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일기 - 9
이주동안 약을 전혀 먹지 않았다. 가기로 했던 지지난주 토요일에 늦잠을 잤고, 챙겨 먹는 일도 귀찮았다. 언젠가 끊어야 할 약이라면 지금이라고 안될 건 뭔가 싶었다.
사흘 전부터 이유 없는 어지러움, 방향감각 상실이 나타났다. 기분조절은 힘들었고, 항상 보았던 주변인의 행동에도 짜증이 치밀었다. 잠은 뭐... 제대로 잤을 리가 없다. 전 같으면 야동이라도 봤겠건만, 장기복용 이후 성욕이 아예 사라지다시피 해서.
스트레스를 주는 환경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다. 100이든 1000이든 그 무게를 온전히 받아내는 역할이 내 영역이라 생각한다. "그건 아니지"라거나 "스트레스 상황을 벗어나"라 하는 놈들은 본인이 우울증 악화의 주범임은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다. 후안무치한 것들.
의사는 평일오전이라 여유로웠는지 이것저것 물었다. 귀찮았다. 설명하기가 귀찮고, 부작용으로 절반 줄인 프로작도 못마땅했다. 이 의사가 친절하고 귀엽긴 하다만 나랑 사귀기를 할 건가? 막말로 오픈런 안 하면, 돈 떨어지면 말 한마디 못 나누는 관계인데. 공감은 받아서 무얼 하지. 애초에 바라는 게 얼마나 "힘든지"를 알아달란 게 아닌데.
이상을 가지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자주 실망한다. 인간에 실망하고, 지치고, 그들이 내뱉는 약속과 번드르르한 다짐에 넌더리가 난다. 안 그러는 인간을 언젠가 발견하길, 가능한 그날이 빨리 오길 기도할 뿐이다. 아니면 적어도 인간을 똑바로 보는 눈이라도 주시든가. 쓰레기만 보면 환장하는 자신의 어리석음도 지겹다.
지쳐서 포기하기 일보직전인 상태로 질질 끌려다닌다.