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교이다. 그렇지만 무신론자는 아니다. 그렇다고 유신론자라고 말하기엔 어딘가 부족하다. 모시는 신이 없다. 하지만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믿음은 있다. 있다고 믿는 신을 형상적이고 가시적으로 그릴 수 있는 능력도 없고 왜 있다고 생각하는지 이유를 물어봐도 그냥 그렇다고 둘러댈 수밖에 없지만 막연하게 있다고 믿는다. 보이지 않고 겪지 않아도 믿는 것이 있을 때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때때로 혹은 꽤나 자주 초월적이고 영적인 힘이 필요하다. 종교에 대해서는 좋게 말하면 이해심이 넓고, 나쁘게 말하면 주관이 없는 편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평소에도 ‘좋은 게 좋은 거지~’. ‘사람마다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이유가 있겠지’,라고 생각하는 편이긴 하지만 특히 종교에 대해서는 더욱 넓다.
불교를 믿는 것처럼 절의 대법당에서는 삼배를 하고 나오기도 하고, 기독교를 믿는 것처럼 성경 말씀을 떠올리며 친구의 편지에 적을 때도 있다. 여행을 다닐 땐 천주교를 믿는 것처럼 각 나라의 웅장하고 아름다운 성당에서 성호경을 그으며 기도를 드리기도 한다. 내가 이럴 때마다 신들은 하도 굽어살피실 신도가 많아 나처럼 간헐적이고 이도 저도 아니고 배신하는 신도를 원망하거나, 책망하거나, 열외 하거나, 가엾이 여길 수도 있겠지만 아량이 넓고 사랑이 많고 위대한 신들은 나 같은 세미 신도들도 한 번쯤은 봐주지 않을까 해서 속속들이 문어발을 걸치고 있다. 바람둥이 같기도 하고, 주관이 없어 보이기도 하고 사람을 당황스럽게 만들어서 좀 웃긴다는 것도 스스로 안다. 하지만 나에겐 이게 맞고, 이게 좋다. 신 앞에 손을 모으고 기도를 드리면서 내가 무엇을 가장 바라는지, 바라는 게 얼마나 많은지, 사랑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깨닫는다. 그게 내가 살고 싶은 이유고 살아가야 할 이유라고 인정하게 된다. 그러면 매사에 복잡하고 무겁고 불안한 내 인생이 단순해지고 가벼워지고 행복해진다. 그래서 당분간은 이 태도가 변하지 않을 것 같다. 즉 무교지만 유신론자라는 단어로 내 종교를 설명하면서 많은 신을 필요할 때 선택적으로 모시면서 살 예정이다. 동시에 신께 죄송하고 겸연쩍은 마음도 가지고 살아야 한다. (이 말을 신부님, 스님, 목사님 앞에선 절대 하지 못한다. 여러분이니까 할 수 있는 거다. 그러니까 내가 어느 성직자 앞에서 사람 좋은 웃음을 내보이고 있더라도 우리 비밀로 하자.)
신 앞에서는 인간이 솔직하고 겸허해지기 때문에 순수하고 깨끗하다. 그래서 신을 모신 공간 안에 있는 인간들의 모습을 좋아한다. 기독교의 아가페적인 사랑, 불교의 중도와 윤회사상, 유교의 인, 천주교의 믿음과 소망을 모두 좋아하고 믿는다. 이럴 땐 이렇게 믿고 설명하고, 저럴 땐 저렇게 믿고 설명한다. 분명히 정의 내림으로써 규정짓고 올바르고 정확하며 내집단에 속해 소속감을 느끼는 것도 좋지만, 이렇게 정의 내리지 않고 경계를 왔다 갔다 하면서 애매모호하고 자유롭고 다양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좋다.
이렇게 된 까닭은 내가 많은 경전을 읽었거나, 종교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져서 그런 게 절대 아니다. 환경의 영향이다. 부모님의 종교는 불교였고, 중학교 고등학교는 기독교 학교였고, 대학교는 천주교다. 3대 종교를 섭렵하고 있는 셈이다. 어느 한 종교도 역사를 줄줄 읊을 만큼 잘 알고 있는 건 아니지만 참회하고 기도하고 설교를 들으며 들은 건 많다. 그래서 우스갯소리로 친구들한테 나는 3대 종교를 모두 믿어봤다고 말하기도 한다. 유년기 청소년기 속 종교적인 가르침 속에서 종교가 없는 것도 고집이 세다는 증거 같기도 하고, 그만큼 내가 종교를 스스로 택할 수 있도록 강요하지 않았던 수많은 어른들께도 감사한 마음이다.
한 사람에게 종교는 삶에서 크고 중요한 부분이라서 쉽게 말할 수 없고, 다른 가치관을 가지면 논쟁을 하고 관계가 틀어질 수 있기에 대화 주제가 될 수 없을 때가 많다. 그런데 다양한 종교에 문어발을 걸치고 있으면 종교 이야기를 할 수 있다. 나는 종교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한다. 종교를 가진 이를 만날 때면 '당신은 이런 종교를 믿고 있군요, 어떻게 믿게 되었나요? 언제부터 믿었나요? 어떤 기도를 하나요? 그 신의 어떤 말씀을 진리라고 믿고 좋아하나요?' 와 같은 질문을 한다. 이런 질문을 통해 그 사람의 개인적인 믿음과 소망, 겸손하고 진실한 마음, 원초적인 어떤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서로의 삶에 대해 존중하는 마음으로 단단하게 가까워지고, 그 사람 자체를 알 수 있었다.
