다고 말해야 할지 헷갈릴 정도이다. 나는 아무런 타격 없어 보이는(물론 정말 타격이 없었겠냐마는) 대학병원 XX내과의 간호사의 표정이 떠올랐다.


할머니는 약을 제대로 건네주는 장면이 담긴 CCTV 화면을 캡처하여 젊은이에게 보내주었다. 안 되는 것을 되게 해달라고 생떼 쓰는 노인에게는 그럴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하였고, 직원들에게 반말하지 말아 달라고 했다. 그러자 그 노인은 자기가 몸이 안 좋아서 짜증이 나서 그랬다고 대답했고, 할머니는 환자분께서 짜증이 난다고 직원들이 반말을 감내하여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알려주었다 한다. 그리곤 내게 한마디 더 덧붙였다.


을-매나 힘들믄 그라겠노!


아 ~ 멋있는 사람. 그 멋짐이 온몸 가득 채워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일들이 그녀를 거쳐 갔겠냐마는… 잘 밤에 너무 마음이 촉촉해지는 상상은 그만하기로 한다. ㅋ


나라고 일하면서 마주하게 되는 진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살아온 날 보다 살아갈 날이 더 많으니, 어쩌면 앞으로 더 한 사람들을 많이 겪게 되겠지. 그럴 땐 여러 사람을 다각도에서 고찰하는 나의 태도가 스스로에겐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여러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려는 자는 종종 제 마음은 등한시 여기게 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되므로. 하지만 앞으로도 나는 사람들의 이면을 들여다보고 궁금해할 것이다. 그러면서 내 마음도 챙겨볼 것이다. 따뜻하게 주위를 살펴보고 단단하게 날 지킬 줄 아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느낀, 비 오는 목요일의 일기 끝.


#23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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