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입견은 나만이 부술 수 있다
득과 실. 시간의 가치. 에너지 소비. 언제부턴가 친구를 만나는 시간이 점점 줄어가며 많은 것들을 따진다. 약속장소로 가는 것보다 집 밖을 나서는 거리가 가장 멀게 느껴진다.
친구들은 말한다. 무리에서 이탈하지 말라고. 자꾸 그러면 모임에서 제명시켜 버리겠단다. 무서워해야 할 것만 같은 분위기이지만 내 심정은 마치 찻잔 속의 파도와도 같다. 타격이 없다.
언제부터였을까. 득과 실을 따지고, 시간의 효율성을 고려하며 에너지를 보충하기 위한 선택을 하기 시작한 것이.
휴대폰을 내려놓은 뒤 곰곰이 생각한다. 이내 결론을 내린다. '아. 학교를 졸업한 이후였구나.'
재학시절 수석과 차석을 번갈아 하며 친구들의 도움이 되었던 나는 인간관계가 원만했다. 도서관에 불을 켜고 끄며 친구들과 야식을 먹고 껄껄 웃었던 그때 말이다. 내가 왜 대인관계가 원만했냐면, 시험기간만 되면 그들의 자판기가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친구들은 유독 시험기간에 모르는 것을 내게 항상 물어봤다. 궁금증이 곧 관심이라 생각했던 나는 밝게 웃으며 모든 질문에 대답했다. 내 것을 하지 못한 채. 그들의 미소가 내게 곧 행복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졸업 이후였다. 정체성을 잃은 나는 방황했다. 관심을 주던 친구들은 서서히 스스로의 목표를 찾기 시작한다. 치열한 취업 전쟁 속 대기업에 입사하여 사회를 멋지게 살아갔다. 졸졸 좇아오며 도서관을 배회했던 친구들이 사회로 나가 경제활동을 하는 모습을 보니 자랑스러웠다. 나아가 그들은 점점 같은 분야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나누며 술을 마셨다. 처음에는 보기 좋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급속도로 친해진 그들 사이에 들어갈 틈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 틈은 내가 닫고 있었다. 자격지심과 질투였다.
전공과 다른 길을 가는 나는 자연스레 대화에 참여하기 어려웠고, 자리를 피하게 되었다. 형식상 가끔 겉치레로 나가곤 했으나 그들에겐 진심의 눈빛으로 보이지 않았을 터. 친구들은 다양한 변수를 고려하는 나를 귀신같이 찾아냈다. 절대 들키지 않으려 호쾌하게 웃으며 있지도 않은 사실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그들이 술잔을 기울이는 동안 나는 나의 길을 더 견고히 닦으리라 다짐하며 애써 멋쩍은 미소만 지어 보였다.
한참이 지나자 틈은 닫혔다. '학창 시절엔 네가 앞서나갔지만, 지금은 나야~'라는 소리와 함께.
질투그릇의 크기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을 때, 들었던 위의 목소리는 나를 수십 번 때렸다. 그리고 다짐했다. 그냥 조금 어색해지기로. 우린 결국 1년에 한 번 만날까 말까 한 사이가 되었고, 무리에서 이탈하기로 마음먹기 시작했다.
부질없다 느끼며 모든 것을 내려놓으려는 그때, 한 친구가 손을 건네주었다. 무슨 일이 있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염려의 모습을 담은 체.
나는 '나를 신경 써주는 이가 있구나'라는 일시적인 생각과 함께 자연스레 또다시 자존심의 방어기질이 발동되었다.
'나 잘살고 있어, 걱정 마~내가 누군지 잊었냐!'
아니었다. 잘 살고 있다는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거짓말은 나를 더욱 갉아먹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는 내 모습이었다.
하지만, 친구는 뭔가를 눈치챘는지 그럴수록 내게 더 다가왔다. 마치 주변을 신경 쓰지 않고 본인만의 길을 걷는 용맹한 용사같이.
어느덧 그 친구의 염려가 나를 성장시켰다. 세월에 흐르며 친구덕에 나의 허물이 벗겨졌고 현재 세상 속에서 잘 살아내려 노력하고 있다.
질투나 허영심은 버려놓고, 그들에게서 배울 것을 찾기 시작한다. 5-6년 차를 따지지 않고 내 것에 집중하려 한다. 가면을 벗고 허물을 벗자 친구들은 더 큰 무도회에서 놀 수 있도록 허락해 준다. 그들의 우스갯소리도 받아들일 수 있는 견고한 갑옷은 생겼다. 조금의 자유다. 이제는 또 곧잘 같이 축구도 한다.
끝으로, 손을 건넨 친구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함과 동시에 정체성을 깨고 득과 실을 따지지 않으려는 나의 마음가짐 바닥에 미세한 균열이 남을 인지한다.
나아가 소망한다.
이 진동이 부디 단단한 바닥을 깨어주길. 바닥 아래의 것들을 마주하며 새로운 도약이 되어주길.
오늘도 친구들과 같이 땀을 흘리고 온 나는 내게 말한다.
선입견은 남이 부서질 수 있도록 도움은 줄 수 있다.
하지만, 그걸 깨부수는 건 오롯이 내가 해야 할 몫이다.
선입견은 결국 내가 만든 것이자 나만이 깰 수 있는 것이기에.
아직도 쉼 없이 부수는 과정 중 착오와 쓰러짐 속에 피어나고 있는 나의 민들레.
부디 아픈 소중한 경험을 보듬고 비슷한 상황을 겪는 다른 이들에게도 가닿길.
더 이상 나와 같은 사람이 없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