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앎 Dec 28. 2023

마흔이 넘어 초보 바리스타로 산다는 것.

교수를 그만두고 다른 직업으로 1년을 보낸 이야기

불안장애와 우울증을 앓고 있으면서 무언가를 하고 있지 않았을 때 나를 잃어버린 느낌이 들어 괴로웠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집안에서 책만 읽는 생활이 한두 달은 편할지 모르겠지만 서너 달 이상, 반년이 지나도록 그 상태로 여전하다면 나의 존재에 필요가 없음을 느끼나는 있어도 있는 게 아닌 존재가 된다.


바리스타라는 직업은 새로운 에너지가 흐르고 몸과 마음을 회복시키는데 크게 도움을 주었다. 세상에 맞서 투쟁할 수 있는 힘이 생겨났고 나는 이것을 회복되었다는 신호라고 받아들였다. 기지개를 켜고 살아나가려 한 걸음 더 떼었다는 의미로 말이다.




     


바리스타 자격증을 따고 나서 간신히 카페에서 일을 시작했다. 나이가 사십이 넘는다는 이유로 도심의 여러 카페에서는 직원으로 채용하기를 꺼려했다. 어떤 직업이든 나이는 첫 번째 통과할 관문, 첫 번째 시험대상이 된다. 카페도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런 걸로 나이 먹은 걸 자책하고 싶지는 않았다. 사회 시스템이 그런 걸 내가 어쩌겠나.


아무 쓸모없는 종이조각과 허영밖에 되지 않는 박사학위와 자존심은 밥에 말아먹은 듯, 이 몸 받아주시면 그저 “감사합니다.”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어렵게 들어간 카페는 전통차를 주 메뉴로 커피를 판매하는 카페였고 그곳으로 매일 사회 초년생의 마음으로 출근했다. 나이 사십이 넘어서 사회 초년생이라니..! 얼마나 설레었겠는가. 하루 종일 서서 일할 게 뻔해도 무언가 내가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는 자체가 즐거움을 주었다.


출근 시간에 맞춰 카페에 도착하면 이미 주문이 들어온 메뉴를 만드느라 허둥지둥하기 일쑤고 쌓여 있는 설거지를 처리하느라 바로 물에 손을 담가야 했다. 그래도 재미를 느꼈고 즐거웠다. 그 일을 하기 위해 선택한 직업이 바리스타였고, 내가 할 수 있는 있다는 것이 뿌듯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새로운 직업에 마냥 즐거움을 느끼는 것도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누군가 그러지 않았는가. 처음 몇 개월은 '내가 이렇게 한심한 인간이었나?' 자각하는 시간이라고... 그 말 따라 카페나 주방에서 일해본 적이 없는 나는 한심하고 바보 같은 사람으로 취급을 받는 게 일과 중 하나였다. 음료마다 레시피는 정해져 있고 똑같은 이름의 음료를 여러 번 만들어도 상황에 따라서 아니면 사장의 기분에 따라서 어떤 때는 “양이 적다.”, “진하다.” 어떤 날은 “양이 많다, 묽다.” 구박받기 일쑤였다.


초짜였으니 그런 건 익숙해지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급하고 괴팍한 성격을 가진 사장은 왜인지 나를 못 마땅해했다. 혼자 일하는 게 익숙해서인지 말수가 그리 많은 편이 아니고 살아온 환경 탓에 행동이 신중할 수밖에 없는 나는 나이를 그렇게 먹고 주방에 손 한번 안 대본 굼뜨고 융통성 없는 사람으로 취급받아야 했다. "일은 잘하는데, 융통성이 없어." 대 놓고 기죽이는 말은 왜 그렇게 하셨을까. 자기도 자식이 있으면서...


힘들 때면 배울 때 부끄러움은 함께 해야 한다던 아흔 살의 아이패드 드로잉 작가 여유재순님의 말이 수시로 떠올랐다. 대학원 생활을 하면서 겪었던 시간들도 떠올리곤 했다. 그런데도 인격적으로 하대하는 상대의 태도에 더 이상은 참기 힘들었다. 꾹꾹 참는 게 한계에 도달했는지, 나는 얼마 못 가고 첫 카페에서 제대로 된 월급을 받지 못한 상태로 그만두고 나와야 했다.* (고용노동부에 신고하겠다는 연락 후 받긴 했지만 전부를 받지는 못했다.)      


이후로 두세 군데 카페에서 몇 개월씩 일을 했고 업무는 반복적이고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생각해 보면 더 어렵고 복잡한 생체 해부도 해봤는데 카페 일쯤이야, 시간 지나면 못할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타인은 시간이 지나고, 어딜 가도 힘든 대상이었다. 상대의 기분이 어떨지는 상관없이 자신의 호기심을 채우는 것이 중요한 사람들은 당신과 나의 영역을 마음대로 넘어서 사적인 영역으로 서슴없이 침범해 왔다.