엄마의 종교는 불교다. 엄마는 늦둥이인 나를 건강하게 낳기 위해 무거운 몸을 이끌고 높은 산에 있는 절에 올라가 백일기도를 하셨다고 한다. 신이 기도를 들어주셨는지, 엄마의 의지가 그만큼 강하셨던 건지, 엄마는 마흔둘의 나이에 나를 자연분만으로 낳으셨다. 엄마의 직감 같은 게 있으셨는지 예정일보다 빠른 새벽에 내가 세상에 태어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걸 느끼고는 머리를 감고 병원에 가셨다고 한다. 진통을 거의 하지 않고 병원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건강하게 나를 낳으셨다. 뱃속에 있을 때도 입덧을 잘하지 않았고, 태동이 심하지 않아서 우리 막내딸은 태어날 때부터 효녀였다는 말을 줄곧 하신다. 그래서 나는 효녀로 태어나, 효녀로 잘 자라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는 내가 정말 효녀라서 그런 게 아니라, 어머니 덕에 효녀가 될 수 있었다는 걸 안다.
엄마는 내가 큰 발차기를 했어도 ‘아이고, 건강하게 잘 자라는 신호네.’, 입덧을 하면 ‘이게 먹기 싫구나, 네가 안 좋아하는구나.’라고 생각하셨을 테지. 늦둥이를 순산하기 위해 운동을 꾸준히 하고, 꼭꼭 씹어 먹으며 첫째 딸과 둘째 딸을 낳으며 얻는 노하우를 총동원하셨겠지. 모든 건 내가 잘한 게 아니었다. 엄마가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관리하신 거였다. 이걸 너무 늦게 알았다. 올해 엄마 생신에는 당신의 마음을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고 말씀드려야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이럴 때 내가 어른이 되어간다고 느낀다. 커가고 있다는 걸 실감한다. 마치 눈앞에서 어린아이가 10센티씩 쑥쑥 큰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는 것 마냥 내가 크고 있는 게 보인다. 학자금 대출을 받아야 해서 금리 조건을 따질 때, 다음 달에 내야 할 신용카드값을 걱정할 때, 국민연금을 꼬박꼬박 내면서도 내 또래들은 연금을 받을 수 있을까 걱정할 때, 강남을 지나가며 보이는 한강뷰 아파트들의 전세와 월세를 어림잡아볼 때도 어른이 되었다는 걸 느꼈는데, 그 느낌과는 사뭇 다르다. 돈 문제는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떠오르고, 내가 가진 것과 가지지 못한 것을 비교해서 씁쓸하게 만들거나 복권 당첨과 같은 천만 분의 일과 같은 운을 바라는 염불을 외는 것으로 마치는데, 내가 들으며 자랐기 때문에 판단 과정 없이 옳다고 믿었던 것들이 세상을 보는 눈으로 다르게 보일 때의 느낌이 잔잔하게 남아 온기를 준다.
물론 약국에서 산 텐텐을 연달아 4개씩 먹어치울 때, 비요뜨를 2+1으로 사 냉장고에 쟁여둘 때, 민증 검사를 하지 않을 만큼 액면가에도 나이가 들었나 생각하며 아쉬워하는 이런 소소한 순간들도 좋아하긴 하지만.
엄마는 간간이 친한 보살님들로부터 사주 보시는 걸 좋아한다. 내 사주엔 역마살이 있다고 한다. 역마살은 늘 분주하게 이리저리 떠돌아다니게 된 액운이라고 하는데, 맞는지 아닌지 아직까지 알쏭달쏭하다. 썩 나쁘진 않다. 물론 지금 독일에서 자취를 하는 게 마음에 들어서 그런 거겠지만. 역마살이 정말로 있든 없든 세상을 여행하면서 어느 곳에도 걷고 서고 앉아 쉴 자리를 정하며 내 쓰임을 다했으면 좋겠다. 세상에 대한 물음이 끊이질 않고 생명을 귀하게 여기며 살아갔으면 좋겠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며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려 한다.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며 오늘 밤에도 바람에 스치우는 별을 올려다본다. 이 마음과 믿음이 스물세 살의 여름에 배운 것이다.
“피난처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우연히’ 왔다. 하지만 우연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뭔가를 간절히 원해서 발견한 것이라면, 그건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그의 필사적인 소원이 필연적으로 그곳으로 이끈 것이다.” 『데미안』
세상 어느 곳에도 확실한 게 없지만, 이 글에 사랑이 곳곳에 묻어있다는 것만은 확신한다. 아직도 나에게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이 많다. 마음에 드는 구석은 간혹 가다 생긴다. 아주 가끔. 예쁘고 선한 이들이 바라보는 시선을 말로 옮겨줄 때 잠시 그렇게 생각하게 된다. 나도 나에 대해서 잘 모른다. 이랬다 저랬다 변덕을 부리기도 한다. 1분 사이에도 생각과 결심이 바뀐다. 그래서 남들은 더 알 수 없다고 생각한다.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이 뭐가 뭔지 모르겠다. 모르겠다는 것만이 분명하다. 자주 틀리고, 모호하고, 넘어지겠지. 그걸 인정하면 편하다.
어떨 땐 아름답고 어쩔 땐 험난한 이 세상에서 당신의 피난처를 찾고, 피난처를 만들고, 뭘 향해 가는지 모르겠더라도 일단 발붙이고 살아줬으면 한다. 뭔가를 간절히 원하는 게 있었으면 좋겠다. 그것이 당신이 스스로 이룰 수 없는 것일지라도 맹목적으로 바라보거나 꿈꾸는 것이 있었으면 한다. 어쩔 수 없이 살아가는 게 아니라, 당신의 의지에 의해서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걸 알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