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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굴욕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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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유미 Jun 17. 2024

무지개 착각



헬스를 시작한 지 3주 차가 되었다. 예전처럼 또다시 무릎이 박살 날까 봐 노심초사했는데 의외로 잘 버텨주고 있다. 그보다 더 놀라운 건 트레이너의 반응이다. 그는 상담 날 나의 인바디 결과지를 보고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지 않았을 뿐 아니라 운동 첫날에 회원 상태를 보고 식겁을 하지 않는 강단을 보여주더니 몇 번의 수업이 진행된 후에 환불을 고려해 볼 수 있다는 알림 따위를 가볍게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가 나에게 한 말이라곤 단지 ‘잘하시는데요’가 전부였다.

맨손 스쾃 3세트 만에 창자가 튀어나올 듯한 숨을 거칠게 몰아쉴 때도 그는 내 옆에서 잘하시는데요, 라며 운동 기록장에 무언가를 적었다.

풀 다운 기구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거나 풀 업 기구에서 나가떨어지지 않으려고 바들바들 떨고 있는 정도로는 그의 침착함을 눈곱만치도 흐트러뜨릴 수 없었다. 그는 여전히 한발 짝 떨어져서 잘하시는데요, 라며 태연히 기록장에 볼펜을 끄적였다.

드디어 첫 하체 수업 날, 마치 치과에서 마취치료를 받은 후 입 주변 감각을 잃어 빨대사이로 음료를 줄줄 흘릴 때와 같은 기분을 느꼈다. 뇌와 두 다리사이에 걷는 감각신호가 끊어진 건지 의지대로 다리가 움직이지 않아 두 손으로 한 다리를 옮기고 다시 두 손으로 뒷다리를 옮기는 동작을 계속해 출입구까지 걸음마를 하는 내 등 뒤로 으레 그의 한결같은 멘트가 날아왔다. 눈은 기록장에 꽂고서. 잘하시는데요.


혼자 앉지도 지도 못해 거의 사족보행으로 하루를 보낸 그날 저녁밥을 먹으며 남편과 대화를 나누었다.


“선생님이 나보고 잘한대.”

“그래?”

“응, 매번. 오늘도 그랬어.”

“회원용 유행어인가?”

“?”

“나 필라테스 선생님도 그러거든. 나보고 아까운 재능이라고. 단지 배가 문제라서 그렇지.”

“!”


남편의 말에 찬란하던 무지개가 눈앞에서 한순간에 사라졌다. 무지개는 꿈으로 가는 다리가 아니라 그저 광학적 환각 현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남편이 여실히 일깨워주었다.

숨바꼭질하는 환상을 내게 끊임없이 적시에 심으려고 운동선생은 주위를 맴돌며 최적의 위치에서 대상을 관찰하고 기록한 것이 분명하다. 그렇게 의심할 만한 정황증거가 있다.

그가 물 마시듯이 단숨에 할 수 있는 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해내고 마는 말, 무지개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잘하시는데요, 뒤에는 사라지듯이 한마디 말이 더 따라붙는다.

단지 힘이 없어서 그렇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은 남편의 배를 빤히 보고 있자니 뱃살을 빼려는데 뱃살이 문제인 경우와 힘쓰는 운동에서 힘없는 것 빼고 잘하는 경우는 목적과 수단 중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생각하다 가뜩이나 없던 밥맛을 잃었다.

식탁아래 감각을 잃은 채 아까부터 후들거리는 내 두 다리가 처량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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