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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유미 Jul 08. 2024

사춘기 개그맨



폭우가 내리는 주말, 거듭된 재난 경보 따위는 무시하고 광주로 향했다. 토요일 16기 학부모 MT가 예정돼 있었다.

그간 학교 행사에서 얼굴을 익힌 학부모도 있었고 처음 본 사람도 몇몇 있었다. 평균나이 오십 대의 낯선 이들이 한 방에 모여 있으니 맹숭맹숭하기 그지없어 모두 똑같이 복사한 것 같은 웃음을 띤 채 서로를 쳐다보는 시간이 지루하게 이어졌다.

한 명씩 차례로 일어나서 자기소개를 하는 시간이 닥치자 이제껏 장시간 사회적 미소에 지쳤던 내 얼굴근육은 아예 그 모양대로 굳어버리기를 택했다.


“대체 민기는 누구를 닮았어요?”

“네?”

“아니, 그렇게 웃기는 유전자가 엄마나 아빠 둘 중에 한 명은 있을 거 아니에요.”


그나마 웃는 얼굴로 얼어붙은 내 모습은 다행으로 생각될 정도로 남편은 모든 표정을 잃은 채 안쓰럽게 박제돼 있었다. 딱 봐도 사회성이 떨어지는 게 역력한 이런 부모에게서 그런 웃기는 애가 나왔을 리가 없지 않느냐는 소리였다. 숨기고 있는 비기를 찾아내고야 말겠다는 호기심에 찬 눈들이 껍질 안으로 잔뜩 움츠러든, 키가 작은 이유로도 사실인, 땅콩 두 개에 다닥다닥 붙었다.

믿을 수 없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우리 집 아이는 학교에서 개그맨이 돼 있었다.


아무리 사춘기 때 아이는 종잡을 수 없다고 하지만 우리 집 애는, 모든 부모들이 이구동성으로 자기 자식에 대해서 말하듯이, 절대 그런 애가 아니다. 확신의 내향형 인간이 왜 맞지도 않는 옷을 입고 설치느냐 말이다.


저녁밥과 술이 어우러지는 자리에서 바로 맞은편에 교장선생님이 자리 잡고 앉았다. 교장선생님은 안면인식에 문제가 있나 싶을 정도로 사람을 잘 못 알아본다고 입학식 날 고백해 놓고는 그 말이 거짓말이었나 싶게 나를 정확하게 지금 학교에서 이름난 개그맨의 엄마인 걸 기억했다.


“민기 어머니”

“네!”

“민기가 아주 매력 있어요.”

“네......”

“제 주역 수업시간에 땡땡이친 건 아시죠?”

“아아, 네.”

“승찬이가 민기를 많이 좋아해요. 날씨도 좋고 민기랑 속 깊은 이야기도 나눌 시간을 갖고 싶어서 동네 산책을 했다 하네요. 제 수업시간에 말이죠.”

“그, 그랬죠.”


책만 보기 아까울 정도로 날씨가 예쁜 날 중학생 남자 둘이서 무려 교장선생님 철학 수업을 빼먹고 몰래 동네 한 바퀴 산책을 하고 왔다. 친구가 좋아서 꽃이 예뻐서 하늘 구경하며 이야기를 나누며 길을 따라 걷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갔단다. 전해 듣기로 그렇다.

우리끼리 비밀이었는데 교장선생님의 누설로 이제 동기 학부모들 중에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다들 둘이 귀엽다며 왁자지껄하게 떠들었다. 취조관의 진땀 빼는 심문이 끝나자 이목을 집중했던 사람들이 다시 삼삼오오 흩어져 말소리가 도란도란해졌다. 교장선생님이 나를 지긋이 보며 한 톤 낮춘 목소리로 말을 했다.


“민기와 대화를 해보면 흥미롭습니다. 눈치가 빨라서 상대방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안성맞춤으로 해줘요. 어째보면 배려심이 있는 거죠.”


눈치 주며 키워서 그러나, 생각해 보다가 뭐라도 하나 있다니 다행인 건가 싶었다.


“속이 단단한 아이예요. 그런데 녀석이 자기 속마음을 잘 털어놓지 않습니다. 누가 다가오면 그 사람이 원하는 걸 얼른 내주고 자기 마음까지는 열지 않아요. 마음과 행동의 괴리가 큰데 그걸 차차 줄여가는 연습을 하는 게 앞으로 민기가 해야 할 공부일 겁니다.”


저녁시간 내내 옴짝달싹 못하게 앞자리를 지키며 개그맨 엄마를 요래 찜 쪄 먹고 조래 찜 쪄 먹는 재미에 빠진 줄만 알았던 사람의 눈빛이 순식간에 번득였다. 교장선생님은 놀란 토끼눈으로 변한 내 표정을 보고 할 일을 다 해서인지 흥미를 잃은 건지 다음 표적을 찾아 자리를 옮겼다.


십여 년간 다양한 교육기관에서 여러 선생님을 거쳤지만 아이를 꿰뚫어 보는 이야기를 듣기는 처음이다. 나만 알고 있는 아이의 진짜 모습을 단박에 알아챈 직관의 날카로움에 감탄했다. 지혜학교 교장자리가 사람 잘 놀리는 순서로 된 게 아닐까 하는 그간 의구심이 사라졌다.


사춘기 생에 접어든 아이는 매일 밤 탈피를 시도한다. 어젯밤 잠든 나를 벗고 새로운 자신이 아침을 맞이한다. 자신의 몸과 마음의 모양이 하루가 다르게 변한다는 건 신기하고 불안하고 때론 두렵기도 한 일일 테다.

곤충도 탈피를 촉진하는 호르몬이 충분히 있어야 적시에 변태를 할 수 있듯이 사춘기 생도 다르지 않다. 그야말로 호르몬이 이성, 감성, 지성 모든 것을 지배하는 시기이다.


그러다 자연스레 호르몬은 멈추고 번데기는 고치 안에 고요히 들어앉아 자신의 날개를 만드는데 집중하는 때가 온다. 그때까지 아이가 인생의 호르몬기를 충분히 즐기길 바란다. 한 프로그램에서 윤경호 배우가 한 말이다. 사춘기, 너의 모든 감정을 존중해.

더불어 나 또한 생면부지의 개그맨 엄마라는 역할을 한동안 누리게 생겼다.


교장선생님 말마따나, 누가 다가오면 그 사람이 원하는 걸 얼른 내주고 자기 마음과 시간을 쓰지 않는데 선수인 사춘기 개그맨은 자신의 아빠도 같은 수법으로 손쉽게 해치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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