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딩 워크샵 일지 #1
인사이트 살롱은 브랜딩과 관련된 주제를 갖고 참석자와 의견을 나누는 가벼운 네트워킹 세션이다. 브랜딩과 관련된 인사이트를 나누기도 하고 브랜딩 고민을 함께 해결해주기도 한다. 작년 7월, 브랜드 슬로건과 관련한 인사이트 살롱에 나이가 조금 있어 보이는 분이 참석을 하셨다. 미팅룸은 인스타그램으로만 홍보를 하고 있어서 브랜드 워크샵이나 인사이트 살롱에 참석 하는 분들은 대부분 2030이기 때문에 나는 그의 등장이 매우 흥미로웠다.
아이스브레이킹을 위한 자기소개 시간, 그분의 이력은 나의 기대를 충족시키기에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그는 대기업에 소프트웨어를 납품하는 회사를 운영했던 공대 출신의 사업가였다. 눈치로는 꽤나 성공적으로 비즈니스를 이끌었고 회사를 팔아 엑시트까지 한 상태였다. 그런 그에게 새로운 도전거리가 생겼는데 바로 장인어른의 사업이었다. 장인어른은 오래전부터 교정깔창 비즈니스를 해오셨는데 연세가 많으셔서 사위인 그가 비즈니스를 이어 받게 된 것이었다. B2B 비즈니스를 성공으로 이끌었던 그에게 B2C는 생소한 비즈니스 영역이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마케팅과 브랜딩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고 여느 스몰브랜드가 그렇듯 마케팅 리소스가 부족했기 때문에 브랜딩과 관련된 모임과 클래스를 찾아 다니며 정보를 얻어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고 싶어 했다.
브랜딩을 위한 그의 첫번째 미션은 슬로건이었다. 오픈마켓을 살펴보니 그의 경쟁사들은 그럴싸한 슬로건을 갖고 있다고 했다. 나는 그에게 슬로건의 용도를 물어봤다. 그는 슬로건이 우리 상품을 돋보이게 해줘서 매출 상승에 도움이 될 것 같다고 대답했다. 이는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틀린 말이기도 하다. 좋은 슬로건은 브랜딩을 일관되게 만들고 일관된 브랜딩은 매출 향상에 언젠가는 크게 도움이 되니까 맞는 말이다. 하지만 브랜드의 핵심가치를 담고 있지 않은 슬로건은 고객에게 정확하지 않은 정보와 이미지를 전달하여 나중에 이를 바로잡는데 더 많은 비용과 노력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슬로건은 핵심가치, 비전과 미션을 정확하게 정의한 뒤에 만들어야 한다. 대표님의 경우엔 핵심가치와 비전이 어느 수준까지 정의가 돼 있는 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또한 브랜딩을 하는 입장에서 제일 중요한건 예산집행의 우선 순위다. 예산은 언제나 부족하고 한정돼 있기 때문에 꼭 필요한 순서대로 사용해야 한다. 다들 하나쯤은 있다는 이유로, 홈페이지 구성을 위해서... 등 꼭 필요하지도 않은 브랜드 이미지 광고를 만드는 브랜드도 많다. 홈페이지 리뉴얼, 슬로건 제작, 브랜드 홍보 영상 제작, 브랜드 세계관과 컨텐츠 제작 등 브랜딩 활동은 돈이 든다. 브랜드를 운영하는 입장에선 현재 가장 급하게 해결해야하는 마케팅 문제를 위해 우선적으로 집행해야하는 브랜딩 활동을 정의하는 기준을 반드시 갖고 있어야 한다.
대표님의 경우엔 브랜드 슬로건 보다는 타겟과 커뮤니케이션의 매체 정의가 우선적으로 필요해 보였기에 슬로건이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설득할 필요가 있었다. 난 그에게 몇가지 질문을 했다. 혹시 카스맥주의 슬로건을 알고 있는지 물었고 테슬라와 현대자동차의 브랜드 슬로건을 아시는지. 스타벅스와 이디야커피의 슬로건을 알고 있는지 물었다.
그는 대답하지 못했다. 난 그에게 매출을 올리는데 슬로건이 유일한 답은 아니라고 말했고 슬로건을 만들고 싶었던 그의 눈빛은 흔들렸다. 사실 우리는 몇몇의 빅브랜드 말고는 슬로건을 기억하지 못한다. 우리가 어떤 브랜드의 슬로건을 기억하고 있다면 그 브랜드는 천문학적인 비용을 써가며 우리에게 슬로건을 기억시키려고 오랜 기간 노력했을 것이다. 스몰브랜드의 입장에서 매출에 도움이 되는 문구가 필요하다면 말그대로 세일즈 문구를 활용하는 것이 좋다. 고객의 구매욕구를 자극할 문장이 훨씬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슬로건은 비싸다. 나이키는 just do it을 위해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 부었고 지금도 붓고 있다. 슬로건은 카피라이터가 몇백만원에 써주면 갖게 되는게 아니라 브랜드의 핵심가치를 찾고 비전을 다듬고 미션을 정해서 적용하고 꾸준하게 관리하고 정성을 쏟아야 비로소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갈길 바쁜 스몰브랜드와 스타트업에게 어쩌면 슬로건은 사치일지도 모르겠다.
대표님에겐 창업주의 니즈에서 출발하여 오랜 기간에 걸쳐 개발되고 꾸준하게 개선해 온 진심의 제품 히스토리가 있다. 그에게 필요한 건 잘 정리된 멋진 짧은 문구가 아닌 그 진심을 꾸준하게 전할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 채널과 컨텐츠다. 멋진 문구를 만들고 싶어서 미팅룸을 찾았던 그는 그날 빈손으로 돌아갔다.
대표님은 그날 인연이 되어 훗날 브랜드 필름 워크샵에서 다시 뵈었는데 그 땐 더 열정적인 눈빛으로 워크샵에 참여하셨다. 슬로건을 만들었냐는 질문에 그는 지금 슬로건이 문제가 아니라고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