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유미 Jul 25. 2024

에너지 뱀파이어



각각 40대, 50대, 60대인 여자 셋이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사담을 나누고 있었다.

오늘 착장과 선글라스가 잘 어울린다는 60대의 말에 40대가 ‘선글이요?’ 라고 답했다. 요즘은 별별 말을 다 줄인다며 자연스레 화제가 요즘 아이들의 줄임말에 관한 것으로 이어졌다.


“저 얼마 전에 교회에서 에뱀을 배웠어요.”

60대 교회장로가 운을 다.

“아, 학교 애들이 그런 말 쓰더라고요.”

대학교수인 50대가 말을 이었다.

“?”

사회력이 월등히 떨어지는 40대 주부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에너지 뱀파이어요.”

추가설명을 들은 40대의 뇌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했다. 물론 모든 상상력의 한계는 자신의 경험치가 정하는 법이다.

“에너지 뱀파이어라면, 에어컨 따위를 막 돌려서 에너지를 잡아먹는 사람을 말하는 건가요?”


지극히 주부라는 직업병적인 발언에 일행 둘은 무덤덤했지만 그 말을 듣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었던 함께 있던 무고한 행인이 공격을 당했다.

“푸웃!”

사, 오, 육십 대 여자 셋이 동시에 소리나는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어머,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나도 모르게 에어컨이란 말에 웃음이 나와서 그만.”

아직 여파가 가시지 않은 그 행인은 얼굴을 감싸쥐고 어깨를 들썩이며 버스에 오르는 순간까지 연신 미안하다는 추임새를 넣었다.

“괜찮아요, 덕분에 재밌었어요.”

웃기는데 은근 자부심을 갖고 있는 40대가 까딱하면 손까지 흔들어줄 뻔했다.


에뱀, 에너지 뱀파이어, 함께 있으면 상대방의 에너지를 쪽쪽 빨아먹을 정도의 텐션으로 상대를 지치게 하는 사람을 일컬음.


우리 집에 에뱀이 산다. 정확히는 상주하는 것은 아니고 여름방학을 맞아 한 달여간 장기투숙객이 머물고 있다. 할 일 없이 자리만 차지하고 있던 거실 에어컨이 물 만난 고기처럼 신바람을 내고 있다.

투숙객은 에어컨 사용에 있어 불만사항이 많다. 기기가 노후해서 냉방기능이 약하다느니, 24시간 가동을 원한다느니 하면서.

고객을 가려 받을 처지가 아니다 보니 어쩔 수 없지만 나라고 이 장기투숙객이 썩 맘에 들기만 한 것은 아니다. 기상시간이 너무 늦어 제때 식사를 하지 못하는 점, 룸 청결상태가 엉망인 점, 밤늦은 시간까지 활동으로 숙면을 방해하는 점 등등.


무엇보다 이 손님은 에뱀이다. 에너지를 잡아먹는 불가사리 존재.

밤낮으로 에어컨을 가동시키고, 하루 종일 컴퓨터를 켜 놓고, 새벽까지 그 방의 불은 꺼질 줄 모르며, 외출 시에도 빈방에 선풍기가 돌아가고 있다.

손님이 체크아웃하고 난 한 달 뒤에 날아올 청구서가 두렵다. 문제는 경비 처리를 숙소 측에서 온전히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다.

속 편한 공짜 손님은 지금도 자기 방에 틀어박혀서 에뱀 노릇충실히 이행 중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사춘기 개그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