근무 시간 중에 같이 있다 보면 새로 온 직원이 이전에는 무슨 일을 했는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다들 궁금해했다. 그럴 때면 거짓말을 하면 또 거짓말을 낳고 또 낳아야 하는 불편함을 겪기 싫어서 솔직하게 전직을 밝히곤 했다. 그게 실수였다. 내 전직이 늘 발목을 잡아 피곤하게 만들곤 했다.


“왜 카페 일을 하는 거예요?”

“편하고 쉬운 그 좋은 교수일은 왜 그만뒀어?”


교수라는 직업이 언제부터 그렇게 쉽고 편한 일이 되어버렸는가. 그런 질문을 들을 때면 내가 배가 불러서 카페로 소풍 나온 사람이 된 듯한 느낌이 종종 들곤 했다.


그 누구도 하루 8시간을 서서 사람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소풍을 즐기는 사람은 없다. 자신이 배울 수 있고, 즐거움을 느끼기에 하는 일이지 그게 아니라면 이 근로 환경은 몸이 상하는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왼손 엄지손가락이 아직도 안 펴진다. 1년도 채 안 돼서 손가락 관절이 고장 났다. 요령 없 내 탓이지 누굴 탓하겠는가.)   

   

바리스타 시작한 지 어느덧 1년이 가까워간다. 카페에서 라테아트를 멋들어지게 그려보고 샷을 폼나게 추출하는 환상은 진즉에 산산조각이 났고 '어딜 가나 사람은 거기서 거기구나.'라는 교훈을 얻었다. 먼 훗날 북카페나 북바(bar)를 개업하고 싶다는 말은 곧 카페를 개업한다는 말로 와전이 되고, 누군가와의 이해관계를 위한 고민상담은 전부가 알게 되는 수다상의 반찬이 되는 그 지긋지긋한 집단 이기주의가 어딜 가나 변함없이 존재한다는 것을 또 느꼈다.

     

나이가 들어 갈수록 사람들이 사람을 믿는 것에 시간이 걸리는 이유가 이런 경험이 겹겹이 쌓여 버린 탓이 아닐까. 당신들도 지겹도록 당해서 똑같아진 것은 아닐까. 나는 그래도 그렇게 살고 싶지 않은데...


진심을 말해도 진심을 이용하여 놀이로 삼는 사람들 속에서 나는 늘 이방인의 모습으로 한 무리에 끼는 것이 쉽지 않다. 여기서도 거기서도 그런 성격으로 사느니 떠나는 편이 속이 편했다. 도망이 아니라 내가 나답게 살기 위한 방법이다.    


 카페에서 경험한 일들이 안 좋은 이야기로만 적히는 것 같지만 그래도 오래 해왔던 일의 한계에서 벗어나 새로운 직업으로 나를 책임질 수 있다는 자부심이나 자신감은 포상처럼 남아있다. 이제 제법 라테를 예쁘게 만들기도 한다. 그게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다. 커피 전문가로 고 싶었던 나의 꿈은 현실에 부딪쳐 대추를 다듬거나 전통차를 끓여야 했던 날이 더 많았기에 현실이라는 옷에 나를 맞추는 법도 터득하는 시간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아무리 이리 치이고 저리 치였어도 내가 하고 싶은 꿈은 아직 여전히 남아 있다. 책과 음악이 있고 술과 커피가 함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 나는 커피 주문이 들어오면 제일 신이 났다. 신나고 재미있는 일을 하기 위해서 아직은 조금 더 다듬어 가야 할 때인 것 같다.


아직은 더 잘할 수 있고, 좋아하는 일에 균형을 잡아 집중하고 남의 말마따라 소풍 가듯이 카페에서 일을 하는 사람으로 살아가야겠다. 소풍 가듯이 조금 더 살아 봐야겠다.


학교 밖 세상을 배우기로 다짐했으니까... 아직 배울 것이 너무 많다.



*주휴수당은 주 15시간 이상 근로자에게는 꼭 지급해야 하고, 2023년 기준 최저 시급은 9,620원입니다. 주휴수당 포함한 최저시급은 11,544원입니다. 꼭 잘 챙기세요. 지급 안 할 경우 고용노동부에 신고하면 받을 수 있습니다. 근로계약서 꼭 쓰시고요. 신고할 때 증거 제출이 필요합니다. 메시지로 대화를 나누시고 증거는 꼭 남겨 놓으시길..

작가의 이전글 이것이 자유로운 삶이 아닐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